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불어주는 눅눅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지나가고,
어느새 익숙해지기 시작한 골목 사이로 여지까지 남아 있던 봄의 기운이 쓸어내려지듯 날 스쳐갈때 즈음.
처음으로 사랑인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
점차 하나둘 내 머릿속에 스며들어오듯 각인될때였다.
" ..많이 좋아해. "
" ... "
" ..좋아해, 찬열아. "
어린 날의 감정이야 단순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사랑'한다고 믿었던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새겨듣지도 못한채,
그저 나 혼자만을 생각하며. 좋아해. 너를. 많이 좋아해. 몇번이고 고백을 했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미안한 일이야, 아니 그것보단 조금 많이.
" ...좋아해줘서, 그래서 고마워. "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 너는 지독하게 착한 녀석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내가 상처받을까 고맙다고 몇번이고 말을 했었지.
나는 네가 내게 고맙다고 하는 말이.
그저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사랑을. 온전히 받아주고 있는거라고, 그렇게 혼자서..
" 아니야. 나랑 같이 있어줘서, 난 그게 제일 고마운걸. "
그때 부끄러운 고백이라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가,
너에게는 조금은 큰 부담이 되어
네 어깨를 짓누르는 존재가 될 줄은 난 상상도 못했었다.
그저 내가 좋으니까. 널 좋아하니까.
그저. 널 좋아해서.
아마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몰라.
**
가끔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과 고된 일이 있을 때가 있는데,
나는 어리게도 다른 이의 고통이나 고된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찬열이가 힘들어 할때에도 나에게 억지로 웃어주었던 것은 그 이유일까?
나는 괜찮아. 괜히 걱정 하지마.
다정한 목소리로 내 머리 언저리를 톡톡 두드리며 했던 찬열이의 말.
나는 왜 그때는 설레어 하기만 했었는지.
힘들어 하는 모습은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내게도 봄바람이 부는구나. 실실 거리며 웃었던것 같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점점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짙어져 갈때마다
난 홀로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너와 함께할 하루하루를 꿈꿨다.
사랑이구나, 흰빛이 날 따스하게 나리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햇살같은 너의 미소가 점점 얕아지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 느낌에 취해 더욱더 너를 붙잡았다.
" ... ㅇㅇ야. "
" 응? "
" ......아니야, 그냥. "
유난히 힘이 없어보이던 너는 끝까지 날 배려하느라 한 마디 뱉지 않았다.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떨리던 이유는,
너도 나와 같이 떨리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떨리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왔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놓쳐버리고.
그리고. 또다시..
-" 야, ㅇㅇㅇ. "
" 어. "
-" 너 박찬열 어디 갔는지 알아? "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 버려져, 너는 나를 피해 도망을 치고.
" ..찬열이가 왜, 없어? "
-" 몰라, 집에 가보니까 짐이고 뭐고 없잖아.
겨울이 찾아오면, 그때. 이런 쪽지밖에 없는데? 미친놈이 그 나이먹고 가출이라도 했나. "
" .... "
[겨울이 찾아오면, 그때는 내가 널 온전히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네 앞에 서서 사랑을 말해줄 수 있을까. ]
아. 겨울이 찾아오면. 그때.
겨울이 되기 바로 직전. 술에 잔뜩 취한 찬열이가 울면서 뱉어왔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제서야 조금씩 느껴지는 온전한 힘듬이.
나를 위해 배려하듯 노래했던 읊기만 했던 사랑이.
그제서야 아. 겨울이 찾아와야 그제야 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한방울 쯤 흘렸다.
날 사랑하게 되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지금까지 내가 해온 배려없는 행동에 지쳤을 네 생각에.
한 방울 두 방울 조금씩 널 흘려 보내고.
" ...겨울에 봐. "
-"..뭐? "
" 찬열이. 어느 겨울이던. 언젠가 겨울에 돌아올거야. 그니까. "
나는 너를 기다리고.
겨울이 찾아오면 그때는.
나도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겨울이 찾아오면.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