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OPHELIA
덥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지 벌써 2시간째. 더워서 연 창 밖엔 매미들이 미친듯이 맴맴거린다. 얇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아직 6월 중순인데 이렇게 덥다고? 와 지구온난화가 정말 심각한가보네."
나시티에 짧은 반바지 차림. 더 이상 뭘 더 벗어야한다는 거지?
방충망이 굳게 닫힌 창가로 몸을 움직였다. 학교 주변 먹자골목의 간판이 요란하다. 간간히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달도 무진장 더운가, 지구와 부비부비하듯 완전 가까이 떠서 뚱그런 달이 엄청 크다. 너무 밝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카톡 대화목록을 살폈다. 눈에띄는 이름.
[선배]
대화방에 들어갔다.
-자요?
"아냐아냐, 이거 구질구질해보옄ㅋ"
-선배 하염. 엄청 덥다!!
"못보내!!!! 완전 뜬금포!!!!!"
글을 적었다, 지웠다. 적었다, 지웠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을 잡았다. 한참 터치자판 위에 엄지손가락을 정처없이 누를까 말까 고민했다.
'카카오 토ㄱ'
에? 헐!!! 뭐야!!!
-뭐해. 오전 1시 21분
-어? 바로 1 지워지네 안잤어? 오전 1시 21분
아!!! 아아아!!!!!!!!!! 카톡 기다린것 같잖아!!!
-잠 안오지? 오전 1시 21분
-네 엄청 잠 안와요. 선배도 잠 안오졍? 오전 1시 22분
-완전 더움 그냥 지구가 미친것같아요 오전 1시 22분
-나도 잠 안와. 오전 1시 22분
-너무 더워요. 남자들은 좋겠다. 윗통까진 벗어도 되니까ㅠㅠ 오전 1시 22분
-야ㅋㅋㅋ 길거리에서 벗으면 신고들어와. 은팔찌 득템한다ㅋㅋ 오전 1시 23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몸만 좋다면야 신고 면제해DREAMㅋㅋㅋㅋ 오전 1시 23분
-ㅋㅋㅋㅋ 오전 1시 23분
-지금 나올래? 오전 1시 25분
-
이름도, 성도 안적은 채 덜렁 [선배] 라고 저장한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정택운.
함께 미대 서양학과에 다니는 선배는 10학번으로 1년 전 복학한 선배이다. 군대를 마치고 반 년간 알바, 반 년간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는,
내가 파릇파릇한 신입생 때 본 이미지와 많이 달라져있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물고 웃음도 대화도 없는 입, 냉기가 넘치는 눈빛.
난 선배를 신입생 4월까진 엄청 무서워했다. 2학번 높은 선배는 동기들, 그리고 11학번 선배들, 그 위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냉미남으로 통했다. 완전 안웃어.
아 웃기고싶은 욕망이 깊숙한 가슴부터 활화산처럼 솓구쳐 오른다!!!! 으어얽얽어억ㄱ럭어!!!!
1학년 개강총회땐가, 그냥포차에서 고등학교 때 처럼 동기와 선배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수다를 떨다가 우연찮게 눈이 마주쳤는데, 완전 무섭게 째려봤어
그 후로도 같은 수업 조별과제 때 조원으로 계속 마주쳤고, 완전 무섭게 매일매일 째려봤다.
서러워서 학교 다니겠나 쳇.
아무튼 선배가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난 3학년이 되었다. 물론 나도 1년간의 휴학을 하였다.
나 스스로 개척하겠어!! 라는 다짐은 단 3개월을 넘기지 못했고, 학교가야겠당 헤헷. 멋있게 떠났으나 구질구질하게 돌아왔당.
선배와 나는 같은 학년으로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학기 중간에 통지서가 나온 선배는 3학년 1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입대를 하였고, 덕분에 복학 하였을 땐 다시 3학년 1학기 부터 수업을 들어야했다.
선배의 새하얗던 피부는 약간 노르스름하게 타졌고, 샛노랗던 머리칼은 어두운 흑발로 변해있었으며
어릿하고 미숙한 이미지는 더 남자답고 든든해졌다.
그토록 무서웠던 선배인데.
완전 멋있어졌다. 헤헤.
-
전공 수업인 '고전 서양학' 에서 함께 조별과제를 하였을 때 였다. 24시간 카페에서 과제를 끝마치고 새벽 3시 쯤 집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다른 조원들은 집이 먼 관계로 할증이 좀 붙더라도 택시를 탔는데,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택시 타기에도 애매해 그냥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 하하하. 우와 진짜 어둡다. 가기싫게^^"
자취방으로 향하는 골목 끝이 무진장 어두웠다. 나 지금 떨고있냐.
노트북이 든 파우치를 손에 꽉 붙들고 애써 입고리를 올리며 그 어둠 속 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박타박.
타박타박.
타박타박타박.
타박타박타박.
타박.
타박.
잠만ㅋ. 이거 뭐야ㅋㅋㅋㅋ 아씨 신나~
누가 쫓아온당. 우와. 우와아아~ 나 이제 장기 털리는겨? 내 장기 전세계로 뻗어나가는겨?
멈춰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따라오는 발걸음도 빠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찰 때 쯤,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이별빛!!!"
어? 아는목소리다!!
"이!!! 별!!! 빛!!!"
그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날 따라오던 발걸음이 조용해졌고, 날 부르는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온다.
뒤를 돌아보자 모자를 푹 눌러쓴 누군가와 그 뒤로 뛰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모자를 쓴 남자를 지나쳐 나에게 뛰어와 날 확 끌어안아주는 또 다른 사람의 정체는.
"어디갔어. 혼자가지 말랬지, 오빠가 데려다준다고."
정택운 선배였다.
-
그 이후로 선배와 나는 매우 친해졌다. 말도 잘 않하고, 표현도 없다. 그냥 츤츤이.
"츤츤선배!"
"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에잉 츤츤선배앵~"
"아씨. 왜"
"선배. 같이 치맥 콜?"
"안돼, 오늘 야작이야."
"왜요?"
"내일 모레까지 자화상 제출과제있는데 스케치밖에 못했어."
"넹?"
"인물학과 표현 수업 과제말야."
"저도 듣는데 그수업?"
"과제했냐?"
"… 헤헤."
머리에 살짝 땅콩을 먹인 선배는 내 팔을 잡아끌고 야작실로 데리고왔다. 나 눈이 왜 이리 촉촉하징? 흡. 나 울고있냐?
-
널렁널렁 풀러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다. 오밤중에 풀메이크업은 좀 이상하겠지? 간단하게 비비크림과 뷰러, 마스카라를 하고 레드코랄 계열의 틴트를 빠르게 발랐다.
오래 입어 누린내 날 것 같은 넝마사각빤쮸(오빠 이재환거라고 말 못한다.)를 벗고 나름 신경써서 츄리닝 핫팬츠를 입었다. 검은 나시티 위에 얇은 하얀 가디건을 걸치고
지갑, 핸드폰을 손에 챙겼다. 전신거울로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고 검은 쪼리신발을 후다닥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자취방 1층 입구 유리문을 열자 팔장을 꼭 낀 길다란 기럭지가 보였다.
"선배! 언제왔어요?"
"나, 집 이사했거든? 너네 집 바로 옆 동이야 바보야."
"아 맞당! 우리 어디가요?"
"치맥할래?"
"콜콜! 완전 콜!"
팔짝팔짝 뛰는 내 모습에 아빠미소를 짓는 선배를 올려다봤다. 간격을 띄고 걷는 어두운 골목은 무섭지 않았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있고, 꺼져있고.
학교 먹자골목 근처 'H대 학생회' 라는 치킨집에 발을 들였다. 계절학기로 남은 우리학교 학생들은 우리와 같이 잠이 오지 않는지 치킨집이 미어터졌다.
"또 왔어? 먹어 아가씨! 아무데나 앉아!!"
자리에 앉아 상냥하기 그지없는 주인아줌마의 안내에 맞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주황빛 전구 바로 밑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벽에 대충 써진 메뉴판을 보고 손을 들었다.
"아줌마!"
택운 선배는 자리에 일어나 스스로 물병을 들고, 옆에 대충 쌓인 물컵 두 개를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선배가 물을 따라 내 앞에 놓아준다.
"왜 불러!!!"
"주문이요!"
"뭐 먹을건데!!"
"스파이시 치킨이랑 맥주 1.000이요!"
"알겠어!!"
매번 상냥하다니깐. 헤헤.
선배는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소리지르는 내 모습에 픽 웃어보였다. 아줌마는 테이블에 던지듯 맥주 1.000cc, 유리잔 두 개를 주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뭐든 대부분 셀프!] 라고 적힌 벽 근처로 걸어갔다. 그 밑엔 대충 찢어진 봉다리 안에 든 사각 무, 그릇, 포크, 수저, 소스, 강냉이, 건빵 들이 있었다.
사각 무를 그릇에 담고, 포크, 강냉이, 건빵, 소스를 적당히 담아 낑낑거리며 테이블로 옮겨왔다.
"와 덥긴 덥네요."
"그니깐, 자취하면서 계절학기 듣는 애들은 다 나온것 같다."
"어휴 선배 안 더워요?"
"조금, 넌 더… 워? 덥구나."
얇은 가디건을 벗자 선배가 말을 더듬는다. 눈을 열심히 굴리더니 건빵으로 시선을 맞춘다. 키키, 귀여워.
선배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자기가 입고있던 남색 아디다스 츄리닝을 벗어 어깨에 걸쳐준다.
"쳐다본다."
선배의 울끈불끈 잔근육이 검은 나시 밑으로 보였다. 우연찮게 커플룩이네! 검은나시이~ 검은 나시이~~~
장난스레 선배가 걸쳐준 츄리닝을 내렸다.
"더워요!"
선배가 질겁하며 자리에 일어나 다시 어깨에 걸쳐준다.
"쳐다본다니까?"
"보라고 해요!"
"야! 다, 다 큰 여자애가 겁을 상실했나!"
"선배도 나시티에요!"
"난 남자잖아!"
"헐, 남녀차별적 발언! 성과 가정시간에, 읍!"
"남녀차별적 발언이 아니라! 넌 여자니까."
선배가 손을 뻗어 나불대는 내 입을 막곤 흘러내린 츄리닝을 다시 가다듬어준다. 때 마침 스파이시 치킨이 나왔다. 아줌마가 상냥하게 묻는다.
"뭐여 시방. 과부 앞에서 뭐하는 커플짓이야?"
"어? 저희 커플 아니에요!"
"뭐야. 그럼 섬? 솜? 그거 하는거야?"
"아~ 썸이요? 아뇨, 아뇨! … 아닐껄요?"
"뭐래 지지배가. 많이 먹어라!"
선배가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정수리를 발사한다. 빔빔빔빔 비비빔비비비빔~~ 동그란 정수리가 귀엽다.
분명 고개를 숙이고 웃고있을 것 이다.
손을 뻗어 닭 다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을 때 쯤이다. 선배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정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뭐에요. 빨랑 먹어요. 식겠당. 뜨거뜨거! 후후~"
"야."
"넹."
"우리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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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작 뜌리
1. 목성이래요. BGM은 심규선, 오필리아
2. 애정해, 피아노해 BGM은 스탠딩 에그, 햇살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