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없어.” 그가 말했다. “맞아.” 나는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로빈은 자신의 볼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의 생생한 촉감을 느끼며, 분명 이 축축함의 근원지는 그의 눈물일 것이라 짐작했다. 어젯밤 고전문학의 책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의 어린아이 같은 말간 모습이 부적합한 상황 속에서조차 로빈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빈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빈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눈동자에 담긴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메말라 있었다. “이러지마.” 로빈이 속삭였다. 마치 억지로 내는듯한 목소리는 잔뜩 잠겨 그 형태를 알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진부한 대답을 대신하듯 로빈을 자신에 팔에 가두어놓은 상태에서 더더욱 자신의 몸을 밀착할 뿐이었다. 줄리안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채 마르지 못한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의 노란 머리카락 끝에 달랑거리던 물방울이 차례로 로빈의 눈가, 볼, 입술 위로 떨어졌다. 줄리안은 무심한 얼굴로 로빈을 바라보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얼굴을 더욱 가까이 댔다. 그러자 줄리안의 불안정한 호흡이 로빈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가 들뜬 숨을 내쉴 때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와이셔츠가 눈앞에서 정처 없이 흔들거렸다. 점차 진해지는 묘한 위스키 향에 로빈이 어지러운 듯 눈가를 찡그리자 그의 검은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로빈은 자신보다도 더 가느다란 그의 허벅지가 밀착되는 것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로빈은 그를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무시하며, 관심도 없는 천장에 새겨있는 벽지위의 곰팡이 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깨끗한건 늘 더럽혀지기 마련이지.”줄리안이 말했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로빈은 미동없는 시선으로 더렵혀진 하얀 벽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잔뜩 핀 곰팡이의 문양이 마치 자신에게 손짓하는 악마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줄리안은 그 말만 남겨둔채 서서히 멀어졌다.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진 다음에서야 로빈은 뭉쳐놓은 숨을 내뱉듯이 뱉어냈다. 그가 쓸어내린 몸이 불에 덴 듯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그런 로빈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려다 봤다. 로빈의 입에서 쉽게 대답이 나오는 것이 신기한 듯 했다. “그러니까, 빌어먹게도- 사랑은 없다는 거야.” 그는 결국 그말을 남기며 웃었다. 줄리안의 웃음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눈에 비쳐진 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퍼보여서, “맞아.” 나는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