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2차 침입
1차 침입에서 서희의 담판으로 일단 거란과 친교를 맺었지만, 그 후에도 고려는 계속 송과 비밀외교를 했고
결국 거란은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2차 침입 단행
고려는 당시 실권자 강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서 거란군과 대치.
초반에는 고려가 우세했으나 강조의 방심으로 인해 거란에게 대패. 강조 포함 무려 3만여명의 장수와 병사들이 전사했고 고려의 주력군이 사실상 붕괴됨.
양규 등 북방 거점 성의 장수들이 저항을 계속했고 서경도 함락되지 않았지만, 거란은 왕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얘네들 무시하고 개경으로 직행.
결국 고려 현종은 개경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개경은 거란에게 함락되고 불바다가 됨.
이때 현종의 처지는 개안습이었음. 조선은 그래도 왕권이 강하고 중앙집권이었던 나라라서 선조나 인조는 피난 가더라도 신하들 다 따라갔고 지방관들도 왕 대접 해줬지만, 고려는 아직 호족 권한이 강했기 때문에 피난 간 지방에서 호족들이 왕 개무시하고 신하들도 다 도망가서 현종 따르는 사람 수십명 밖에 없었음.
아직 현종이 경기도 양주땅도 못 벗어 났을 시점에 거란군이 바로 코앞 5km 지점까지 쫓아옴. 거란군이 쭉 진격해서 현종 잡았으면 그대로 겜끝이고 삼전도 굴욕 600년 먼저 찍게 되는 상황.
이때 하공진이 거란과 담판을 벌이기 위해 직접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감. 하공진은 거란에게 "우리 고려의 남방땅은 수천리에 달하며(뻥), 이미 우리 왕 거기로 도망갔다(뻥)"라며 블러핑을 침.
근데 이게 통해서 거란은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데려가고, 고려 왕이 추후에 거란에 직접 입조하는 조건으로 퇴각함. 북방의 양규 등 남아있던 고려군이 계속 거란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도 퇴각 이유였음.
이렇게 2차 침입은 일단 고려가 형식상으로는 항복하긴 했으나 병자호란때처럼 굴욕을 겪진 않았음.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된 반면, 현종은 나주로 튀는데 성공했다는게 첫번째 이유고, 두번째 이유는 고려의 북방에는 양규가 있었다면 조선의 북방엔 김자점이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