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인사하고, 뛰려 발을 내딛던 찰나,
두 눈이 감긴 것 같다.
따뜻하게, 또 포근하게.
드디어 잠에서 깬 걸까. 등 밑으로 느껴지는 폭신함과, 향기로운 냄새. 아.. 배고프다.
"일어났어?"
"... 김종인?"
"어, 갑자기 쓰러지길래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괜찮아?"
그럼 아직도 깬 게 아니라고? 시벌탱?
"야 미친, 니가 아까 거, 거기 도착하면 끝나는 거라매!"
"그래서 데리고 왔잖아. 여기로."
아까 그 성이 여기고. 김종인 집이라고? 아 뭔 소리야.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뭐 이렇게 복잡해. 이거 깨긴 하는 거냐, 돌겠네."
내 머리를 헤집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종인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큰 책장 때문에 서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마른 꽃을 채운 병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보는 건데도 적응 안 되는 하얀 머리칼의 김종인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신기하다."
"어, 만지진 말고."
아, 만지면 안 되는구나- 김종인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좋다, 꽃 냄새.
"차 마시고 다시 자. 밖엔 어두워."
"헐, 얼마나 잔거지. 아니, 꿈을 얼마나 꾸고 있는 거야."
종인이가 건네는 차에는 보라색 꽃이 띄워져 있었다.
꿈 되게 오묘하네, 김종인이랑 꽃이라니. 하나도 안 어울린다. 으으… 그래, 이거 딱 한 잔 원샷하고! 깨는 거야! 정신 차리자!
따뜻한 차를 한숨에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꿈 한번 더럽게 기네.
*
"야, 어떡하냐.. 진짜 아픈거 아니야?"
"김종인 니가 뭐 먹였다가 이렇게 됐다매. 아 망할."
"그거 나도 같이 마셨거든? 근데 나는 멀쩡하잖아!"
"어쨌든 너랑 나갔다가 그렇게 된거라매!!!!!"
"거기 둘 다 조용히 좀 해. 애 자잖아."
머리가 띵하니 아파온다. 꼭, 뭐랄까. 밤새 술 퍼마시고 떡되서 일어나면 이런 기분이려나.
"아... 머리야."
잠깐, ...드디어 깬거야????? 그런거야?????? 슬쩍 실눈을 떴더니,
"솔체야, 괜찮아?"
"...?"
"오, 준면이 형 멋진 척 하는 거 봐라."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김준면이 여기 또 있다니. 핳하ㅏ하ㅏ하ㅎㅎ
망했다. 존나 무한반복???? 뫼비우스의 띠 뭐 그런건가 하하 망할. 침착하자, 침착해.
"ㅈ, 즈기여..?"
"정신 깼어? 괜찮아?"
"아, 네 뭐... 저 근데 김종인,"
내 위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사람들 사이로 힐끔 고개를 내미는 김종인 머리털마저, 역시나 아직 허옇게 물들어 있었다.
존나 그거 마시면 꿈 깨는거처럼 말하더니 저... 저!!!!!!!!!!
게다가 방금 나한테 괜찮냐던 사람은 연예인이고?
망할, 진짜 꿈이구나. 아니 꿈은 맞는거야?
"니새끼가 아까 그거 마시면 잠 깬다며. 구라냐?"
"와, 미친. 김종인 니가 한 거 맞네!"
"아니라고!!!! 야, 니가 어제 춥다 해서 준거지."
"김종인 조용히 해봐. 그리고 너 정신 덜 깬 것 같다. 좀 더 누워있자."
"아니, 저 괜찮아요. 근데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내가 말을 내뱉자마자 대충 네다섯명 정도 남자들의 눈이 모두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뭐, 뭐야 부담스럽게.
"솔체 너 왜 그래? 많이 안좋아?"
"솔체?"
뭐냐는 듯이 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긴 꿈이라고 말할거야. 시발! 나갈꺼야! 엄마 보고 싶다고!
"솔체가 아니고, 제 이름은…"
"무슨 소리야, 꿈 꿨어?"
"그니까 내 이름은..!"
내 이름을 말하려는 차에 계속 숨이 턱턱 막힌다. 아!!! 답답해! 그니까, 내 이름이 뭐냐면.
"… 뭐더라?"
시발 뭐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다 있냐.. 내 이름을..!! 왜 말을 못해!!!!!!!!
미친 정신차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나는.
우리 엄마 딸이고.
민아랑 영화 보고 밥 먹고.
학교 얘기하면서 수다 떨다가
그러고 집에 오다가 잠에 든 나는!!!!
"... 어떡해."
내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뭐더라. 존나 뭐더라. 아니 그거 뭐더라.
어떡해, 나 집에 못 가는거야?
*
"야, 솔체 좀 이상하지 않냐?'
그러니까요. 네 남자가 솔체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닫고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명 엊저녁 소나기를 맞으며 떨고있는 솔체를 종인이 집으로 데려갔고. 추워하길래 따뜻한 차도 같이 한 잔 마시고. 밥도 먹고. 단지 그뿐이었는데. 종인은 자신을 향한 의심쩍어하는 눈빛들이 억울하기만 하다.
"그렇게 보지 마요. 진짜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알아, 그냥 혹시나 해서 한 소리야."
그럼 대체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저만치나 변할 수 있는 걸까. 네 남자가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솔체가 많이 아프구나. 그래서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구나.
*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쳐 버렸다.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린다. 미쳤어, 어떻게 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날 수 있지.
한참을 어두운 이불 속에서 고민하다 나도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거, 그런거야. 어디서 봤다. 꿈속에서 내가 나임을 밝히거나, 이 상황은 꿈이라는걸 입 밖으로 내뱉으면 모든 게 막 괴물로 변해서.. 뭐 어쨌든 그런 내용. 이것도 그런 맥락의 꿈인가.
이제야 납득이 가네. 그럼 이 꿈에서 나는 그 소치인가 칫솔인가 뭐시기. 그거인거고. 저 사람들한텐 이게 현실이니까, 꿈이라고 말하면 날 죽이려 들거야. 시발 무섭다....
근데. 내가 매일 또라이라고 불리더니 진짜 또라이가 된 건지. 왠지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꿈 안에서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니까. 어떻게 해도 깨버리면 끝이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제 본 그 영화처럼 존나 멋진 인생을 살 거다. 아픈 나를 걱정하는 잘생긴 남자들 사이에서! 나도 공주 대접 한번 받아보자!!! 그래, 좋았어!!! 인생은 드라마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막나가버려.
*
솔체가 방문을 열고 뻘쭘한 표정으로 나오자, 남자들이 놀라지 않은 척하는 놀란 얼굴로 반겨주었다. 좀 괜찮아? 그러자 솔체가 어색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으며 빈 의자에 앉는다. 괜찮아요-
"사실 할 말도 있었는데 잘 됐다."
".. 뭔데요?"
가장 중간자리에 앉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너무 놀라지는 말아.
"곧 의사가 올 거거든. 우리가 보기엔 니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솔직히,"
옆에서 답답하다는 듯 종인이 한마디 더 하려던 틈을 솔체가 차고 들어가 메꿔버린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기억이 잘 안나서.."
그제야 남자들의 표정이 한시름 풀리는 듯한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아니에요, 저 밖에 잠깐 걸을래요. 누워만 있으니까 좀 답답해서."
*
나오자마자 크게 한번 한숨을 내셨다.워, 십년감수했네. 들킨 건 아니겠지? 날 아프다 생각하는 것 같길래, 그걸 이용해서 기억 상실증 컨셉으로 나가려고 마음 먹었다.
스릴 넘치기는 하는데, 아 그냥 학교나 다시 가서 경수선배 보고 싶다.. 내일 만나기로 했었는데, 아오.
물론 단둘이 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인데. 경수 선배 사복...
내 싸랑!!! 내 싸람!!!!!
존잘!! 경수!! 선배!!!!!!!!!!!!!!!
"솔체야!"
"으우어어어ㅓ어ㅓ!!"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소리 내어 짧게 웃고는 왜 그렇게 놀래냐며 묻길래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시벌 내가 안놀라게 생겼냐???????
경수 선배가 왜 여기 있는거야. 꿈이라서 내가 막 생각하면 나오는건가?
괜히 찔리는 마음을 또 한번 가라앉히곤 어색하게 웃었다. 여긴 꿈이야. 헷갈리지 말자.
"아, 혹시 경수오.. 빠...?"
"엇!"
설마, 여기서의 이름은 다른건가. 벌써부터 실수한 것 같아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내 이름은 기억하는구나, 다행이다!"
아, 간 떨어지겠네.
"당연히 기억하죠."
우리 경수 선밴데 잊을 리가 있나요ㅠㅠ
선배를 오빠라고 불러도 된다니. 여기서 그냥 깨버려도 난 한이 없어요 오빠.
"몸도 안좋은데, 혼자 보낼 수가 있어야지."
살짝 웃으며 내게 눈을 맞춰주는 선배의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막 마음을 읽히는건 아니겠지?
*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눈칫껏 이어가며 걸었다. 경수 선배랑 이렇게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날 부르는 이름이 영 거슬린다.
솔체, 이름도 되게 이상하게 지었네. 여기는 안 이상한게 하나도 없다. 선배도 종인이도. 그리고 가을인듯한 이곳의 모습과 나를 포함한 모두의 차림새마저도.
설마 나도 여기선 여자가 아닌건가하는 생각까지 해버렸다가 아직 무사히 남아있는 내 작은 슴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빠, 근데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요."
"응, 뭐가?"
"저, 이름이요. 무슨 뜻이 있는 거예요?"
"정말, 다 잊어버린 거야?"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경수 선배를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선배랑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니까 마냥 좋기도 하고.
"여자들 이름은 다 꽃 이름이야. 네 이름도 그렇고."
"솔체꽃..? 그게 꽃 이름이에요?"
"그래. 그게 네 이름이야."
그렇게 말해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경수 선배의 손길이 어색하고 낯간지럽기만 하다. 웃음이 입 밖으로 실실 새어 나오려는걸 꾹 참고 그냥 고개를 숙여버렸다. 학교에서의 경수 선배와 달리, 마냥 따스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내가 그려오던 순간과 너무 똑같아서.
그래, 솔직히 설렌다.
~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품에 화장품을 가득 안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다지 두꺼운 화장이 아니더라도, 티도 안 나는 화장이어도 뭐라도 쳐발라야했다. 왜냐면 다음 시간은 동아리니까. 그것도 오랜만에 선배들도 오는 시간이니까. 그래!! 도경수 선배를 보는!!!!!!!! 씬나는 날이니까!!!!!!!!!!! 급하게 친구들 화장품을 빌린 거라 걱정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그대로 자고만 있었으면 자습일 줄 알고 맨얼굴로 온 달덩어리 같은 얼굴로 마주쳐야 했을 테니.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한번 민아를 붙잡고 물었다. '야, 나 진짜 괜찮아? 내 입에 고춧가루 안낌?? 입 냄새는??'
입을 쩍 벌리고 깊게 숨을 내뱉자 민아는 아무 말도 안하고 굳어버렸다.
"왜, 시.. 심하냐?"
민아가 급하게 나를 교실로 끌고 들어가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 선배가 지나가면서 너 보고 웃었다고'
'이번 유씨씨는 조원들이랑 개별적으로 촬영해서 제출하면 된다. 각자 조 자리로 이동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년 만에 처음으로 경수 선배와 같은 조가 됐다. 그러면 뭐하냐. 아까 경수선배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는 얘기때문에 차마 얼굴을 못 보겠어서 쭈구리처럼 종이만 보고 있었는데 벌써 종이 쳐버렸다. 얼마만에 본 얼굴인데, 이렇게 그냥 끝이라니.. 내 인생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민아와 뒷문으로 향했다. 오늘은 말도 못걸었다, 망했어. 게다가 주말에 나와야 된다는 둥 민아에게 줄줄 쏟아내는데, 뒤에서 어깨를 붙잡혔다.
ㅎㅎㅎㅎ.... 학주...? 나 오늘 화장...? 싹싹 빌 생각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진짜 운 꽝이다.
"그, 아까 말 못해서."
"…네?"
선배의 뜻밖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지려다,
"토요일에 열시까지 나오래."
내가 뭘 기대한 거야.
"아, 그리고."
"…?"
"주말에도 화장하고 올거야? 오늘 예쁘더라."
오늘은 진짜 최고의 날이다.
.
.
.
*
경수 선배에게 대충 이 세계의 상황을 설명 듣고 나니 조금 전 상황들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완벽하게 내가 받아들이진 못하겠지만.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일단 이름부터가 꽃 이름이라니... 경수 선배 앞이 아니었다면 타들어가는 오징어 흉내라도 냈을 듯한 설정이다. 개오글오글거려. 민아가 들었으면 분명 나더러 할미꽃이나 하라는 둥 지랄을 했을테지. 아, 차라리 남장여자를 시켜라.
더 놀라운 건, 나는 저 남정네들 집에서 돌아가며 지내고 있다 했다.
그 말을 듣고 엄청 놀라는 나를 보곤, 선배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우린 원래 오래도록 같이 살아왔고 당연한 거라며 나를 안심 시키듯 말했다. 솔직히 그 말에 심쿵하며 오!!!! 씨빠!!!!!!!! 선배랑 같은 집이라니!!!!!! 존나 좋다!!!!!!!!!!!!!!!!!! 라는 생각 뿐이었는데 갑자기 겁이 난다. 같이 살다시피 지낸다는 거면, 내 어설픈 모습이 티나는건 한둘이 아닐텐데. 이 꿈이 악몽으로 변해버리면 어떡하지.
"어, 갔다 왔어?"
"다른 애들은요?"
"의사 데리러."
집에 오니 아까 진지하게 말하던 남자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유명한 회사 로고도 박혀있는, 내가 아는 그 휴대폰이었다. 단지 폴더폰일 뿐이지.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거 내 벨소린데.
1월 12일 탄생화 : 향기알리섬 (Sweet alyssum)
꽃말 : 뛰어난 아름다움
재미로 보는 꽃점 : 당신은 자기 내부의 우아함을 자각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기품 있는 인상을 줍니다.
반갑습니다.
지적과 칭찬 댓글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