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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형ll조회 1129l 3
이 글은 5년 전 (2018/8/30) 게시물이에요

https://namu.wiki/w/%EB%AF%B8%EC%95%BC%EB%AA%A8%ED%86%A0%20%EB%AC%B4%EC%82%AC%EC%8B%9C#s-5

5. 허구성[편집]
5.1. 개요[편집]

무사시의 불분명한 행적과 석연치 않은 주변 상황 때문에 소설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된 검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일본에서 안티도 꽤 많은 편. 


5.2.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편집]

이런 근거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데, 우선 무사시는 이미지에 걸맞는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일설로는, 50대가 되었을때 호소카와 집안의 쿠마모토 번에서 석고로 따졌을 경우 50석 정도의 부지미(扶持米 / 봉록) 등을 받는 객장=손님[4]이 된 게 전부라고 한다.[5]

특히나 저건 신빙성이 없는 수준의 사료 = 미야모토 무사시 측의 사료인 니텐기의 말을 완벽하게 신용하고, 석고로 변환했을 때 50석이라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300석을 받았다고 오역하면서 오노 타다아키는 600석이었으니까 별 차이 안 나네! 하고 묘사하는 일부의 사람도 있으나 이건 번역할때 고쿠로서의 石과 세키로서의 石의 차이를 잘 몰라서 번역 오류를 범한 것. 일단 니텐기의 원문은 扶持(후치)18석 + 고료쿠마이 = 구휼미 300석으로 둘 다 세키인 반면. 야규 무네노리나 오노 타다아키 등의 1만 2천 500석 등의 석은 석고, 고쿠로서의 석이다. 즉 타다아키 등이 받은 600석은 일년간 성인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 600명 분을 생산하는 토지 + 토지에 속한 농민 + 토지에 속한 기타 잉여 생산물의 봉토 = 봉건 시대에 부하에게 내려준 영지개념이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건 걍 쌀만 318석=(石)세키 개념이다. 세키와 고쿠 모두 동일하게 50石이라고 치면, 당연히도 고쿠로써의 50석이 몇 배로 훨씬 큰 개념이다. 

그런데 이걸 구태여 석고로 전환해서 50석 정도라고 원문과 다르게 전환하여 부르는 이유는, 일단 저렇게 318석 받았다니까 석고로 318석이구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 현대에서 우리가 모든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은 다 석고로서 영지를 따지지 저렇게 석=섬으로 받은 사람은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해서 변경한 것이다.[6] 즉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연봉 몇 천 얘기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급 몇 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안 되는 수준이니, 이해를 돕기 위해 전환해 줘서 50석 정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소결을 내자면 일단 318석 받았다는건 번역 오류고 석고로는 50석 정도이다.

또한 50석 정도라고 해도 사실 엄청나게 좋게 쳐준 거라고 할 수 있는게, 석고는 영지 개념으로 그 안에 살고 있는 농민들을 포함 + 모든 연어나 수달,소금 등 모든 기타 생산물도 다 영주 것이다. 즉 600석이라면 일단 600석은 확보가 된거고 +알파의 수입들이 있는 영지도 많다는 것. 예를들어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나, 같은 검호인 야규 토시요시같은 경우에도 가토 기요마사에게서 받은 영지 500석은 실질 3000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듯이.. 또한 영지와 쌀로 급료를 받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봉건제도의 개념상 당연한 거지만 영지는 세습된다! 즉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 게 50석 규모라고 해봐야 쌀이야 걍 팔거나 한번 먹으면 땡이지만 50석의 영지는 다이묘에게 여러 이유로 몰수당하지만 않는다면계속해서 세습되서 자손 대대로 늘려나갈 수도 있다.

심지어 석고로 50석쯤 받았다고 좋게 쳐줘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다. 다른 유명한 검호들의 경우, 야규 무네노리는 1만 2500석을 받았고, 사이토 카츠히데는 덴노로부터 종 5위하 판관직[7]을 받았다. 쇼군에게서 직접 이름 한자를 수여받은 마츠모토 마사노부나 갈아탈 말만 3마리에 수행원 80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행차를 마치 다이묘처럼 하고 다녔다는 츠카하라 보쿠텐,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직접 천하 제일이라는 칭호와 함께 일왕에게는 이세노카미(伊勢守)까지 받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등 엄청난 대우를 받은 검객이 결코 드물지 않다. 

혹자는 이를 특별한 사례라며 야규 가문이 처음에는 200석[8], 같은 쇼군가의 사범 오노 타다아키는 800석[9]에서 끝이었고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東郷重位)도 400석을 받았다며 반론을 펴기도 한다. 다만 오노 타다아키의 경우 도쿠가와 가문이 좀 짠돌이 기질이 있어 녹봉을 후하게 주지 않은 탓도 있고, 성격이 깐깐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터라 기피 대상으로 악명 높았다. 쇼군이 검술에 관해 입스타를 시전하자 면전에서 '다다미에서 수영하는 꼴'이라고 돌직구를 날린 인물이었고, 한 도장이 요란하게 실전 드립을 치며 선전을 해대자 몸소 쳐들어가서 때려눕힌 일로 징계까지 먹었다. 심지어 군령 위반, 목도로 상대방의 통을 찍은 일, 오사카의 진에서 동맹군의 무장을 팔바보으로 만든 일로 폐문 처분만 총 3번을 당했던 걸물이다.[10] 쇼군가의 사범이 800석 밖에 못 받은 게 정상이 아니라, 밉상인데도 실력이 워낙 출중하니 800석이라도 줘 가면서 붙잡았다는 편이 옳다. 한편 무사시와 동시대 인물인 도요토미의 검술 사범인 스스키타 하야토는 3천석이었다.

토고 시게카타는 전국시대사를 안다면 여기서 절대 나와서는 안될 예인데, 일단 시마즈 타다츠네가 검술 사범으로 등용하며 1천석을 내려줬는데 시마즈 가문의 상황이 안 좋다며 자의로 600석을 반환해서 400석이 되었다. 무엇보다 사실 이 때 자기 덕분에 동생도 함께 등용되서 동생도 꽁으로400석을 받았던데다가 이후 토고 시게카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시게카타(東郷重方)대가 되면[11] 봉록으로 무려 2만 4천석을 받는다.

어쨌든 일단 대 다이묘의 검술사범이라면 녹봉 1천석은 최소한 깔아두던 상황에서, 무사시는 본인의 수많은 변명 등을 감안하더라도 녹봉이 단 50석 정도 뿐이다. 검술 사범이 아니라 아시가루 대장 정도의 대우라고 쳐도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며, 그것도 자신이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몰라줘서 셀프로 구상서(자기 소개장)를 내고 들어가서 50대에나 받은 이 녹봉에 본인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납득했다는 것.

위키러 중에는 위에 든 검객들은 거의, 혹은 하나도 모르지만 무사시만 알고 검색해서 이 글을 보게 된 사람도 많을텐데, 그 정도로 유명한 검객이었다면 당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모셨을 것이다. 무사시는 현재 명성으로는 양대 검성인 보쿠덴과 노부츠나, 그리고 동시대 가장 유명했던 검객인 야규 무네노리를 찍어 누르는데 막상 받은 봉록은 아시가루 지휘관 수준이며, 심지어 이것도 객장 취급이지 정식 벼슬도 아니었다.[12]

물론 이에 대해 무사시가 예의가 없어서 등용이 안 됐다는 변명 혹은 무사시의 행적이 좀 밝혀지기 이전에는 평민 출신이라 벼슬을 못 살았음 등등 실드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사시는 오륜서등의 저작들만 봐도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갖췄던 인물이고, 글도 잘 썼던데다가, 상위 신분인 승려들 등과의 교류도 있었고,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이던 이오리를 양자로 들인 걸로 보아 무사 출신이 99% 확실하다. 무엇보다 오노 타다아키는 생전 폐문 처분만 3번을 당했는데 매번 불사조처럼 복귀했고, 교양은 있지만 예의는 없음의 대명사인 가부키모노 마에다 케이지조차 여러 곳에서 사관 제의를 받고 벼슬을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13]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남는 사실은 무사시가 50석짜리 녹봉 수준의 인물이란 것 뿐인데, 이에 대하여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걍 아님 말고식의 변명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나 벼슬과 녹봉 액수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녹봉을 얼마나 받았냐 하는 정확한 액수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정 녹봉 이상을 받고 무사 대우를 받았느냐 아님 못 받았느냐의 상징적인 문제다. 녹봉 자체가 실력을 그대로 반영하는게 아니다보니 3천 석의 검호였던 스스키타 하야토가 800석의 오노 타다아키보다 4배를 더 받았으니 4배로 셌다는건 절대 아니지만. 무사 대우조차 못받은 잡검호들에 비하자면 검술 실력만으로 무사 대우를 받은 이 둘은 확실하게 당대의 명성이나 실력면에서 차원이 다른 검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소결을 내자면 녹봉에 일종의 커트라인이 있었다고도 볼 수있고, 적어도 이름을 날린 무사면 500석~1,000석 정도는 깔고 들어가는걸 알 수 있다. 

또한 당대 검호들이 진검 승부를 벌이는 이유도 생각해봐야하는데. 사실 진검 승부라는건 만화책과 달리 죽거나/혹은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이기거나의 둘 중 하나뿐으로. 전쟁에 비해서 방어 무구도 부실한데다 상대도 어지간히 실력이 있기에 진검승부를 받아들였을 테니, 어찌보면 전쟁보다 훨씬 더 위험 부담이 높을 수 있는, 과거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가 싸우던 것처럼 엄청난 위험 부담이 딸린 일이다. 당대의 검호들이 이러한 큰 위험 부담을 지닌 진검대결을 하는 이유는 검호들이 목숨이 9개고 사람 베는 것을 즐기는 정신병자라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번 승리할 경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14] 즉 당대 검호들의 대결은 현대의 UFC 이상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의 목숨이 걸린, 신분 높고 부유한 무사들만이 즐길 수 있는 엄청난 엔터테인먼트였던것.

그렇기에 보통 진검승부를 5번만 이겨도 해당 고쿠/번의 최고 검호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고, 반대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검호라도 일단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면 진검 승부를 할 일이 생겨도 자신의 수제자를 대신 내보내거나, 자신의 아들을 보내거나, 혹은 승부를 회피 하는 일까지 있었다. 예컨대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도장에 쳐들어온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자신의 수제자를 먼저 내보냈다가 -> 수제자가 패배하고, 이어 자신의 아들인 야규 미츠요시, 즉 야규 쥬베에게 오노 타다아키와 승부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야규 쥬베가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실력 부족을 인정하고 그대로 버로우해버렸다는 일화가 있는 바람에 현대에도 야규는 정치가 가문이지 사실은 오노 타다아키와 일도류가 당대 최강이었다.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15]

그렇기 때문에 평생 60번의 진검승부를 하고 모두 이겼다면서 대우는 50대에 간신히 봉록 50석이라는 건 정말 절대로 말이 안되는 수준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전국시대에서 상식적으로도 무술로 다른 검호들을 모두 압도하는 이러한 괴물같은 활약을 보였다면 당연히 수많은 대전료와 함께 무사들로부터 '제발 저를 가르쳐주시고, 저희 가문의 검술 사범이 되어주세요.' 하는 러브콜들을 받아야만 하고 이름난 제자만 해도 최소 몇 명은 되어야 한다. `한 가문의 검술 사범으로 종속되는게 싫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당대의 검술 사범들은 유랑이 기본 일상이다 보니, 붙어서 계속 가르치는 검술 사범도 있지만 걍 붙어서 딱 한 주 가르치고 그대로 떠나는 경우도 많았기에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설령 이러한 러브콜들을 모두 거절했다고 쳐도 진검 승부 60회라면 최소한 무사들의 가문 기록에 `오늘 이름난 검호인 무사시의 승부를 보러 갔는데 대단했다.' 같은 행적의 기록들이 직, 간접적으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후대의 니텐이치류 사범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들을 제외하고 당대의 인물들이 남긴 기록이 아예 없다시피하여 무사시의 대부분의 행적이 걍 미스테리다.

결국 60회의 진검승부 모두가 양민 학살이었거나, 혹은 무사시 본인과 진검승부 상대방 60명들 전부가 부와 명예에는 관심 없는 특이한 애들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승부를 벌였거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지라 그 진검 승부들이 과연 진짜 벌어지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사시의 진검승부 횟수 60회는 2위인 이토 잇토사이의 2배[16], 다른 일반적인 검호들에 비하면 독보적일 정도로 높은 횟수인데 그에 대한 근거라고는 자신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오륜서밖에 없고, 상대한 유명 검객도 하나도 없으니 더더욱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등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미화물에서는 무사시를 무슨 구도자로 묘사하며 무사시가 출세에 관심이 없어서 이런 제의를 반려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무사시의 심정을 소설가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도 문제이고, 무엇보다 50대에 이르러 자기 소개서를 들고 호소카와 집안에 찾아가 벼슬을 청한 역사적 사실만 봐도 간단히 반박되는 사실.


5.3. 평생 감장도 한 개도 받지 못했다[편집]

특히나 1932년 현재까지도 출판 중인 일본의 문학 잡지인 문예춘추에서 벌어진 나오키 산주고[17]와 키쿠치 간(菊池寬)[18]의 무사시에 관한 토론에서, 나오키 산주고는 무사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천하제일이었다면 벼슬을 살지 않았다는게 말이 안 되고, 벼슬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대체 왜 오사카 성 전투 등 전쟁에는 왜 6번씩이나 참전했는지가 모순이라고 비판하였다. 낭인신분이 전쟁에 참여하는것은 활약을 보여서 사관하기 위한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오키는 50대에 이르러 호소카와 가문에 벼슬을 살 때 호소카와 가문에 제출했던 구상서를 가지고도 비판하고 있는데, 일단 일본 제일의 검객이라더니 정작 호소카와 가문은 알아주지 못해서 구상서=자기 소개서를 내고서 간신히 벼슬을 청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구상서를 낼 때 걍 자기 입으로 6번의 전장에서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고 말만 할 뿐이지 감장[19]이 전혀 없었다. 즉 일본 최강의 검호라는 자가 6번의 전투에 참가해서 한 개의 감장도 못 받아서 내세울 증명이라곤 하나도 없이 자기 입으로 전장에 나가서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 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며, 앞서 달렸다고 하는데, 낭인 부대는 어차피 죽든 살든 상관없고, 가문 소속 무장들보다 활약을 해야되기 때문에 앞에 나서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감장을 못받았다는 것은 그 경쟁에서도 뒤쳐졌다는 것. 결국 당대 최고의 검호라는 자가 요즘 말로 따지자면 자기소개서를 내고서 호소카와 가문에서 석고로 따질 경우 50석 정도만을 받는 취급에 그쳤고, 이에 자타가 만족했다는 것.


5.4. 다른 유명 검호와의 대전을 한 적이 없음[편집]

또한 관서 지방에만 틀어박혀서 당시 검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동의 유명한 검객들과는 검을 겨루지 않았다는 부분도 큰 흠이며,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술을 좋아하고 진흥하여 당대의 무예가들이 몰려들었던 에도에는 외곽의 유곽만 방문하고 돌아간 것도 방문하지 않은 것도 큰 흠이다. 특히 관동 제일의 검호이자 막부의 검술 사범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구 네임드 검객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대표로 한 야규 신카게류 계열의 검호와도 겨루지 않았고, 야규 신카게류와 함께 당대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막부의 검술 사범이었던 오노 타다아키를 대표로 한 일도류와도 한번도 겨루지 않았다. 사실 관동 이외 지역의 유명 검객들과도 검을 겨룬 적이 없다. 규슈의 카게류 계열 타이사 류의 마루메 나가요시라던가, 야규 무네아키,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 중조류의 토다 시게마사, 심지어 호소카와 가문에서 객장으로 살 때는 마츠야마 몬도를 상대로 승부를 피해 도망치기 까지 했다.... 1915년 일본검도사를 저술한 야마다 지로키치 역시, 당대 에도에는 최고의 유파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무사시는 요시와라에서 노느라 이를 피해 방문하지 않았으니 대단히 이상하다며, 대략 수업을 위해 각 지역을 배회하는 자가 그 땅의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것은, 이치상 자신을 안다고 하는 계량이 부족한 것이다. 니텐이치류가 어느 정도까지로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천하의 병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라며 비판하였다.


5.5.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기록이 매우 의심스러움[편집]

그나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긴겼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유명한 검호래봐야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뿐이며, 오륜서에서도 이를 간접적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문제는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에서 무사시가 승리했다는 근거들도 매우 부실하다는것. 

일단 미야모토 측 기록, 즉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가 남긴 코쿠라비문에는 무사시가 당주인 요시오카 세이쥬로를 죽이고, 제자들을 모두 죽여서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라고 되어있고, 후대의 소설 및 영화, 베가본드같은 창작물에서는 이 설을 취하고 있으나 스루가공방전, 혼쵸부게이쇼덴[20]이라는 신빙성이 높은 사료들에 의하면 요시오카 가문과 병법소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도 영업 중이었으며, 무려 1614년까지도 영업하다가 1614년 궁중에서 일반에 개방된 사루가쿠를 보다가 경호원들과 언쟁이 붙어서[21]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요시오카 가문은 무술 도장을 닫을 것! 이라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그 동생이 도요토미 편을 들어서 개인적으로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 후에는 제자 중 염색에 뛰어난 자가 있어 일문이 염색업으로 전직,직종을 전환하여 염색업으로 교토에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으며. 심지어 지금까지도 요시오카의 후손들이 염색 장인으로서 일본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22] 

즉 일단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되었다는 말은 아예 미야모토 이오리의 날조라는 것.
탄지 미네히라 등의 기록, 즉 미야모토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니텐이치류 사범들의 기록들, 즉 무사시 전기&무공전 등에 의하면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쥬로를 죽였다. 혹은 중상을 입혀 승리하였다. 고 하는데 문제는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동생도 죽지도 않았다.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는 말도 있고, 이후에는 염색업으로 전직, 심지어 염색업으로 전직한 후에는 켄보조메라는 흑갈색의 염색 = 즉 요시오카 세이쥬로의 별칭인 켄보(憲法)조메(染=염료)를 발명한다.[23] 즉 요시오카 당주들이 죽고 가문이 망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이와 반대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도망쳐서 결투에 나오지도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중립 서술인 고로다화와 혼쵸부 게이쇼덴의 기록에 따르면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승부는 무승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아마 대등한 시합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에서 손님으로 머물 때 "대체 누가 이겼냐?"는 질문에 무사시가 자기가 이겼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심지어 무사시의 오륜서에도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이 없다! 그저 오륜서에 의하면 21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헤이호카 = 병법가(兵法家)와 싸워 이겼다. 라는 말만 있고, 교토 = 천하의 헤이호카라는 걸 보니까 요시오카 일문을 뜻하는 거구나. 하고 대충 끼워맞춘 게 현재의 해석이며, 즉 당대에도 이미 승패에 관한 논란이 많아서 사람들이 무사시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고, 심지어 무사시 본인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조차도 교토의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을 당당하게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는것. 이 정도로 당당하지 못한 걸 보면 무사시가 승리자라기보다는 패배자가 정신승리를 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어쨌든 현재에도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건 분명하나, 어찌되었든 각종 창작물에서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미야모토 무사시 혼자서 요시오카의 당주들을 죽이고, 수제자 수 명을 쓰러트린 후, 복수하러 온 제자들까지 혼자서 학살한 후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

또한 설령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쥬로를 상대로 완승을 했고, 그 덕분에 요시오카 세이쥬로가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을 입었으며, 그래서 염색업으로 전직한 것이라고 무사시에게 최대한 우호적인 해석을 한다고 쳐도. 과연 그 요시오카 가문이 소설이나 창작물에서 이야기 하듯이 전국구급의 잘나가던 가문이냐? 도 두 번째 문제인데. 일단 교토 요시오카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요시오카 세이쥬로의 증조 할아버지, 요시오카의 1대 당주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로 당시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섬겨서 벼슬을 살고 그 덕분에 교토를 근거지로 삼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의 쇼군인 만큼 상당히 안습한 권력을 가진 쇼군이긴 하였고, 또한 당대에는 츠카하라 보쿠텐, 아이스 히사타다, 마츠모토 마사노부 등의 초일류 검호들의 이름이 왜구를 통해 명나라까지 퍼지던 시대긴 하였으나. 어쨌든 검호로서 일단 정식으로 쇼군 밑에서 봉록을 받고 벼슬을 살았으며, 그 덕택에 가문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요시오카 나오모토는 앞서 말했듯이 검증된 일류에 가까운 전국구급 검호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 2대 당주 = 세이쥬로의 할아버지인 요시오카 나오미츠는 벼슬을 살지 못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교토에 검술 도장을 차려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나오모토의 손자 = 3대 당주 = 세이쥬로의 아버지인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요시오카 세이쥬로 역시 마찬가지. 만약 이들이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겸하고 있었다면 증조부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나 진짜 당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었던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텐, 야규 무네노리, 오노 타다아키처럼 벼슬을 살았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만봐도 그냥 끽해야 조상이 벼슬까지 살 정도로 좀 잘나갔었고, 교토에서 도장을 하고 있었으니 강하지 않았겠냐 정도의 평범한 수준의 인물들이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쇼군가의 공식 검술 사범 급인 것처럼 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던 미야모토 이오리의 무사시 사후 9년 후에 건축된 송덕비인 코쿠라비문 때문. 이 비문에서 미야모토 이오리가 쓰기를, 미야모토 무사시의 아버지는 신멘 무니[24]인데 요시오카는 대대로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맡은 가문으로 일본 제일의 무술가[25]라고 불렸는데, 누가 일본 최고인지 알고 싶었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무려 신멘 무니를 몸소 초빙하여 당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공식 검술 사범이던[26]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승부를 시켜 3번의 시합에서 신멘 무니가 2승을 거두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신멘 무니에게 천하 무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27] 부친들의 이러한 일도 있어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요시오카 세이쥬로는 싸울 수 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된 것. 이라며, 요약하자면 요시오카는 천하 제일이었는데 내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그 천하제일을 대를 이어 멸문시켰으니까 진짜 천하제일임 이라는 무협지 뺨치는 내용을 날조했기에 요시오카 가문이 각종 창작물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공식 검술 사범이자 전국구급인 듯이 그려지는 것. 그나마 일본제일이라던 코쿠라비문에 비하면, 이후 창작물에서는 사실성을 위해 오히려 좀 과장을 줄인 셈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요시오카 일문은 그리 대단한 검호들이 아니었고, 멸문되었다는 무사시 측의 기록은 완전히 거짓으로 요시오카 가문은 무사시와의 승부 이후에 오히려 업종을 바꿔 융성하였으며, 승부 역시 누가 이겼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1932년의 나오키 산주고도 무사시에 관하여 요시오카 측과의 승부에 관하여 확실한 기록이 없고, 유명한 검호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 무사시의 언동에는 검의 강함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비판하고 있다.


5.6. 사사키 코지로 관련 왜곡 문제[편집]

무사시 필생의 라이벌로 각인된 사사키 코지로 역시 정작 무사시의 저서 오륜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의 코쿠라비문에서 '간류'로 등장하는 것이 처음이며, '사사키 코지로'라는 성명이 등장하는 것은 무사시 사후 130년 후에 쓰여진 이천기가 처음이다. 또한 실제의 사사키 코지로는 토다 세이겐이나 카네마키 지사이 등 스승들의 나이로 대략 추정하였을 때 무사시와 대결 당시 나이가 적지 않은 검호로 보이나, 이렇게 된다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벼슬을 살지 못한 잡검호가 되기에 무공전과 이천기 등 에서는 사사키 코지로가 무사시와의 대결 당시 18살이었던 천재 소년 검객으로 그려지며, 요시카와 에이지 작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에서는 심지어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각 가문들의 스카웃의 표적이 되어 이미 벼슬을 살기 직전이었고, 무사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 호소카와 가문에서 벼슬을 살게되는 것이었는데 무사시가 코지로에게 승리해서 그를 바탕으로 나중에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인정해줘서 봉록을 받음'이라고 사실을 마음껏 왜곡하여 등장시킨다. 후대에 무사시를 띄워줄 요량으로 등장시킨게 아닐까하는 의심어린 주장도 있다.


5.7. 무사시 측 사료들의 신뢰성이 전무[편집]

본래 이름은 후지와라 하루노부(藤原玄信) 또는 히라타 무사시(新免武蔵)라는 얘기가 있으며, 바뀐 이름에서 성은 미야모토 혹은 신멘(新免)으로 아명은 벤노스케(辨助), 이름은 武藏-'무사시'와 '타케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름을 읽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의 영향력으로 무사시로 굳어진 듯하다. 또한 이름이 마사나(政名)라는 주장도 있다. 호는 이천(二天) 또는 이천도락(二天道樂).

양자 이오리가 세운 비문, 즉 코쿠라 비문에 따르면 신멘 무니가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오리가 도마라 신사에 봉납한 표찰의 기록에 따라 덴쇼년간 사망한 신멘을 무니라고 보지만 실은 이 사람, 멀쩡히 살아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가계도에서는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무니를 양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도리류(当理流)의 무예가인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라는 설도 있다. 같은 작품에서 출생장소가 모순되는 등, 간단한 신상명세조차 이 모양이니, 실제 행적을 추적하려면 카오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오륜서 역시 원본이 소실된 상태로 다수의 사본만이 존재하는 실정이며, 이마저도 내용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오륜서에는 버젓이 하리마(播磨 현재의 효고현) 출생이라 적었는데, 에도막부 후기의 지리서인 토사쿠시(東作誌)에서는 비젠(備前 현재의 오카야마현)국 미미사카(美作)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그린 미야모토 마을은 바로 후자를 채택한 것.[28]

이렇게 무사시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는 이미지는 후대에 특히 요시카와 에이지의 명작 소설인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재창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무사시는 일본의 정식 역사서에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무사시의 행적에 관해 기록된 것은 전부 무사시의 제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창조된 것이다. 즉 요시오카를 멸문시켰다는 기록은 무사시의 양자였던 미야모토 이오리가 1654년에 남긴 코쿠라비문에 기록되어 있고, 무사시가 동군에 참전했으며 요시오카 일파에 승리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은 니텐이치류, 즉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유파의 사범인 탄지 미네히라가 1727년에 쓴 무사시 전기에 쓰여져 있으며, 무사시에 관한 사료인 무공전은 니텐이치류 사범인 토요타 마사나가가 1755년에 썼고, 니텐기=이천기(二天記)는 심지어 1776년에 무공전을 사료로서 토요타 마사나가의 아들 혹은 손자인 토요타 카게히데가 만든 기록이다. 무공전까지는 그나마 사료로서의 가치가 조금은 인정되나. 심지어 이천기는 날조의 정도가 워낙 심하며, 무공전에 등장하지도 않는 무소 곤노스케와의 일화 등 소설책

즉 무사시에 관한 근거 자료라고는 자신이 쓴 책+최대 사후 130년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져 각종 민간 전승과 신격화가 결합된 사료들 뿐이다. 덕분에 동 시대의 다른 사료와 비교 검증할 경우 다른 사료와 불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29] 아예 의도적으로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많다.


5.8. 현대의 무사시 실드 측의 사료 왜곡과 날조[편집]

또한 나오키는 무사시에 대해 옹호하는 측에서 무사시에 대한 불리한 기록들은 숨긴다며 63회의 진검승부를 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호소카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자 성격이 더러운 걸로 유명하던 니카이도 류의 마쓰야마 몬도를 두려워해 그 지역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있고, 오와리 번의 한 검술 사범에게는 병법 35개조[30]따위를 쓰고 후회하지 않겠나? 라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기록에는 전쟁에 참가했다가 성에서 던진 짱돌을 맞고 부상당해서 누워있다는 인간적인 면모의 기록도 존재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를 검성으로 부르며 귀신의 검술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기록들은 절대 인용하지 않는다.[31]

심지어 코쿠라 비문과 탄지 미네히라의 전기, 무공전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내용을 날조하는 경우도 잦다. 예컨대 미야모토 무사시가 당대 천하 제일이었던 야규 무네노리에게 승부를 신청해 야규 무네노리가 승부를 회피했다던가, 혹은 원래는 무사시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 되기로 했었는데 무네노리가 방해했다던가[32], 보장원류 창술은 이미 호죠인 인에이때부터 이미 승려들의 싸움을 금지하고 주지에게는 수신 명목으로만 창술을 계승시켰으며 인가장을 받은 제자들은 정작 일본의 중심이던 에도에서 도장을 차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장원 주지였던 호죠인 인슌에게 승리했다던가, 비판이 커지자 이제는 사실 그건 아니고 인슌의 스승에게 이겼으며 그 스승은 호죠인 인에이의 수제자였다고 한다던가[33]에게 이겼다던가[34], 닌자인 시시도 아무개[35]와 싸웠느니, 도적인 츠키카제 고헤이랑 싸웠느니라는 뜬금없고 정말 비상식적인 이야기들[36] 유랑하던 야규 토시요시 효고노스케를 만나 판정승을 거두었다던가, 이토 잇토사이에게 비겼다던가, 심지어 생몰 연대조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츠카하라 보쿠덴을 만나 싸워 무승부를 거뒀다 등등... 막말로 지금 당장 구글에서 무사시를 검색해봐도 사료 비슷한 것이라고는 4개밖에 안되는데도무사시에 관한 고사혹은 일대기라면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애초에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해서 남겨진 역사 기록들조차도 그 저자들이 무사시 관련자고, 일기 등 다른 사료와 교차 검증시 동일한 부분들이 적으며 이천기는 아예 전부 날조 기록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매우 불투명한데, 이러한 역사 기록조차 아예 전무한 일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이러한 창작된 기록들이 일본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큰 문제.


5.9. 유명한 제자도 한 명도 없음[편집]

정녕 하다못해 다른 증거들은 하나도 없더라도 설령 제자라도 훌륭한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나왔다면, 검술 자체가 강하다는 말이니까 강한 검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둔 이토 잇토사이도 대부분의 행적은 미스테리지만 그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둘 정도면 얼마나 셌겠어? 하는 생각으로 현대에도 가장 강한 검호들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심지어 유명한 제자조차 단 한 명도 없다. 나오키 산주고 역시 유명한 제자가 없었다며 이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무사시 실더들의 반박으로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라 사람이 배울 수가 없다(...)는 것.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보쿠덴의 검술은 신의 검술이라 수제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인가 그나마 무사시의 제자들의 공적이라면 탄지 미네히라의 무사시 전기, 무공전, 이천기 등 자기 유파의 개조인 무사시에 관한 신격화가 담긴 기록들을 엄청나게 써내어 후대의 요시오카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 저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것 정도. 특히나 요시오카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천기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 없이 인용하여 현대의 검성, 아니 검신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을 불러왔고, 이는 역사적인 사실 측면에서는 큰 문제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다만 본인의 실력과 가르치는 능력은 다른 문제란 것도 생각해볼 일. 스스로 오륜서에 적은 의문처럼 검술이 강하기보다 '타고난' 인자강인 것일 수도 있다. 현대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지도자로서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아니 본인은 숨쉬듯 자연히 되던 것이 제자들은 안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실패하는 쪽이 다수다. 애초 타고난 반사신경, 신체적 특징(완력이나 체구, 왼손잡이 등) 등으로 강했던 선수라면 이를 갖추지 못 한 제자들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나쁜 버릇을 물려주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 팔이 짧은 선수에게 토마스헌즈의 복싱을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으며 아무리 기술이 좋은 선수라도 조던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그처럼 공중경합에서 안정적인 자세로 슛을 던질 수 없다.


5.10. 소결[편집]

결론적으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진짜 천하제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명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짜 천하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검호들인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야규 무네노리와 천하제일에 가까웠던 검호들인 오노 타다아키, 이토 잇토사이, 야규 무네요시, 야규 토시요시, 아이스 히사타다, 이이자사 이에나오 등은 벼슬을 삶 + 당대 천하 제일로 불림 + 당대의 역사서에 활약들이 기록되어 있음 + 당대의 신분 높은 유명 인사를 제자로 둠 + 검술 실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한 제자들을 둠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 중 하나도 해당이 안 된다. 반대로 위의 검호들을 비판할 경우 어거지로 비판하더라도 끽해야 한두 개 정도가 나올 뿐이지만, 무사시는 비판점으로만 논문이 튀어나오며 실제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진실과 거짓에 관하여 40여개가 넘는 항목으로 분석한 책도 존재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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