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감정을 담는 틀의 한계를 벗어나서 나의 일상을 잠식해버리는 순간이 있다. 물론 대개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순간을 극복해낸다. 스스로 출구를 향해 헤엄쳐 나오거나, 병원에 다니거나,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거나, 가슴에 영영 묻어버려 마치 잊은 것처럼 살아가거나. 그러나 우리의 나날들을 흠뻑 잠기게 했던 눈물만은 기어코 자신이 살던 집에 흔적과 향내와 깊이를 남기고야 만다. 눈가는 반투명하고 영구적인 흉터로 잔뜩 헝클어진다. 인생의 어느 시점이 지나면 모두가 눈빛에 저마다의 무언가를 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게 삶이었다. 이십대 후반. 내 또래 쯤이면 다들 그랬다. 삐죽삐죽하게 살아왔고 또 반듯하게 살아가야 하는 때였다. 쉽사리 답하기 어려웠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는 질문이 이제는 별안간 가슴을 아리게 하는 때였다. 실연의 상처, 계속된 실패, 지독한 가난, 가정의 파탄, 심리적 고립, 사랑하는 이의 죽음, 질병, 불의의 사고. 뭐든 하나쯤은 경험해보았을 것이 당연한 때였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거의 모두였다. 하나의 좌절이 불러오는 연쇄작용에 두터워보이던 평온이 파사삭 어긋나 버리는순간들을 지나쳐왔다. 우리는 다들 소용돌이쳐봤다. 시선을 마주할 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눈에 어린 기억들을 상상하곤 했다. 내 또래 쯤이면 누구나 그랬다. 그래서, 그 날에, 그 녀석이 나의 일터에 처음 들러 음료를 주문한 날에, 처음 내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눈 날에, 나의 친한 선배와 친해서 그의 소개로 놀러와봤다는,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말투를 처음 들었던 날에, 평범한 옷차림에 반듯반듯한 얼굴로 칵테일을 음미하는 모습을 처음 바라본 날에, 노래가 좋다는 말에 내가 선곡하는 건데 그렇게 들어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던 날에, 박진영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던 날에, 그가 다음에 또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날에, 눈이 많이 오니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를 건넸던 날에. 나는 내내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조금의 회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색 눈동자와 검은색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정갈하고 밝아서, 한순간이라도 우울에 빠져본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기까지 했다. 얕은 욕망을 무한히 채우며 걱정없이 살아온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런 저급함이 아니었다. 눈물이 흘렀던 자국이 없이도 충분히 성숙했으며, 외로웠던 흔적이 없이도 누구보다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에 담긴 물음표를 경이롭게 바라보며 나는 나의 유리 조각같은 기억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억지로 매어놓은 실밥을 풀어헤치고 싶었고 쏟아내고 싶었다. 왜 너는 치열하게 성장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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