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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을 함께 맞는 방법]
w.에덴
아침부터 적지않게 오던 비때문에 분명 지각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책상 옆 난간에 걸어둔 내 우산이 저 파란 우산일까
"……."
자리마저 난간 바로 옆인지라 우산쪽으로 눈이 힐끔힐끔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던 건 당연한 소리고. 저 우산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인 도경수가 사줬던 우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 남자친구이자 현재 내 지독한 짝사랑의 주인공, 도경수 말이다.
[첫 눈을 함께 맞는 방법]
w.에덴
경수와 나는 그 누구보다도 예쁘게, 남 부럽지 않게 꽤 오래 사귀었다. 그런 경수와 헤어진 것은 순전히 나의 권태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애와 연락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심지어는 마주치는 것 조차 뭐가 그리 귀찮고 싫었는지. 며칠간의 권태기를 못견디고 나는 그 당시에 도경수에게 느꼈던 감정을 읊으며 헤어지자 통보했고, 내 말에 그대로 굳어버려 아무런 말도 못하던 경수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 며칠간은 구속이 풀린 듯 여기저기 신나게 돌아다니기 일쑤였지만, 결과적으로 헤어진지 세 달이 지난 지금은,
"어? 저 우산 경수가 사줬던 거 아니야? 너네 설마,"
"…경수가 준 거는 맞는데, 니가 생각하는 건 아닌거 같다. 다 가져가고 저거밖에 안남아서."
"에이, 난 또 뭐라고. 너네 다시 붙은줄. 그만 좀 쳐다봐, 우산 닳겠다."
지독한 짝사랑 중이다.
[첫 눈을 함께 맞는 방법]
w.에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비는 곧 눈으로 바뀌었고, 추워진 날씨만큼 눈발도 세져 조금씩 흩날리던 눈이 점차 폭설로 변해갔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오는 눈 때문에 대중교통이 하나 둘씩 운행을 중단해버리자 결국 우리학교는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취소한 채 학생들을 귀가시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신나하며 가방을 대충 꾸려 하나 둘씩 교실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서 가만히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을 뿐이었다. 학교에서 수학선생님으로 근무중인 삼촌이 수행평가 채점을 도와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사실 강요에 가까웠다. 안도와주면 엄마한테 저번 시험 성적을 말해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저번 시험기간에는 경수생각에 도무지 펜이 잡히질 않았고, 시험은 보기좋게 망쳐버렸다. 난 괜한 노파심에 엄마에게 성적표가 나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삼촌이 지금 그걸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괜히 입막음 한답시고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삼촌 미워.
"OOO! 안가?"
"먼저 가. 나 삼촌 심부름 있다고 말했잖아."
"아, 그 1학년 수행 채점?"
"응. 우리학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해야돼. 점수 완전 짜게 줄거야."
툴툴거리는 내 모습에 작게 웃어보인 이지은이 'OOO, 힘쇼!' 한마디를 남긴 채 뒷문으로 쏙 빠져나갔다. 으…, 얄미워. 뒷문을 살짝 노려보다 슬슬 채점을 하기 위해 창가쪽 내 자리로 발걸음을 돌리자, 아까 오던 폭설과는 달리 예쁘게 내리는 함박눈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우와…."
올해의 첫 눈인데다 이렇게 예쁘게 내리기까지하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올해 첫 눈은 꼭 경수랑 맞기로 했었는데. 오늘따라 경수를 떠올리게 하는 요인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경수야, 보고싶어.
[첫 눈을 함께 맞는 방법]
w.에덴
"막 채점한 거 아니지?"
"물론이지! 삼촌이 다시 보던지. 나 이제 가도 돼?"
"잠시만, 용돈줄게. 수고했어, OO아."
"고마워, 삼촌! 나 먼저 갈게!"
기대조차 않았던 보상에 즐거움은 배가 되어 텅 빈 복도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에 이르렀다. 두시간 동안의 내 노동에 대한 답례는 생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하지만 내 몸이 막 교실에 들어섰을 때, 난 내 자신을 자책해야만 했다. 난간에 기대어 내 우산을 만지작대고있던 도경수와
"……."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에. 헤어진 이후로 말 한번 제대로 섞은 적이 없는데 어쩌자고 지금 저 애와 마주하고 있는건지. 쟤가 왜 아직 학교에, 그것도 우리 반에 있는거지? 난 왜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서 이런 날 학교에서 도경수를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걸까. 왜, 왜…. 이 상황이 지속되었다간 둘 중 하나가 먼저 입을 열어버릴 것 같아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내 자리로 다가갔다. 사실 두려웠다. 경수가 그 날 큰 상처를 받았을까봐. 나를 많이…, 싫어하고 있을까봐. 무얼 챙겨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것들을 모조리 가방으로 쓸어담고 다시 뒷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우산."
"……."
"안가져가?"
도경수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지만. …목소리 하나에도 이렇게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조용한 상태에서 그 애에게까지 전달될까봐 괜히 눈을 감고 작게 숨을 고르었다.
"이 우산 내가 줬던거지."
"…나 빨리 가야 돼. 우산 줘."
"예전에 했던 우리 약속 아직 기억하고 있으면, 그러면 줄게."
…잊었을리가 없잖아. 몇 달만에 처음 나누는 대화에서 도경수는, 전과같은 동그란 얼굴으로, 동그린 입으로, 이전보다 짙에진 목소리로 꽤나 장난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게 내 잘못으로 끝이 난 우리 관계에서 그 때의 약속을 내 입으로 말하기란 참으로 뻘쭘한 일이었다.
"올해 첫 눈은 꼭 우리 둘이서 맞기로 했잖아."
"……."
"마침 우리 둘 뿐이고, 우신도 하나고, 내리는 눈도 예쁘고,"
"……."
"너도 예쁘고."
가자. 머뭇대던 나 대신 줄줄 읊은 경수가 내 손목을 잡고 학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본 눈은 더더욱 예뻣고 우린 작은 우산 아래에서 눈을 피하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한걸음걸음을 뗄때마다 훅 다가오는 도경수 특유의 체취는 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만들었고, 때문에 내가 숨죽이며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로 걸어가다 앞의 사람과 부딪힐 뻔 하자 날 세게 잡아당긴 도경수가 그제야 입을 떼었다.
"내가 항상 조심하라고 했잖아. 여전하네, 너는"
"…왜 이래,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너 아직도 나 좋아한다며? 이지은이 말해주던데."
으아, 이지은! 민망함에 말을 더듬으며 아니라고 호통치자 얕게 웃은 도경수가 말을 이었다.
"난 좋아하는데."
"……."
"헤어지기 전에도, 후에도, 지금도."
"…도경 …,"
"잡고싶었는데 니가 나 진짜 싫어해서 그런줄알고 못그랬어. 그래도 이지은이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가 이렇게 첫 눈도 같이 맞고. 뭐, 기다리는 두시간동안 지루하긴 했지만."
"…미안해, 나는 니가, 나 싫,어 하는, 줄,"
"어어, 울라고 한 말이 아닌데. 울지마. 울지마, OO아."
난 미안한 마음에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고 경수는 우산을 떨어뜨린 채 날 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
내 귓가에 작게 중얼거리며 날 더욱 꼭 끌어안아오는 경수의 품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어느 순간보다도 더 달콤했던 것 같다. 작은 우산 아래에서 젖지않고 보송보송한 나와는 달리 한쪽 팔에 눈이 가득 묻어버린 경수의 모습까지도, 나를 웃음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도 많이 좋아해, 경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