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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1/17) 게시물이에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고찰 | 인스티즈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고찰 | 인스티즈


깨알같은 정조준 금지구역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고찰 | 인스티즈


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용사들

Contents
1 개요
1.1 사실 그 이전에... 1.2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2 한국군의 활약
2.1 과장된 한국군? 2.2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2.3 그 밖에
3 각종 논란
3.1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3.2 용병 논란
3.2.1 용병이 맞다고 보는 시각 3.2.2 용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 3.2.3 표현의 문제
3.3 라이따이한 문제 3.4 국제사회의 이미지
4 학살 문제
4.1 연구성과와 논란 4.2 그 밖에
4.2.1 참고
5 포로? 6 주요 전투 기록 7 관련 인물 8 기타



 

[edit]
1 개요 베트남 전쟁대한민국과도 연관이 많은데,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군주한미군 제7사단을 빼내서 베트남으로 보냈고, 곧 이어 2사단마저도 빼내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기면 북한의 침공이 벌어질까 두려워 하게 되었고, 미군 측에 먼저 '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 보내줄게!'라고 제안을 하게 되는데, 미국이 결국 이를 승락하여 우리나라도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측에 '우리가 잘 싸우려면 너네가 돈도 잘 주고 장비를 잘 지원해 줘야 함!' 이라고 요구를 하여 군 현대화와 더불어 경제 지원을 약속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장비와 자금이 대한민국 국군 장비의 현대화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것도 그냥 원동력 수준이 아니라, 60년대에는 공장이 없어서 군인들 전투복도 제대로 못만들고 지급 못하던 한국, 고속도로 하나 없고 가발공장에서 만드는 가발이 수출 1등공신이던 한국이 70년대에 들어서면 제대로 산업다운 산업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의 뒷면에서는 한국 장병들의 피가 한 몫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으며, 비슷한 경제사정이었던 태국군보다도 낮았다. # 한국군의 전과는 괜찮은 편이지만, 미군측으로 참전한 다른 연합국(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군들도 대체로 비슷한 평가(잘싸운다)를 받았다. 이는 남베트남군이 워낙 막장이고, 미군의 사기가 워낙 낮아서 참전 외국군들이 상대적으로 돋보인 탓도 크다.


[edit]
1.1 사실 그 이전에... 사실 '베트남전'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vs 미국 + 남베트남(+ 한국군 + ...)의 전황이 이루어졌던 2차 인도차이나 전쟁만을 생각하지만,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한국에서 참전하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권은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제시한 명분처럼 '6.25 전쟁 해외 파병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살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한 미국이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1954년 6월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가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공산권의 세력이 뚜렷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리잡는 쪽으로 흘러가자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


[edit]
1.2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당시 미국이 단순히 전황이 안 좋아서 주한미군을 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게 모조리 외면을 받았기에 한국을 압박해서 동맹군을 뜯어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 중에는 미국의 압박을 받은 만큼 그 당시의 한국 입장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파병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일리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에 투입된 병력과 전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 중에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서 후임 국방장관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의회 승인 안받고 유럽 주둔군 등 타 지역에 투입되어야 할 물자와 자금까지 빼다가 베트남에 쏟아부었고, 타지역 병력들도 줄줄이 베트남으로 향한 상태였다. 테트 공세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겹친 68년 클라이막스 시기에는 병력이 모자라서 제한적이지만 예비역, 주방위군까지 현역전환 시켜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 병력과 교대시켰다.

이게 뭔말이냐 하면, 한국의 경우 푸에블로 호 사건이 벌어지면서 기존 주둔 부대 외에 신속대응군이 투입되었는데, 이들을 새로 소집한 주방위군-예비역 부대로 교체하고 앞서 증파된 부대는 베트남으로 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국 상황이 안정화되자 교체됐던 주방위-예비역부대도 베트남으로 보냈다. 미국은 68년 최대 병력 55만까지 치솟을 때는 사실상 전세계 주둔군을 다 쏟아붓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한가하게 한국 사정 봐줄 시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일부가 가지 않았다면, 미군이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빠져나간 병력은 다시 돌아온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는 그 당시 대통령박정희가 자신의 정권을 미국에게 인정받기 위해 장병들을 팔아먹었다음모론도 있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박정희의 쿠데타가 끝나고 군인에서 물러나고 난 뒤에 대통령 국민 선거로 정식 대통령으로 부임한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지지도에 의심이 가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측에 먼저 파병 '제안'을 했다는 말은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이전에 베트남 공화국의 시궁창스러운 실상을 알지 못한 그 당시 국민들에게 파병에 대한 명분은 충분했다. 남베트남은 어쨌거나 냉전기에 한국과 같이 반공을 표방하던 나라였고, 또한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대한민국과 국교도 제대로 맺고, 대사관도 서로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동남아에 "태극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계 있는 동맹국에 원군을 보낸 것이다.

거기다 불과 10여년 전에 북한의 공격 때문에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릴 뻔 하다 유엔군의 도움 때문에 겨우 살아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베트남을 북베트남 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봤을게 뻔하다. 10여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게 당해봤으니 안 그러면 이상하지. 이래서 '미국이 우리를 한국전쟁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돌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많다. 저건 어디까지나 명분이지, 결국 한국도 콩고물 먹고자 한 짓이라는 것. 실제로 미군이 쓰다버린 탄피도 한국군이 죄다 주워갔다는 미군 측 기록을 봐도. 그리고 당시 생존해있던 독립운동가 박순천[1][2]

결론적으로, 미군은 베트남전 와중 한국군의 참전에도 주한미군 병력을 빼서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edit]
2 한국군의 활약 당시 한국군의 활약은 꽤나 인상적인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이 그냥 잘 싸운건 아니다. 초기 파월 병력 대부분은 각 사단에서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으로 뽑아서 파월사단 병력과 교체시키는 식으로 전투력 강화에 힘썼고, 부사관100%, 중대장급 이상 장교 90% 가량을 한국전쟁 경험자로 배치시킨 상태였기 때문. 게다가 파병군 사령관인 채명신 중장은 아예 한국전쟁 당시 북한땅에서 게릴라전 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해서 간데다, 공교롭게도 불교 문화나 남북이 갈라져 싸운다는 전쟁 양상도 많이 닮았다. 채명신 장군의 경험에 의해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로 인해 전투병으로서의 명성보다도 이 분야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3] 주로 싸운 대상인 베트콩들은 게릴라들이었고 이건 대 게릴라전의 기본 전략 중 하나다. 전공이 높은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1만9,640톤, 의류 46만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무기 면에서도, 원래는 뒤떨어지는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던 한국군이,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과 다른 미군 병기로 무장했기에 화력 면에서도 미군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싸우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등의 임무가 많았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이라는 점에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보면 두코 전투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페스 전투나 짜빈박 전투 등 월맹 정규군(북베트남군)과 여러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서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풍부하다.

정리하자면,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다.

여하튼, '짜빈동 전투'만큼은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자세한 전투 경과를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edit]
2.1 과장된 한국군?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과 왜곡된 것이며 한국군은 무능하였고 부패했으며 잔혹했다고 한겨레신문이 주장한 바 있다.#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내는 장문의 보고서인 이 내용은

  • 한국군은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의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등 한국군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려놓았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 이 평가는 제임스 맥이 일방적으로 생각한 해병 2여단에 대한 평가로 그것도 쿠앙남성 이남지역의 한국군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으며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거의 일관적으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4][5]

게다가 제임스 맥이 부정적 평가를 내린 해병 2여단은 베트남전의 활약으로 한국 대통령 표창은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까지 받았다. 또,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5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상자 비율은 둘째치더라도 제임스 맥 외에 한국군의 군사적 활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없고, 설사 해병 2여단이 그렇다 하더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한 부대는 2여단만이 아니니 전체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없다.

게다가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 고문단이 모두 유능하고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케네디 시절, 베트남 정세를 시찰하고 보고하라고 보낸 두 명의 저명한 고문이 있었는데... 당시 고딘 디엠의 실정과 개판5분전인 남베트남군과 치안상태를 보고와서 한 명은 개판5분전이니 가망없다고 했고, 나머지 한 명은 고딘 디엠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지도자고 남베트남군은 용감무쌍해서 영토 전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했었다.어이가 없어서 케네디가 ' 두 분, 같은 나라 보고 온 거 맞습니까?" 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마디로 고문의 성향에 따라서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국공내전이 한창인 시절, 장개석의 실정을 보고도 당시 트루먼 행정부와 의회에서는 똑같은 견해차이를 보였다. 알다시피 우린 누가 옳았는지 이제는 다 알고 있지 않나... 미국 고문이라고 해도 사심은 있다. 그가 옳은지 틀린지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옳은 말만 객관적으로 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건 아니고 패배한 전투도 있다. 참고바람


[edit]
2.2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한국군에 대해 자세한 홈페이지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뉴욕타임즈, 1966년 7월 22일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미국 에반스빌 저널, 1966년 3월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었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였다. 뉴스 위크, 1967년 4월 10일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여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찰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월넘 띠엔, 반지에서. 1968년 2월 17일

한국군은 우군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격파 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 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백마,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니 북베트남군의 문서에 의하면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보고 이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96킬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영국 런던 타임즈


[edit]
2.3 그 밖에 적군 시체가 아닌 무기를 통하여 공과를 확인했기에 일부에선 무기를 돈주고 사와서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그만큼 막장인 베트남에선 무기를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점.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에서도 이걸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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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종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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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미국의 명분없는 침략 전쟁에 파병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얘초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 명분이 되었던 통킹 만 사건이 2차 공세에 한해서 조작으로 판명된 시점에서 확실히 명분없는 '침략' 전쟁은 아니지만 명분없는 '전쟁'은 맞다.

미군 특수부대가 소규모 월경작전을 벌인 적은 있지만,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제외하면 미군이나, 한국군의 지상군이 북베트남 영토에 직접 진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이 논리로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얘초에 악랄한 식민지배로 원성을 사던 프랑스의 베트남 재식민화를 마치 지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확실히 미국이다. 북베트남 영토에 진격한 적이 없으니 미군은 방어만 했다 - 그러므로 이건 전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어전쟁이다라는 논리가 성립하려면 얘초에 프랑스를 지원해서 핵협박까지 준비하던 것과 통킹만 사건에서 베트남군의 1차 공격 구실이 된 불법적인 34-A 작전을 지원하면서 베트남 해안에 대한 불법침입과 정찰을 한 것, 더구나 통킹만 이후에 국제법을 무시하고 선전포고도 하지않고 미국 상/하원의 동의도 없이 Pierce Arrow 작전으로 베트남 폭격을 시작한 것 등을 고려해 보자. 이런데도 굳이 '영토를 직접 침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까?



하지만... 여기에 대해 미국도 할 말은 있다.
통킹만 사건과 34-A 작전이 괜히 나온건가? 아니다.
위 작전의 발단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북베트남군의 남파와 그들이 남쪽에서 자행한 촌락전쟁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북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호치민 루트를 따라 남파해 남쪽 반정부세력과 공산주의자를 규합해 베트콩을 창설하고 이들을 앞세워 사이공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외곽 농촌마을부터 접수해 나갔다. 이것이 이른바 촌락전쟁인데...

이때 북베트남과 공산주의에 협조하지 않는 주민들이 무수히 죽어나가고 마을이 불태워졌다. 이 시기는 미군의 적극개입 훨씬 전의 이야기다. 이때 서방 언론사들이 대거 종군취재한 학살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돈다. 학살극의 시작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이었다.

이런 불법 남침이 자행되자, 남베트남과 미국도 침투부대를 양성해서 공중투하와 해상침투 작전을 병행했다. 이중 해상침투 작전이 34-A로 대표되는 작전이었다. 북쪽의 남파는 느슨한 남베트남의 사정상 손쉬웠지만, 북파는 공산주의 특유의 조직적 감시망 때문에 대부분 침투 직후에 체포되어 일부는 이중간첩으로 전향까지 했다.

미국이나 남베트남의 목적은 17도선 이남의 미국 지도하의 안정화였지 17도선 이북으로의 침공은 아니었다. 북쪽이 이겼으니 승자가 정당화되는 것은 맞지만, 기밀해제된 자료와 당시 비밀작전 참가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한 학술서적들에서는 양측이 서로 침투작전을 실시했고, 그 시작은 북베트남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른바 한국이 냉전 시기에 북파공작원을 보내 남북 쌍방이 침투공작을 벌인 것의 베트남 판이다.



공세를 펼친건 죄다 북베트남군과 남쪽에서 양산된 게릴라가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식. 게다가 폭격 자체도 북베트남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정치적 고려로 결정된 폭격제한구역의 설정 등으로 흔히 생각하는 무차별 폭격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 단,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폭격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차별 폭격이 아니라고 해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격피해는 분명히 발생하였다.

당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독재적 성향을 한국군 나아가 미군 참전의 부당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문제다.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과 그걸 근거로 전쟁을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간혹 '정당성 없는 전쟁에 파병되었다'라며 파월한국군 장병들을 비난하는 엉뚱한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그러한 책임이 있다면 당시의 행정부와 의회에 귀속되는 것이지 군이 자의적으로 혹은 정상적인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슬러[6] 그 개입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이상은 군에 귀속될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 베트남 전쟁 자체에 대한 침략전쟁 여부는 베트남 전쟁 항목을 참조하자. 무엇보다 한국군 파병은 남 베트남의 정식 파평 요청을 받아서 이뤄졌기 때문에 정당성없는 침략전쟁에 동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7]

참고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5년 8월 26일 공개된 베트남 참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64년 5월 9일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1964년 7월 15일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1964년 7월 31일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년 9월 12일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라고 한다.


[edit]
3.2 용병 논란 당시 정권은 경제적 지원과 파병을 맞바꾸었고 많은 물자를 미군에게 직접적으로 지원받았고, 이는 엄연히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혹은 양심을 팔아먹었다는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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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용병이 맞다고 보는 시각
  • 아무튼 돈을 받고 전쟁을 했으니까 용병이라는 의견이 있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엄연히 파병의 대가로 파병 부대의 장비 현대화와 금전적/경제적 지원을 받은 만큼 용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 놈들 돈 달라고 너무 징징대는데 어떻게 하나여?' 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 파병은 한국 정부가 주도하긴 했지만, 중-근세 무렵에는 스위스나, 근대에도 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 같은 예도 있듯이 국가적인 용병 사업도 드물지 않았으므로 정부가 주도한 파병도 용병 활동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 파병의 규모가 크다. 전쟁을 벌인 당사자인 미군이야 가장 많을 것이 당연하나, 한국군의 병력은 2~3만명이나 되어서 2위를 차지했다. 반면 다른 동맹국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은 겨우 10여명이 될까 말까 한 고문단만 주재했다. 이렇기에 궁지에 몰린 미국이 다른 동맹국에게 다 외면을 당해서 애꿎은 한국을 갈구거나, 또는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하기 위해서 장병들을 팔아먹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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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용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
  •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동맹국으로서 파병했으므로 용병이 아니라는 의견. 파병의 대가로 미국에게 받은 여러 가지 지원은 '어차피 파병을 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라도 얻어내자'의 결과지, 일부러 돈을 받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므로 '용병'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쿠바처럼 여기 저기 손 벌려서 돈 벌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행동한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파병인데다, 20세기 중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투병이 직접 파견되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일부 평화유지군이 있긴 하긴 하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동맹국 지원 중 동맹국간의 경제적 지원을 근거로 용병이라고 부를수는 없다는 의견. 파병을 대신해서 해준 지원은 이런 것의 일환이라고 한다. 한국군이 소비한 상당수의 전투용 물자도 미군이 지원해 주기도 했다. 뭐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대한민국은 그당시 산업이 별로 잘 돌아가질 않았다) 동맹이 굳이 자기 힘 들여서 도와주는 만큼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도 이왕 받을 기회가 생기면 악착같이 받아야 하기도 했다.
  • 과연 '침략 전쟁에 한몫 하면서 돈이나 벌러 간 용병'께서, 그 많은 대민 사업을 굳이 해야 할 필요 따위가 있는가? 라는 주장도 있다. 단순히 싸워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쪽에서 고생해서 굳이 남베트남에 이런 저런 시설을 만들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좀 무식한 소리인게, 대민지원은 실제로는 근대 이후의 전쟁에서 큰 전략적 효과가 있다. 특히 당시 게릴라전을 생각하면 모택동 말대로 게릴라가 민중 사이를 물과 고기마냥 숨어다니는데, 대민지원을 통한 현지 민심을 얻는 행위는 이런 숨은 거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도 중요하다. [8] 분명 윈윈이기는 하나, 이것은 전술,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런것이지 굳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만약 안했어봐라, 사방이 베트콩으로 돌변하지 현재 미군역시 일단 중동등 파병 나간지역에서 대민지원정도는 하고있다. 한국군만 특수한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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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표현의 문제 용병 논란과는 별개로, 용병이라는 단어는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뉘앙스로 분명히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군을 용병으로 묘사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용병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모욕적이지 않다고 주장 하면서도, 또한 그 직후 한국군은 학살이나 강간을 저지른 용병이 분명하다며 용병을 강조하는 주장으로 결론지어 결국 모욕적으로 몰아가기에 진의를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용병 논란을 벌이기에 앞서 세간의 인식과 국제법상 용병의 정의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국제법상 한국군의 파병은 분명히, 적어도 현대적인 용병의 범주에 합치되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굳이 한국군을 용병에 비견해야 한다면,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에 고용되어 파병되었던 헤센군이 가장 유사한 사례가 된다. 이들은 "국가가 돈을 받고 자국의 정규군을 연합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독자적인 부대로서 참전시킨 경우"이기 때문에,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과 비교할 때 유사한 점이 많다. 단지 한국군은 헤센군과 달리 돈 이외에도 많은 것을 고려하여 참전했기 때문에, 헤센군보다도 용병으로서의 색채가 훨씬 옅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헤센군은 스위스 용병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헤센의 영주가 재정수입도 확보하고 영주민들에게 일자리도 마련하려는 차원에서 용병업에 뛰어든 경우이고, 그나마 헤센군을 고용하는 나라는 신교도 국가이거나 아니면 이교도들과 싸우는 기독교 국가여만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때문에 헤센군의 실력이 유명세를 떨치던 17~18세기의 프랑스에서 헤센군을 고용하려고 시도했음에도 신교도 국가와 싸우는 구교도 국가였기 때문에 실패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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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라이따이한 문제 라이따이한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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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국제사회의 이미지 한국군 용병설이나 학살마 론을 펴는 사람들은 베트남 참전으로 인해 제3세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부에서는 양민 학살 문제가 '일제의 피해자인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아시아, 더 나아가선 세계에 인정받기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라이따이한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했다는 증거이며, 한국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의견도 말 한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갔는지 안 갔는지 관심도 없는 제 3세계의 등장과 증거도 자료도 없는 감정적인 여론조장 시도로서, 이는 이런 한국민의 원죄 자극이나 국제사회 이미지 드립이 원조를 담당하는 민간단체들이 지원금을 더 받기위해 벌이는 상투극이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 숫자가 5천에서 3만명까지 최대 6배까지 다른 이유중에는 민간 단체들이 서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라이따이한 숫자를 가지고 지원금을 받으려 하기 때문.

대한민국에서는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에 우리 군인들이 잘싸워서 피해를(?) 줬다는 의식도 있으며 매년 한국의 봉사단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김대중/노무현/이명박(98,01,04,09년) 대통령 때에는 각각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베트남 정부에 사과를 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이전(1992년) "우리가 승전으로 끝난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92년 베트남과 수교당시 과거사는 더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 이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 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미군 철수 및 파리 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서 점령한데다, 당시 대한민국의 이대용 공사같은 사람은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붙잡혀서 몇 년이나 투옥당했다. 거기에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이자 외교관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 여기다가 당시 미군이나 한국군이 포로가 되거나 했을 때 제대로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를 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10]

참고로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국가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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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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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연구성과와 논란 이전까지는 북베트남의 공식문서 정도에서 언급이 있었고[11]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12],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13]으로 남아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기밀해제된 미군의 베트남 전쟁 관련 기밀문서에 한국군의 학살이 나온다 카더라 식의 글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정작 그 기밀 해제 되었다는 문서는 있지도 않은식이다. 대표적인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데, 여기서도 미군과 한국군의 조사보고서 문서를 발견 했다면서 정작 그 발견했다는 문서의 행방은 오리무중인 식.[14]

지금도 언플로 추정되는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십수개에 달하는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해 적혀 있으며 총합 학살 카운트가 무려 수천명 단위에 이른다. 이 문서들을 다 믿기는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단 영문 위키백과등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의 학살 관련 항목과 숫자의 근거가 베트남이나 미국측 자료도 아니고 증오비관광비 따위인 식이다. 이 증오비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되는대로 해당 지역이 베트콩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단 지역이라는 배경을 깔고 봐야한다. 게다가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항목을 수정하고 작성한다는 점에서 저 사람들이 자기 글을 퍼나르는 식으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물며 관련된 증언과 문서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최대한 잔혹하게 살해'나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 배를 가르는'같이 패턴화 된 문장들이 등장하는 구도로, 잔인무도한 귀축 한국군 VS 무고하고 선량한 베트남인들의 희생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듯 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시신이나 학살 현장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도 시신이고 당시 잔해고 아무것도 없이 오직 추모비 뿐이다.

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이 보다 더욱 큰 규모의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만들기 위해 하이애나 마냥 기사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는 거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출신이라는 자료 역시 자료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 입증조차 하지 못한다.

학살, 즉 현장 부대에서의 우발적 사건까지 부정할 수는 없고, 사실 이런 문제로 소대장으로 보이는 한국군 소위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기록도 엄연히 남아있다(최종심이라는 설명이 없어, 확정선고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의 관련성이다.한국군의 경우, 초창기에는 남베트남의 동해안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에 주둔했다가 서서히 북상해서 전쟁 절정기에는 베트남 중동부, 당시 남베트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북쪽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주월 한국군이 동해안 최남단 지역일대에 주둔하던 당시, 그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같은 사고 이야기도 없고 민간인들의 칭송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부대가 북상해 중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면서 민간인 학살 기록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미군들은 그 곳이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 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상을 당해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가 대형 사고를 쳤었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 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골성향이 강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의 경우,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은 베트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증거도 없거니와 그럼 협조해서 부비트랩 같은 거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사 지역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미해병 선무소대가 이 지역, 중부 동해안의 어느 촌락에서 촌락민을 돕고 숙영을 했었는데 다음날 병사 두 명이 실종됐다. 당장 난리가 났고 미군 수사대가 왔지만 촌락민들이 워낙 순종적이라서 그들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실종자는 시간이 흘러 사망자로 처리됐는데... 미군 유해발굴 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나오면서 탐문을 해보니,당시 그 마을은 베트콩 마을 이었고, 실종 병사 두 명은 당시 마을 처자 두 명이 해치워 땅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장소를 안내해 발굴조사후 유해는 안장되었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참가했던 당시 파견됐던 장병들은 자신의 동료를 해치운 마을 처자가 전날까지 매우 친절했던 아가씨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먹었고 돌아가서 그 사실을 언론사에 소개해서 그 것이 기사화된 사건이었다.

그 정도로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 지역은 베트콩이거나 베트콩 협조자인 민간인을 빼면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이것이 파월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들 중에서,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다.

애초에 지역적 성향이나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차원이 다른, 미군들이 괜히 "핑크빌(해방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 곳이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지역이 되겠다.

물론, 학살사고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 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증오비에 씌여있는데로 이들이 전부 북베트남군-베트콩과 연관이 없는 무고한 양민이라는 이야기 역시 신빙성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또 한가지...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함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양민을 대량학살했다.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강창성의 일본/한국 군벌사에서 전두환이 양민학살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람이 전두환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강창성은 전두환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민을 학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갔다라고 했는데, 하급부대에서 사실인즉 거동 수상자를 확인도 안하고 사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살되었다는 민간인은 살아 있었고 해당 지휘관은 고발 조치되어 처벌받았다. 전두환의 예하부대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두환이 시킨건 아니다.

문제는 베트남전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진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에서 배워온것..류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실지로 당대의 외국 서적들에서도 베트남을 연상시키는 광주의 학살이나 베트남에서 악명높은 공수부대를 광주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일종의 연상으로 벌어진 소문이었다. 오해는 하지 말자. 육군 9사단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광주엔 내려가지도 않았다.


많은 참전용사들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그것은 베트공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당시 전쟁에서 공식적인 명령은 백 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살리는 것을 우선하라였기 때문이다. 카더라 라는 주장갖고 당시 한국군을 학살마라고 모는 짓거리는 적당히 해야 한다. 현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 당시 "여자와 어린이, 노인이 함께 싸웠"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이 말대로면 어린이 여자 노인도 결국 선량한 민간인이 아니라 총 든 게릴라였다는 것이다.[15]

노근리 학살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군은 당시 한국인 중 북한군이 섞여있을 가능성을 들어 이미 민간인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외국에서 수행하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민간인임을 알면서도 학살을 자행하기 쉽게 만든다. 요즘 일본과 민간 토론을 진행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를 언급하면 "너희가 베트남에서~"로 많이 대응하고, 이게 기사화된 적도 있다.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은 위에서 나온대로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썩었는지,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던 나라인지, 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월남전에,참전했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을 조목조목 비교해주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16]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식민시기 일본의 만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학살지로 거론된 퐁니마을의 생존자나, 당시 2소대장 이상우의 증언 등 여러가지 말이 나오고는 있다. 하지만 이건 근거 자료 조차 확인하기 힘든 자료다. 그 밖에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민간인 학살 죄건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15년형으로 감축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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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그 밖에 실제 참전군인인 친척의 증언으로 지금 생각하면 학살같은데 그 땐 죄다 빨갱이라 무조건 죽이고 보자는 것도 많았다고 하여 학살로 인식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오랜 전쟁으로 외부인에 대한 증오 및 소수민족과의 갈등으로 우거진 복잡한 문제 와중에 북베트남도 심리전으로 이런 학살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KBS 등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적이 있고, 옛날에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 관련 묘사가 나오자 월남 파병용사들이 소송을 건적이 있다.[17]

또한 1999년 이래 한국의 언론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자칭)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즉 일부 가해자인 베트남 참전군들이 입을 열지 않고 부정만 하는 상황이라, 국내에서도 규명방법이 쉽지 않고 처벌또한 힘든 상황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완전히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모양이고, 채명신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감안한 듯한 언급이 있었다. 사실 상황이 혼란스러웠으므로 기록만 남아있다면 나올 수도 있다.

당시 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리 몇 차례에 걸쳐 삐라를 뿌려 '지정 일자까지 그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으면 베트콩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할 수 있다.'고 밝혔고, 그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삐라를 보고 게릴라들이 잔전 지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비트랩에 의한 사상자가 주 였고 교전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황상 마을에 설치된 부비트랩에 의하여 아군 사상자가 났을 때 작전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을 가능성은 있다.

베트남 학살 사건을 교과서에 싣는 문제를 가지고 교학사 저자와 보수 언론들은 국군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색깔론의 근거로 가고 있다. 참고로 이들은 2009년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 때 노근리 학살사건을 교과서에 수록했다는 이유로 이 교과서가 반미선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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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참고 한국어 위키백과에 등장하는 학살 사례. 당연하지만 위에서 설명한대로 신빙성도 문제가 있고, 셋 다 토론란이 활성화 되지 않은 문서이니 관련된 상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조사하고 판단하는걸 권장한다.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 구수정 특파원에 의해 알려진 학살 + 강간 사건. 물론 구수정의 주장 신뢰도는 위에서 말 한 대로...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

  •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 한국학살이 언급됐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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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로?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잘 안 알려졌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포로 의혹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 전경수 교수가 최초로 베트남 전쟁 박물관의 사진을 토대로 수백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채명신 장군 등 참전 군인들의 노력으로 그 사진 자체는 의문시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 실종자 관련 단체에서 3급 정보로 일부 전사로 처리된 장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북한과 베트남 생존설을 주장해서 PD 수첩을 타기도 했다.

사실 당시 주월사의 기본 방침은 한국군은 너무나 용감해서 포로가 없다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실종자들을 발표한다. 그 중 몇명은 북한에서 생존한걸로 확인되었다. 사실 1973년 파리 협정 당시 북베트남이 억류중인 한국군 유종철 일병을 송환하였는데, 그의 집은 이미 전사 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국방부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유종철 일병 사건후에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현재 파악된 실종자들은 월북한 상태이고 그들은 반역자.'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오, 황군의 향취! 아니, 이건 소련군인가?!

2000년대 베트남에서 포로가 된 후 북한 생존이 확인된 안학수 하사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월북을 부정하고 납북을 인정하게 된다. 당사자는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 탈출하려다 실종되었다고 한다.

PD 수첩에서 실종후 베트남 생존의혹이 제기된 국방부 말에 의하면 반역자 한국군 장교는 90년대말 미국 실종자 협의회의 발굴로 전사 시체가 발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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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요 전투 기록
  • 두코 전투
  • 짜빈동 전투
  • 오작교 작전
  • 안케패스 전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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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인물
  • 채명신 -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수도사단(맹호부대) 사단장.
  • 박정희 - 당시 한국 대통령.
  • 전두환 - 파견된 9사단 백마부대의 29연대장으로 복무[19] 민간인 학살 의혹 있음.
  • 서경석 -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 복무. 이때의 경험을 실감나게 그려낸 전투감각이라는 수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노태우 - 파월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3대대장(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보여단 133기보대대[20])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 황석영 - 소설가. 해병 제2여단 소속으로 참전.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다가 후방으로 전출되어 군 수사대로 복무했다[21]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22]
  • 박영한 - 백마부대 29연대 보도병으로 참전. 머나먼 쏭바강을 집필, 후에 SBS에서 드라마화 됨.[23]
  • 안정효 -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 하얀전쟁 집필, 후에 안성기 주연으로 영화화됨.
  • 장태완 - 수기인 12.12쿠데타와 나에서 베트남전에 참전했을때의 경험이 수록돼있다.
  • 남진 - 당시 파병가서 죽을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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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보통 영미권 국가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항목들은 당사국보다 오히려 영어 항목이 가장 상세한 경우가 많은 위키백과에서 해당 문서들은 일본어버전이 제일 자세하고, 내용도 과장되거나 한국군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것이 많다. 물론 난징 대학살 같은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와는 완전한 정반대 태도. 혐한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정신줄을 놓은 일본 위키백과의 슬픈 현실이다.

-
  • [1] 야당도 이 건은 반대하지 않았다.
  • [2] 다만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만은 첨언해 둔다. 일본이 피해자 연기를 하면서 가장 먼저 들이대는 이유가 바로 이 "그 시대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던지라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논조이다. 이것을 무분별하게 순응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일본의 현실을 보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3] 이라크 전쟁후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도 민사작전으로 유명하다. 대신 미국내 신보수주의자들이나 한국내 신우익들은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고 까지만, 주둔한 지역이 이라크 중앙정부에게 비호의적인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이 지역은 이라크 중앙정부를 편드는 인상만 보여도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곳이다.
  • [4] 참고 :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 [5]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allied/ch06.htm
  • [6] 쿠데타나 막후 정치공작 등
  • [7] 일부에서는 파월 정당성을 무시하고 파월을 일본군의 침략전쟁과 비교하여 깍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들은 '한국의 파월이 정당하다니, 그럼 일본군의 침략전쟁도 정당하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주장은 역사 공부를 눈꼽만큼도 안 했다는 증거로, 애초에 일본군의 침략전쟁은 군부가 정치를 장악하여 정상적인 민주주의 의사 결정을 무시하고 침략전쟁을 벌여 점령지를 수탈 하러 간거고 식인과 학살 행위등을 여러 자료와 증언에서 교체 입증이 가능하나, 한국은 최소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와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형태로 동맹국인 남베트남에서 요청을 받아 파병한 것이며 수 많은 대민지원과 지휘부의 의지로(1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민간인 한 명을 보호하라 같은 명령, 또한 사람 머릿수가 아니라 무기의 숫자로 전과를 인정한 점 등) 적 섬멸이 아닌 남베트남인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선택하였다. 2차 대전시의 일본을 좀 더 설명 하자면 현역 군인인 도조 히데키가 원래 민간조직인 정부의 요직을 겸임하고, 군복입은 군인들이 의회에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던 막장 국가였다. 심지어 당시 일본 정부는 군의 통제권이 없어서 원칙적으로 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여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수준으로, 실제로 대중국전의 시작이 되는 노구교 사건 역시 일선 부대가 멋대로 확전을 시작하여 본격적인 전쟁이 된 사건이다.
  • [8] 극단적으로는 식민 지배도 평등하고 공평하게 할수록 반발이 적다는 것 역시 예를 들수 있다. 괜히 일본이 까이는게 아니다
  • [9] 굳이 용병의 통상적인 정의를 보고 싶으면, 군사관련 항목, 또는 드라마들을 유심히 보자, NCIS경우, 용병 관련 에피소드가 몇개 있는 데 그 경우, 용병들은 대부분 정규직으로 군대에 업무하는 사람들은 아니며, 국가와는 독립된 엄연한 회사이다.
  • [10]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군 포로의 상당수가 안학수 하사의 사례처럼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점만 봐도 북베트남이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11] 월간중앙에서 어느 참전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1주일에 남베트남군 20만 사살, 미군 함정 100척 격침수준이라는게 문제
  • [12] 한국에도 번역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주요 증언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한국전쟁때도 북한을 취재했고 70년대 북한 취재기도 내었는데 이 사람의 저작들은 전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금서였고 서강대학교등의 일부 학교에서는 아직도 대출제한 서적이다. "미국의 조직적인 북침음모"-판문점에서의 사건이나 베트남을 통해 남한에서 의거 귀순해서 북한에서 행복하게 사는 안학수 하사등의 기사를 쓰는 분이니 시각이나 신빙성은 각자 생각해볼 것.
  • [13]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건 아니다. 월남스키부대식의 자기 자랑도 있고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주제이지만 베트남 군사박물관의 한국군 항복 사진을 맹호부대라고 기록한 기자에게 근거를 물으니 맹호부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은 해병대 복장을 하고 있고 조작의 냄새가 짙다.
  • [14] http://sarangbang.or.kr/kr/info/hrinput/hr_content.html?seqnum=1869&page=6&key=publishday between 817657200 and 975510000&order=1
  • [15] 이런식으로 민간인에 대해 의심을 유발한 사례는 한국전쟁때 북한이 이용한 제 2 전선, 즉 남한에 있던 빨치산등의 세력을 이용한 비정규전에도 있다. 민간인 옷 입고있는 사람이 갑자기 총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마을로 들어가는게 정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무서웠다고 증언한다. 정글로 들어갔을때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과 교전을 피하거나 하더라도 피해없이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마을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장병중 한명이 죽는다 할 정도다. 선량해보이는 할머니가 갑자기 해병대를 향해 총을 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여진다는 것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행해지는 비정규전은 정말로 위협적이다.
  • [16] 그러니까 어디 베트콩 마을 가서 한국군이 마을 사람 다 죽였다는 조작된 자료나 있지도 않은 미국극비 자료 따위 말 하지 말고 증거 갖고오라고
  • [17] 사실 이 뮤직비디오는 양민학살보다는 군대 구타를 묘사했다는게 더 문제였다.
  • [18] 가히 한국 해병대에게있어 베트남전 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작전중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에 대해 한국 정부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으며, 참전 용사들이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피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한국 해병대가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버려둔 중대 전술기지가 적에게 넘어가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혀버린 전투로써, 중대 단위로 시작한 작전이 연대단위로 확산되며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작전 자체도 매우 허술했다. 역설적으로 군대들이 지금처럼 극도로 최첨단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중대 전술기지가 얼마나 효과적이었지 다시 입증해준 셈.
  • [19]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특전사의 2대 사령관이 조천성이 사병들은 마실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고 29연대장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까지 존재한다. 이유는 지나치게 과위인사 및 민간인 상대가 잦았으며 그 과정에서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인수인계한 사례가 많음, 전투수행능력 부족,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전쟁을 하러간거냐 놀러간거냐라는 평이 나온 것이다. 직송상관 2명이 모두 반대했지만, 결국은 훈장 받았는데 이게 당시 정부에서 하나회를 키우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 [20] 강재구 소령이 있던 그 부대이다. 재구대대
  • [21] 누나 애인 빽 덕분에 뒤로 전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출되기 이전까지 황석영은 전방에서 근무했으며 전투를 치렀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PTSD를 앓기도 했다.
  • [22] 여기서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남 인민들의 토템을 두고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교전을 벌인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내용이 논픽션인 그린베레에도 실렸다. 다만 이쪽에서는 미군이 전투를 벌이며 토템을 두고 민족전선과 전투를 벌인다는 단편적인 요소만 빼면 별 다른 유사성이 없다.
  • [23] 베트남어로 쏭은 강이라는 단어이다. 쏭바 또는 바강이라 해야 함. 쏭바강은 역전 앞식의 중어 반복.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고찰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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