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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장미ll조회 432l
이 글은 6년 전 (2017/11/23) 게시물이에요
滿洲事變(일본어:만주사변)/九一八事變(중국어:9.18 사변)


 

Contents
1 개요
1.1 "사변"이라는 단어의 모호성
2 배경 3 월경 - 일단 지르고 보자 4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 >5 진행 6 여파 7 관련 항목



 

[edit]
1 개요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류탸오후 사건[1]을 조작해 선전포고도 없이 만주를 불법 침략, 점령한 전쟁. 만주를 점령하고 난 이후 일제는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건국한다.


[edit]
1.1 "사변"이라는 단어의 모호성 흔히 일본의 표현을 그대로 써서 만주사변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사변이라는 단어는 사건을 단순한 "변란"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것으로, 중일전쟁을 지나사변,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는 일본 우익의 못된 버릇과도 연관이 있다. 영어 번역도 일본명을 직역한 "Manchurian Incident"로 침략이라는 의미가 상당부분 희석되어있다.

다만 대체용어가 드물고, 백과사전 등에도 이 용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2] 공정한 용어로 정리하자면 "일본의 만주침략"이나 "만일전쟁"쯤이 되겠다. 사실상 15년 중일전쟁의 시작이다.

중국어 위백에서는 사건이 난 날자에서 따와 "9.18 사변(九一八事變)"이나 선양 사변(瀋陽事變)이라는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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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이 만주사변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사회 전반의 군국주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쟁보상으로 경제를 부흥시켰고[3], 이후 조선식민지로 하면서(경술국치) 경제발전의 기반을 이루었다.

1차대전 때도 떡고물을 노리고 참전했지만, 칭다오 조차에만 그쳐 생각보다 소득은 없었다. 중국 시장을 노리고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조약을 들이밀다가 중국 민중의 반발로 포기했고 군부와 재벌의 불만이 쌓여가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세계 대공황까지 닥치자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극우정치권과 재벌 사이에선 위기탈출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를 감지한 관동군 장교들이 총대를 메고 선빵을 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장쭤린은 미츠야 협정을 맺는 등 가장 일제에게 협조적인 군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장쭤린을 1928년 펑텐 (열차 폭발) 사건로 죽이고 장쉐량과 철천지 원수가 될 정도로 일제는 만주가 탐이 났던 것. 장쉐량은 이후로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와 손을 잡았고, 이것이 만주 침략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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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경 - 일단 지르고 보자 침략 과정도 가관이었다. 히로히토 덴노와 일본 정부가 모두 반대한 상태에서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칸지' 중령을 선두로 한 일부 강경장교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이기 때문(…). 관동군이 그런 짓을 저지르려 해 육군 대신이 육군본부 작전부장을 보내 저지하려 하자 관동군 강경파가 한 짓은 폭탄을 철로에 설치하면서 작전 부장에게 술을 먹여 재웠다(…).

물론 강경파도 국가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라 고민을 했고, 전날에 젓가락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포기, 왼쪽으로 기울면 실행으로 점을 쳤는데, 젓가락이 오른쪽으로 기울었음에도 "사내대장부가 한번 마음 먹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라는 이유로 행동 개시. 이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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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 >더욱더 황당한 일은 조선 주둔 혼성 제39여단의 행동을 본 일본 정부의 반응.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4]가 명령도 없이 월경을 했고 (물론 이건 당시 군형법으로도 사형감이다!), 그걸 당연히 막던 일본 정부가 그것을 알자 반응은 "씁 어쩔 수 없지" > 진짜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와카츠키 레이지로 수상: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히로히토: "이번 일은 너무 괘씸한 일이긴 하지만 각료가 일치해서 정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는 전쟁 확대에 반대하니 되도록 전쟁을 빨리 끝내도록 하라"링크

그러나 이상의 사정만으로 당시 일본 내각과 덴노에게 중국 침략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당시 관동군의 월권행위는 명백히 사후 승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오히려 덴노와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부, 특히 육군 과격파에게 침략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아래에 언급된대로, 만주 점령 이후 일본은 일관되게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 했으며, 만주 침략에 있어서 관동군의 독단은 그 시기와 방법에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원칙적으로는 일본은 입헌군주국이었고 천황이 내정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물론 실질적 영향력은 강대했지만, 앞서서 만주사변 직전에 벌어진 장작림 폭사 사건의 뒷처리에서 천황이 내각을 해산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고 그 여파가 만만치 않았던 것도 컸다.

장작림 폭사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쇼와 덴노에게 처벌을 상주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 둘 수 밖에 없다."라고 말을 돌렸다. 쇼와는 이에 역정을 냈고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달만에 다나카 내각은 총사직한다. 뒤이어 그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이렇게 내각이 여러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 하려했던 것.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책임추궁도 흐지브지하게 끝났다.

한편 관동군의 만주사변에 강하게 반발한 일본 내각은 후에 군부가 (자신을 반대하는) 내각 주요인물을 암살하려한 5.15 사태를 격게 된다.


[edit]
5 진행 아무튼간에 이렇게 무단으로 만주를 침략한 관동군은 5일 만에 랴오둥(요동=요녕성), 지린성(길림성)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하게 하였고, 10월엔 만주 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치치하얼(제제합이)을 점령하였으며, 동북3성 전역을 장악하고 1932년 1월 장쉐량의 거점인 진저우를 점령하였으며 2월에는 하얼빈을 점령하여 만주 북쪽 주요 도시를 거의 점령한 뒤에, 3월 9일 푸이를 집정에 취임시킴으로써 만주국을 만들었다.

물론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요하)성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기왕 이렇게 된거 그냥 탈퇴하죠. 안되겠소 탈퇴합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서 정치권은 군부를 통제하기 힘들어졌고, 군내부에선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사후승인을 강요하면 된다'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결국 군부주도의 극우정치체제 수립을 요구하는 5.15 사건(1932년), 2.26 사건(1936년)으로 이어지면서 사실상 정당정치는 붕괴하고 현역군인이 수상에 취임하는 시대가 열린다. 그 결과는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의 15년 전쟁과 패전, 그리고 핵 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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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파 무엇보다, 만주 사변으로 중국 국민당 군에게 도망친 장쉐랑은 훗날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게 모두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려는 복선이랄까. 중일전쟁으로 장제스는 인심을 잃었고, 시안 사건으로 공산당을 잠시 살려두었으며, 만주도 일본 치하에서 공업화되어 이후 2차 국공내전 때 공산당 승리의 근거지가 되었다.

중국사에 남을 치욕적인 날이다보니 이날이면 중국에서 반일 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2012년 9월 18일을 전후한 반일시위는 센카쿠 열도 문제와 국내의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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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항목
  • 만주국
  • 중일전쟁
  • 8월의 폭풍 작전 - 일본의 만주 침략의 끝.



-
  • [1] 남만주 폭파 사건이라고 불린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일본군이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의 아들인 장쉐량(張學良, 장학량) 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군사행동을 개시했기 때문.
  • [2] 그외 사변이란 표현은 널리 쓰이는 명칭의 경우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년의 변), 상하이 사변[중국명: 1.28 사변 -1차-, 쑹후(淞沪, 송호) 회전 -2차-]이 있고, 한국전쟁을 6.25 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3] 2억냥 + 삼국간섭 후 랴오둥반도 반환의 대가로 3천만냥으로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였다.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떡밥을 기대했지만 정작 자금이 바닥난 건 일본이라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 획득은 없었고 결국 히비야 폭동이 일어났다.
  • [4] 후일 "월경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고찰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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