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또 봄일까 - 백희다]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꽃을 위한 헌시 - 정규화]
바라보면
꽃이었고
돌아서면
그리움이었다
나는
왜
그 짓을
못했을까, 꺾어들면
시든 다음에도
나의 꽃인것을
[짝사랑 - 이채]
너무 어여삐도 피지 마라
아무렇지 않게 피어도
눈부신 네 모습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어디에서 피건
내 가까이에서만 피어라
건너지도 못하고
오르지도 못 할 곳이라면
다가갈 수 없는 네가 미워질지도 몰라
그저 이렇게라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다 태워서라도
널 갖고 싶은 꿈일 뿐이다
[유적 - 조용미]
오늘 밤은 그믐달이 나무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저 나무는
제 마음 다스리지 못 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내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속같이 어둡습니다
[김경후 - 문자]
다음 생에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홍영철 - 기억은 어둠처럼]
시간은 흘러가지만
기억은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깊어가는 어둠처럼
저 혼자 아무 말 없이 깊어간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그것은 깊게 깊게 고인다
아무도 엿볼 수 없고
아무도 껴안지 못하는
우리들의 기억은
저 혼자 가슴속에서
밤처럼 깊어간다
잡으려다 놓쳐버린 너의 별
쌓여서 썩어가는 너의 발자국
짐승 같은 시간들
[이창훈 - 폭우]
지금껏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서서히
젖을 새도 없이 젖어
세상 한 귀퉁이 한 뼘
처마에 쭈그려 앉아
물 먹은 성냥에
우울한 불을 당기며
네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
[이해인 - 꽃의 말]
고통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면
저는 슬퍼요
필 때도 아프고
질 때도 아파요
당신이 나를 자꾸
바라보면 부끄럽고
떠나 가면 서운하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더 많아
미안하고 미안해요
삶은 늘 신기하고
배울 게 많아
울다가도 웃지요
예쁘다고 말해주는
당신이 곁에 있어
행복하고 고마워요
앉아서도 멀리 갈게요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삶으로
겸손한 향기가 될게요
[최승호 - 눈사람 자살 사건]
그 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싶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 올랐다.
[서덕준 - 상사화 꽃말]
너는 내 통증의 처음과 끝,
너는 비극의 동의어이며,
너와 나는 끝내 만날 리 없는
여름과 겨울
내가 다 없어지면
그때 너는 예쁘게 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