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술을 마셨다
내가 다시 불쌍해
술을 마셨다
남몰래
울며 잠든
밤이 많았다
- 술 / 정채봉
당신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 진실 때문에 당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이의 마음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을까.
부디, 사랑하는 이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이 이미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매일매일 조금씩 덧칠되는, 아직은 '여백 많은 캔버스'이기를.
- 잘 있지 말아요 中 / 정여울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만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 나희덕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 얼음새꽃 / 곽효환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 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 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바닥 / 문태준
거기는 비 온다고?
이곳은 화창하다
그대 슬픔 조금, 조금씩 마른다
나는, 천천히 젖는다
- 사랑, 오래 통화중인 것 / 문인수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그런 사람이 생기면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中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
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네
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
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
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
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
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
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
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
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 숨길 수 없는 노래 / 이성복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드른 내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그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 그리운 마음 / 이기철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 물속에서 / 진은영
봄은
연하고
여름은
빠르고
겨울은
늘어지고
삶은
짧은데
유혹으로 중무장한
너의 향기는
너무 진하구나
- 가을 / 임영준
비가 오기 전엔
몰랐다
바닥이 갈라지도록
매일 허리 굽히며 살아온
구두의 세월
골 깊은 주름처럼
패이고 갈라진
너의 상처
발바닥에
눈물이 스민다
- 구두 / 조성규
사람들은 사랑이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끝나고 난 후의 외로움이 두려워서 사랑을 피한다.
- 잘 있지 말아요 中 / 정여울
그리움을 허물다 돌아 보니
더 많은 그리움만 쌓여 있군요
내가 정말
그대를 사랑 하고 있나 봅니다
- 사랑 쌓기 / 윤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