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機). 00 그 사건 이후로 나에게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과 나를 외면하는 사람들로 나는 그들이 내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전자이면 동정과 연민 딱 그만큼의 호의만 베풀기를 바라고 후자이면 앞으로도 나에게 아주 조금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외면해주길 바란다. 평범한 회사원이셨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돈이 많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집안의 외동딸. 그게 나였다. 사람들은 사실 제일 어려운 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 했던 걸 이제야 깨닫는다. 여고생답게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었던 나는 평범함을 싫어했다. 누구보다 평범했고 그걸 싫어했던 내가 지금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망한다.하지만 이미 너무 멀어져버렸다. 나는 영원히 평범해질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내가 너무 가여워서 오늘도 스스로 나 자신을 연민한다.
*도경수 나는 고아다. 어린 나이에 나를 가졌던 엄마는 아빠에게 버림받고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그분들께 나는 짐이 되는 존재였나 보다. 고아원에 가야 했지만 나를 가엾이 여기신 한 할머니께서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할머니께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해야 하고 잘해야만 한다. 나하고 할머니 말고는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계속 눈에 띈다. 나랑 닮은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동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 처지를 내가 너무나 잘 안다. 외면조차 되지 않는 네가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변백현 어딜 가나 항상 주목을 받아왔다. 외모가 뛰어나게 잘생겨서가 아니다. 타고난 성격이 모두에게 친절한 탓이다. 이런 내가 스스로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지만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아니기에 안도한다. 주변 사람들은 늘 내게 정이 너무 많으면 좋지 않다고 말을 건네곤 한다. 그 말은 참 모순되었다. 나는 항상 집안 환경이 불우한 친구들을 보면 안쓰러웠다. 단지 그래서 도와주는 것뿐이다. 연민. 그 이상의 감정도 그 이하의 감정도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연민 그 자체이다. 지금까지 내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정해져있었다. 고마워하거나 또는 자존심 챙긴답시고 화를 내거나. 어찌 되었든 난 그런 반응을 보는데 흥미가 없다. 그들의 반응을 보려고 한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얼마 전부터 너에게 흥미가 생겼다. 너는 무언가에 스스로를 가둬 버린 것 같았다. 곧 무너져내릴 것 같으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네가 신기하다. 너에게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김종인 중학교 입학식 날 반에서 너를 처음 보았다. 눈에 잘 안 띄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화려한 색깔의 외투를 입은 다른 여자애들보다 더 눈에 띄는 너였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널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좋아하게 된 계기 같은 건 없다. 나는 무식해서 짝사랑도 이렇게 무식하게 하나보다. 나는 알게 모르게 3년 동안 너를 많이 챙겼다. 사소한 것부터 큰일까지. 그렇게 너만 빼고 내 짝사랑을 다 알게 되었고 우리는 졸업을 했다. 같은 고등학교를 가서도 우리 사이는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너의 환경이 변했고 그 환경이 너를 변하게 만들었다. 너는 나를 경계했고 그럴수록 나는 한발 더 다가가서 너를 보호했다. 너는 나를 동정이라는 단어에 가둬버린듯했다. 나는 이제 길었던 짝사랑을 끝내고 내 마음을 너에게 고백함으로써 동정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날 것이다.
*오세훈 난 김종인이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내 여동생이 지 좋다고 쫓아다닐 때 거들떠도 안 본 것도 결국 고백받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거절한 것도 몇 년째 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는 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김종인을 도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너를 이용했다. 너라면 내가 김종인을 도발하기에 적당할 것 같았다. 같은 반인 내가 다른 반인 김종인보다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너를 괴롭히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하루하루 늘어갈수록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종인 때문에 시작한 건데 왜인지 파리 새끼들이 점점 꼬인다. 너는 내가 괴롭히는 거지 다른 새끼들이 괴롭혀도 되는 게 아니다. 네가 울었다. 견고한 벽으로 쌓여있었던 것 같은 네가 무너져내린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 뒤로 더 견고하고 단단해진 너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너를 모르겠다. 그들이 내가 만든 틀안에 갇혀있어주길 바란다. 제발. --------------------------------------------------------- * 처음과 마지막은 본인 시점이고 나머지는 사진에 나오는 인물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