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틀째, 침대 위에 누워 가만히 눈만 꿈뻑이고 있다. 무기력하게 천장을 쳐다보면 그 곳에 있고,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면 그 곳에 있다. 그 날 이후로, 한빈이는 내 환상이라는 틀 안에 영원히 자리를 잡은 듯이 그렇게 언제나 내 시야에 머물렀다.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한빈이는 죽은 게 맞다는 것도 잘 알도 있다. 그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건 나였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꼼짝 않고 그 환상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혹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내가 잠깐 눈을 돌린 그 사이에 지금 내가 보고있는 환상 속의 한빈이라도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을까봐서. 그게 두려운거다. 〈2.틀> 숫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인관계가 좋았던 한빈이의 성격은 그의 장례식에 많은 조문객들을 불러왔다. 나로선 전혀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었지만 한빈이는 달랐겠지. 검은 액자 속 환하게 웃고 있는 한빈이를 보고, 시선을 돌려 내 손에 들린 잿빛 가루의 작은 단지를 보자니 갑자기 눈물이 샘솟듯 밀려왔다. 이게 아닌데. 그냥 작은 케이크 하나면 됐고 그냥 평범하게, 그렇게 소소한 파티를 하려 했던 건데… 이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빈이보고 천천히 걸어 오라고 할 걸. 아니, 내가 갔다 오면 됐던 일인데… 그저 그 몇일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모두 다 내 탓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울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한참을 천장의 등을 바라보며 쓸쓸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 문에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지? 들어가도 돼? 준회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미처 듣지 못했다. 어차피 거절을 해도 들어줄 녀석이 아니었음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곧 문이 열렸다. -…왜 이러고 있어. 뭐라도 먹자, 일어나. 날 이르키는 준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억지로라도 입에 뭔갈 넣어 줄 녀석이니. -아-해. 힘겹게 벌린 입에 따뜻한 죽 한 숟갈이 들어왔고,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구역질에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00아!! 비틀거리는 날 잡는 준회의 손길을 뿌리치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먹은 것도 없어 금방 먹은 죽 한 수저 외에는 위액뿐인 굉장히 쓰라린 토악질이었다. 타는 듯한 속을 부여잡고 입을 헹궈내고 있노라면 문 밖에선 다시 준회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아? 미안… 내가 괜히… 어두워진 준회의 낯빛을 보자니 괜스레 내가 더 미안해져 괜찮다며, 그래도 맛은 있네- 하며 능청을 피웠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푹 잠겨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온 흉측한 목소리에 준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나, 진짜 괜찮아. 걱정 말고 가도 돼. -방으로…가자. 짧은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둘 사이에 깔린 침묵은 깨질 줄을 몰랐다. 앞서 걷는 준회의 어깨가 전보다 작아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준회일지도 모른다. 10년지기 친구가 뺑소니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고 준회는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걷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복도에서 방 문이 열리는 소리는 소음이라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팔을 잡곤 조심스레 나를 이끌어 침대에 앉혀주는 준회다. -…잘자. -나 이제 괜찮다니까… 그만 가 봐. 너 바쁘잖아. -응. -걱정하지 말래도. 나 진짜… 괜찮은데… -응. 알겠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데…
-알겠어.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지금, 한빈이가 보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다. 준회의 친절이 너무나도 눈물겨워서 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셋의 행복한 틀을 깨어 버렸다는 사실에, 그 자괴감에 눈물이 나는 거다. 못된건 나다. -김한빈! 너 먼저 넘어. 그리고 준회 너는 밑에 좀 엎드려 봐. -뭐? 야, 내가 왜 그런…
-쉿! 조용히 해봐! 발소리 들린다…! 다급한 한빈이의 한 마디에 우린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매일마다 일어나는 이 상황에 다들 적응이 된 것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 싫다고 몇번 투덜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준회가 동의하고 한빈이마저 동의해 벌어진 일. 수업을 빼고 놀러나가기 위해 담을 넘는 것이었다. -엇, 뻥인데? 그걸 진짜 믿냐? 흐히히.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곤 훌쩍 담을 넘어버리는 한빈이다. -아이씨, 김한빈! 넌 담 넘고 나서 한 대 맞을 줄 알아! -000, 너는 빨리 넘기나 해! 투덜대면서도 엎드린 준회의 등을 밟은 뒤에 힘차게 담을 넘었다. -읏차! 담 너머로 넘어간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는다는 것이 그만 한빈이가 나를 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서로 눈을 마주치곤 부끄러움에 히히, 하고 웃어버리면 그 쯤엔 항상 준회가 불평을 늘어놓는다. -야 진짜 000… 아, 허리야. 너 또 살쪘냐? 다이어트 해! 얼굴을 찌푸리며 등을 턱턱 쳐대는 준회가 눈치채기 전에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능청스럽게 답하는 것 역시, -다이어트? 무슨 소리야. 나처럼 날씬한 애가 또 어딨다고…
-아유, 우리 00이 그랬어? -미친 것들… 그 역시 우리의 찬란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일상 중 하나였다. * 으헿 이제 준회가 등장했어요! 멋지니주네ㅠㅠㅠㅠㅠ 신알신 해주신 독자분들 감사드리고 댓글써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