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 후로, 나는 밤만 되면 악몽을 꾸었다. 매번 같은 꿈이었다. 나는 분명 꽃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면 삼킬듯한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아 있었다. 마치 내 운명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밟고 지나온 꽃길은 검은 재가 되어 남을 뿐이었다. 같은 꿈을 계속 꾸면서, 나는 언젠가부터 꿈 속에서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나는, 발 닿는 곳마다 재가 될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걸었다.
"하..하아.."
"왜그래, 또 꿈 꿨어?"
고개를 끄덕이자 동혁이가 몸을 돌려 팔베개를 해 온다. 이제는 익숙한 동혁이의 향기. 어떤 풀 내음. 밤 공기. 향들이 뒤섞인다. 나는 그제서야 숨을 고른다.
"매번 이렇게 남의 집 방을 빌려 자려니 불편하지, 공주야. 그래서 자꾸 꿈을 꾸나보다."
"괜찮아. 늘 나보다 네가 더 고생인걸..."
동혁이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 사이로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낮에는 내내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방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하루를 지냈다. 처음엔 같은 방을 쓴다고 기겁을 했지만, 이제는 동혁이가 옆에 없으면 잠이 오지를 않는다.
"너랑 글공부나 하다 정분이 나서 혼인하는 미래를 꿈꿨는데, 높으신 공주님이라 이제는 차마 꿈도 꿀 수가 없네."
"난 공주같은 건 아무렴 상관없는데. 이렇게 너랑 있는게 더 좋아."
"...정말이야?"
"응. 정말."
"시와에 닿으면, 거기서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나와 같이 살자. 내가 공주마마 하나도 아쉽지 않게 해줄게."
"나 홍운을 떠나면...운명같은 거 벗어날 수 있는걸까?"
"...그런 거 믿지 말자. 홍운에는 이제 신녀도 없는걸.."
나를 토닥이는 동혁이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아버지, 여울이를 뒤로 하고도 내 옆의 동혁이가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다.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 욕심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계속 함께하고 싶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날 며칠을 계속해서 걸었다. 동혁이는 내가 힘들다고 투정하면 업어도 주고, 밤이 춥다하면 안아도 주었다.
"오늘 저녁쯤이면 경계에 닿을거야. 조금만 참아, 알았지?"
내게 다정스레 걱정어린 말을 건네오는 동혁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고 걸었지만 우리는 전처럼 웃으며 담소를 나누지는 않았다. 시와에 가까워질수록 정체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대상이 없는 불안감은 곧 침묵으로 이어졌다.
해가 저물자 날이 급격히 추워졌다.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옷을 아무리 겹겹이 입어도 바람은 빈 곳을 파고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시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우리는 눈보라를 만났다.
참 운도 없다. 살겠다고 남의 나라까지 왔는데, 생전 처음 밟는 땅에서 생을 마감하겠구나. 바람과 눈이 몰아치며 자기들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 뿐이었다. 동혁이와 나는 서로를 꼭 안은채 눈보라 가운데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방 안에 이렇게 푸른 색이 많이 보이는 걸 보면, 시와의 궁 안인가. 홍운의 왕족은 붉은 색을 쓰니까.
"정신이 들었군. 왕께 소식을 알려라."
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흰 옷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보인다. 의원인가? 몸을 일으키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있지 그래. 몸이 아직 얼어있을거야. 그대로 눈에 쌓여 동사할 뻔 한걸 발견해 데리고 왔으니까 말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자 동혁이가 보이질 않는다. 어디 간거지? 분명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는데.
동혁이는 어떻게 된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진찰이 끝났으면 이제 나가 봐도 돼.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아직 신분도 밝혀지지 않은 계집과 무슨.."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알아. 나가 봐."
앳된 얼굴을 하고 남색 옷을 갖춰입은 남자는-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시와의 왕이 분명했다. 지위에 걸맞지 않게 자유분방한 언행이었다.
여자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자리를 비켰다.
넓은 방에는 나와 낯선 남자, 이렇게 둘만 남았다.
"너, 정체가 뭐야?"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온통 동혁이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
"나와 함께 있던 남자애는 어찌했어?"
"뭐? 하, 너 진짜 웃기는 애로구나. 기껏 살려줬더니, 남의 나라 궁에서, 나라의 왕에게 하대라니."
"나는 홍운의 백성인데, 시와의 왕에게 말을 높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홍운을 사랑하는 네가 남의 나라까지는 왜 도망쳐 왔는데?"
그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고 있었다. 나는 한심한 말장난이나 할 처지가 못되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나는 어떤 불안감에 자꾸만 가시를 세웠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너 누구야?"
"..."
"내가 알기론 홍운 선왕의 슬하에는 아들 하나 뿐이거든. 근데 왜 너한테서 이런게 나온걸까?"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상자를 열어젖히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건네 주신 붉은 옷. 홍운 왕족의 상징.
나는 뭐라 변명을 해야 하는걸까.
"아무리 봐도 여자 옷인데, 왕에겐 자식이 하나 뿐이었단 말이지. 뭐, 걱정은 하지마. 이 옷의 존재는 나밖에 모르니까."
그는 여전히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야?"
"그 애, 어떻게 했어?"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내 가까이로 와 앉았다.
"눈이 예쁘네."
"어떻게 했냐고 물었잖아."
"...죽였는데."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죽여? 누구를?
하, 이런게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건가?
고작 며칠 새 나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힘들다, 충분히 괴롭다 생각하면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이건 아니잖아. 나는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없어.
나는 울 힘도 없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울 수 없었다. 울어버리면 동혁이가 죽었다고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서. 아닌데, 그럴리가 없는데. 분명 살아있을텐데.
"당분간 여기서 지내. 돌아다니거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마. 궁 안에선 너같이 낯선 사람이 보이면 묻지도 않고 죽여버릴테니까."
"...나를 왜 살려뒀어?"
"뭐?"
"그 애는 그렇게 죽여놓고, 나는 왜 살려뒀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
"나도 몰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했어."
눈물이 뚝뚝 흘렀다. 고작 17년 남짓한 삶을 살면서 내게 허락된 단 한 번의, 짧은 봄이었다. 꽃내음이 코에 닿기도 전에 봄은 지나버렸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는 한참동안이나 우는 나를 지켜보았다.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여자애를 궁에 데려다 놓으신 겁니까?"
여자의 건강을 살펴 준 의원이 영 탐탁잖다는 투로 물어왔다. 이 궁에서 더 높은 사람이 없는 한빈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직언을 할 사람은 눈 앞에 있는 이 의원뿐이었다.
"맨날 그런 식이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제멋대로 구실 겁니까."
"뭘. 죽어가는 사람에게 동정을 느껴 살려둔 것이 그리 잘못이야?"
"그 소년에게도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지 그러셨어요."
"그 얘긴 하지마. 안그래도 그 여자가 도통 그 남자 이름만 불러대서 미칠 지경이니까."
기껏 살려줬더니, 그 여자애는 찾아갈 때마다 그 남자 얘기만 했다. 진짜 죽였느냐고, 동혁이는 어디 있느냐고. 살려줘서 감사하다는 말 같은건 바라지도 않았다. 한빈을 속상하게 한 것은 굉장히 사소한 것이었다. 내가 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돌하게 반말을 하면서, 이름 한 번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다른 이름만 불러댔다.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궁에 들였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처신이었다.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신하들에게 혼이 날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몸만 낫게 해 주고 아무데나 내보내 살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주본 그녀의 눈빛이 한빈을 욕심나게 만들었다.
한빈은 다 가진채로 태어났다. 무엇을 욕심낼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라도 가지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한빈은 그런 눈을 평생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회색 빛깔의 두 눈 안에는 달도, 별도 담겨 있었다.
좀처럼 시선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울면 밤하늘이 뚝뚝 떨어지는듯 했다. 그 모습조차 예뻐서 한빈은 우는 그녀를 달랠 수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욕심이 생겼다.
그녀를 옆에 두고 보고 싶었다. 홍운의 공주인지, 그저 도망자인지,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그 여자를 바라보면, 심장이 뛰었다. 한빈은 낯선 이 감정을 삭히기 위해 매일 눈길을 걸었다.
눈을 뚫고 빨간 동백꽃이 만개해 있었다. 시린 아름다움이 그녀를 닮은 것만 같아 한빈은 한참이나 꽃을 마주보았다.
암호닉
김밥빈 님
김까닥 님
♥
+)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브금을 바꿔봤어여!!!!
빠른듯 느린듯 전개가 되어가고 있네요
대충 등장은 끝마쳤지만 아직 본격적인 관계도?가 나타나려면
몇 편 더 걸릴듯 싶네요ㅠㅠ
지루해도 참아주세여 흑흑
맨날 기다려달라 이해해달라 참아달라 부탁만 해서 죄송해요
못난 저를 매우 쳐주세요..
그리고 제 지난 글에 조용히 추천만 누르고 도망간 독자님들 누구신가요!!!
저 설렜자나여..저같은..망글작가 나부랭이에게 추천을ㅠㅠㅠ주고 가시다니
어쨌든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추천주시는 분들,
다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해여 헿
오늘은 업로드가 좀 늦었네요
모두 굿밤되시구,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라구여!
주말 중에도 글이 쪄지면 금방금방 데리고 올게요
그럼 정말 안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