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조선 군제사를 다루다보면 이러한 주장을 많이 펴시는 분들을 많이 보고는 합니다. 조선군의 기질을 매우 나약하고 옹졸하여 전선에서 탈주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여러 사료나 기록들을 접하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한다면 말이죠. 과연 이들의 기질이 나약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고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조선과 명, 그리고 청이 평가한 조선군 장병들의 평가는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웠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명군과 함께 싸웠던 조선군이나, 조선인 출신 명군, 그리고 가도 정벌전과 금주 전투에서 조선군은 상당히 위세를 떨치며 싸웠습니다.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와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이러한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당시 참전했던 명군은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으며 이 중에서 유정이 가장 쓸만하다고 평가한 이들은 바로 묘족이었다고 합니다. 묘족 출신 병사들이 기가 워낙에 세서 상당히 잘싸웠다고 하는데 이러한 묘족들도 일본군과 백병전에 들어가면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공세에 지레 기가 꺾였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조선군 병사들은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싸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호사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순천 전투에서 가장 전과가 컸던 것은 조선인 출신 명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질이 나약하다고는 보기 어려웠다고 보여집니다. 조선군 병사들을 제대로만 훈련시키고 적절한 지휘관만 제대로 자리 잡는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뭐 당연하게도 포상이 걸렸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명군은 다국적 인종의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기 위해서 많은 포상을 걸었습니다. 참수급제가 강화되면서 조선군 장병들도 뭐 눈에 불을 켜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적을 얼마나 사살하느냐에 따라서 포상이 두둑해지니까요.
이러한 성향은 이후 병자호란이나 명청 교체기에도 모습을 드러내는데 명과 청은 서로 조선군 조총병대의 파견을 요구했고, 전투의 최전선에 세워 운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선에 나서면 의외로 군율을 엄중하게 지키면서 도망을 잘 안쳤다고 하니까요. 광해군 일기의 기록들을 보면 명군이 전열이 흩어져 무질서하게 퇴각할 때도, 혹은 승전하여 적의 수급을 확보하는데 정신이 없을 때도 조선군은 묵묵하게 군율을 지키며 위치를 사수했다고 하는 기록이 여럿 보입니다.
즉 위기 상황에서도 잘 흩어지지 않고 지휘관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저항하는 조선군 조총병대의 위력은 상당했으며 부차 전투에서도 후금군에게 꽤 타격을 준 것 역시 이들 조총병대였습니다.
특히 가도의 모문룡 잔당들을 소탕할 때, 청군은 조선이 파견한 5,000여 명의 지원병력이 보여준 전력에 감탄했으며 실제로 조선 육군과 수군은 청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명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잡힌 조선군 포로 1,600명을 다시 징발하여 조총병대로 따로 운용까지 할 정도였죠.
청 태종은 조선군 조총병대가 병자호란과 가도 정벌에서 보여준 위력을 인정했으며 조선에게 공식적으로 파병 요구를 합니다. 특히 용골대는 조선군 최정예인 어영청과 훈련도감 소속 병력을 요구하죠.
이전부터 인조는 용골대가 어영청-훈련도감 군의 훈련을 목격했고, 이들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며 우려했었습니다. 이는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조선 측은 여러 번 정예부대인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군대가 빠지면 조선의 국방력이 위험해진다며 언급했으나 결국은 이들이 파견되기로 합니다.
총 7차례에 걸쳐 파병이 이루어졌으며, 1진부터 7진까지 계속해서 병력이 교체된 것이 눈에 띕니다. 1차 파병은 김화 전투에서 청군에게 대승을 거둔 유림이 지휘했으며 1,000명의 어영청 병력과 500명의 화병이 파견됩니다.
당초 이들은 2진이 왔을 때 교체되었어야 했으나 당시 명군이 10만 대군을 몰고와 청군에게 큰 위협을 주고 있었거니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같이 종군하는 바람에 조선군 3,000명이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각 조선군 부대는 청의 각 왕들에게 분산 배속되었으며 대부분 선봉에서 명군의 전열을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청의 지휘관들과 왕들은 조선군의 실력을 칭찬했고, 여러 전투에 지속적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파병 제1진인 유림의 부대는 거의 반년이 넘어서야 귀국을 허락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7년에 걸친 조선군의 파병은 청군과 명군에게 큰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특히 금주 전투에서는 청군과 명군이 서로 큰 타격을 입었고, 조선군 역시 타격을 받은 바람에 교체될 부대가 잔류하여 급속 재편 후 다시 전장에 투입되는 등의 수고도 겪었습니다.
당시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군 조총병대에 큰 타격을 입은지라, 상당히 약이 올랐는지 청군 수급보다 조선군 수급에 더 많은 상금을 걸었으며 청군 지휘관들 역시 조선군은 최정예부대이며 한인으로 구성된 병력은 물론, 만주족 부대보다도 훨씬 낫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으니까요.
생각 외로 조선군의 기질은 거칠었다는 표현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실전 사례를 보면 그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보입니다. 실전에서도 지휘관이 굳게 버티고 있으면 퇴각하지 않고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전열을 고수했으니. 독하다면 제일 독하다는 기질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뭐 명청교체기 당시 파견군은 조선 내에서 정예인 어영청과 훈련도감군이니 그럴 수도 있긴 하다만, 양 란에서 조선군이 의외로 단단하게 버텨주는 모습도 엿볼 수 있는지라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각글들을 여기저기서 모으다보니 글이 너무 짧게 나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언제 한 번 날 잡고 써봐야겠네요.
청성잡기
성호사설
17세기 전반 朝鮮의 砲手 養成과 運用, 張禎洙
17세기 전반 대청 긴장고조와 평안도 방비, 권내현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과연 조선군 병사들의 기질은 나약했는가.|작성자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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