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 태어난
다우치 치즈코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면서 조선에 건너오게된
그녀는 아버지사망이후 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된다.
이때 윤치호라는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다우치 치즈코는 음악교사로 봉사하던중
만난 윤치호와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
공생원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이때 한국식이름인 '윤학자'로
조선에서 살아가게된다
(공생원의 윤치호씨는
친일파 윤치호와는 동명이인)
1945년, 해방이후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을뻔했으나 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헌신을
익히 봐온 마을 주민들의 의해 고초를 면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목포에도 인민군이
몰려오면서 다들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들을
두고갈 수 없다며 윤학자여사는 공생원에 남는다.
그로인해 이들 부부는 인민재판부에
회부되지만 마을주민들의 적극적인 옹호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남편 윤치호는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했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자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는다
남편 윤치호는 51년 1월에야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공생원의 식량난때문에 전남도청이 있던
광주로 구호요청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된다
이후 공생원의 운영은 온전히
윤학자여사, 그녀에게 맡겨졌고
식량문제로 후원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자신의 기모노,오르간 팔수있는것은 모두 팔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생원을
꿋꿋히 이어나갔다.
이에 윤학자여사는 1963년 대통령이 직접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
1967년에는 일본정부에서 훈장을 수여
1965년에는 목포시에서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했을때
첫 수상자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그녀가
수상해야한다고 했을정도라고,
그녀가 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68년, 그녀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장례식은 목포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뤄졌고
당시 목포역 광장에만 3만명이 참가하여
목포시민들은
'전 목포가 흐느껴 울었다'
라고 표현하였다
1928년이후 현재까지 목포 유달산 아래 자리한
목포공생원은 그녀의 한국이름 윤학자여사(다우치 치즈코)의
꿈인 '고아 없는 세상'을 위해 여전히 이어가고있으며
지금까지 4천여명의 아이들이 거쳐갔다
현재 그녀가 태어나고 사망한 날인
10월 31일은 UN 세계고아의 날로 추진되고있다
일본인인 그녀는 목포에서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