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남은 기록이나 야사에 따르면
-춤 잘 춤
-말 위에서 처용무 출 수 있음
-연기 겁나 잘 함. 눈물 연기하면 주위에서도 몰입돼서 울었다고 함.
-폐비 윤씨 유전자 때문인지 현대 기준 꽃미남. (조선 왕실은 대대로 무골이라 곱상함과 거리가 매우 멀어)
-아버지인 성종은 키가 컸음. 그것도 물려받음.
-허리가 얇고 눈이 붉으며 피부가 하얌.
-시도 겁나 잘 씀. 국문학자들도 잘 쓴다고 인정할 정도.
(연산군 같이 곱상한 외모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미남이 아니었음. 남은 기록도 왕의 허리가 얇아 위엄이 없다느니 이런 식의 기록들임.)
아래는 연산군이 쓴 시들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다.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이슬 젖은 아리따운 붉은 꽃 푸른 잎 속에 만발하여
향기 풍기는 누각에서 훈풍에 취하네
구경만 하라고 은대에 주는 것이 아니라
심심할 때 보며 천지의 조화를 생각케 하는 것이지
비개고 구름 걷혀 밤 기운이 맑으니
달 밝은 윤각(綸閣)에 꿈 이루기 어렵구나.
해마다 좋은 때를 구경할 수 없으니,
어옹(漁翁)의 한 평생 지남만도 못하네.
꽃과 술을 주는 것은 내 가까이 있기 때문인데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대궐 뜰 오동잎에 밤비소리 싸늘한데
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 보니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 가네
푸른 이슬은 밤에 맺혀 비단 치마 적시고
가을 바람은 소슬하여 애띤 간장을 녹이누나
난간에 기대 기러기 소리 들으니 달빛이 차갑고
눈물진 눈시울에 슬픈 마음 이기지 못하네
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에 찬란한데
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네
짙은 녹색 연분홍 번화도 하이
그 누가 청광(淸狂)을 위하여 이슬 향기 가져왔나
가벼이 대답함은 깊게 믿음을 알고
사사로이 말함은 친함이 두터움을 느낄 수 있다
호기를 내는 것은 천성을 따른 것이고
미친 짓 하는 것은 천진으로부터 온디
군신이 해학함을 말하지 말라
나무라고 비웃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다
부생을 누가 애석하지 않으리
봄을 핑계하여 술취하는 것으로 어찌 만족하랴
연산군 관련 자료들 보면 예술가적 성향이 매우 강함 왕들 중 유일하게 시집을 냈을 정도로 시를 많이, 그리고 잘 썼음
폐위 후에 시집을 싹 없앴는데도 남은 시가 이것 말고도 많음 (기록에 남아서)
기록을 보면 아내인 폐비 신씨를 아꼈고, (정작 행실은 음...) 미치기 전에는 나름 멀쩡했음.
왕 말고 예술가로 살았다면 알아서 잘 살았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왕
그리고 tmi 아닌 tmi를 쓰자면
1. 폐비 신씨는 궁녀들한테도 존댓말을 쓸 정도로 성품이 뛰어나서 폐비가 된 이후에도 주위 사람들이 챙겨줬다고 함
2. 폐비 신씨는 매번 연산군의 이상한 사람 짓을 말리려고 애썼다고 하는데 피 많이 묻힌 연산군도 중전이 말리면 얌전히 돌아가거나 적어도 화 내지는 않았다고 함
연산군 일기 보면 중전이 친정 가니까 술 챙겨주고 중전이 친잠례 했다고 교서 반포 하고(이거 원래 중전이 하는 일임) 중궁이 어질고 착하고 순후하고 덕이 많은데 그걸 나만 알고 남들은 모른다며 안타까워함
(여기서 환장 포인트는 한창 미쳐있을 시기인 연산 11년 때 기록인데 그 미쳐있는 와중에도 중전 칭찬은 함)
아무튼 죽기 전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남긴 말이 '폐비 신씨가 보고싶다'였을 정도
선조
당대에 손꼽히는 명필
한석봉이랑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초서체는 한석봉보다 잘 쓴다는 말까지 있었음
명나라 사신들도 조선 오면 선조 글씨 좀 얻어가려고 청탁하고 난리였다고 함
심지어 한글도 잘 씀




정말 왕 말고 글씨만 썼어야 함
인조는 취급 안 함
--원글 댓글 추가 +
인조 유일한 장점: 얼굴 짱잘
조선 당대에도 우리 임금은 장점이 얼굴밖에 없단 얘기 많았다고 함
연산군 환장인게 중전이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들으면서 역시 내 마누라는 어질고 덕이 많아 ㅎㅎ 라면서 기념비 세움. 이상한 사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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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