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땐 무리안하는 게 좋아."
"..."
"바보네, 우리반 피구여왕은."
피구여왕- 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평소에 피구를 즐겨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해서 순간 가슴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너무 크게 떨어져서 그게 김지원이 들었을까봐 헛된 상상을 해버렸고, 아이스크림과 선풍기로 인한 머리아픔이 잠시나마 김지원의 싯푸름과, 새빨간 말들이 어우러져서 모든 것을 짧막하게 잊게 만드는 그의 재주가 심통찮았다. 입술을 꾹꾹 누르면서 눈가를 비비적 거리자 그가 내 손을 떼어냈다. 너, 가만보니까 못된 버릇있더라. 김지원은 외국에서 살다왔기 때문에 나쁜 욕이나 말들은 하지않았다. 같은 반인 나도 본 적은 없었으니까. 짓궂게 놀리는 건 봤어도 나쁜 어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아서 정말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많은 여학생들은 그런 모습에 김지원에 대해 더욱 꺄악꺄악 거렸고 남학생들 또한 김지원이 순수해보인다며 나름의 만족스러움을 얼굴에 비추곤 했다. 못된 버릇. 김지원의 단어선택이 꽤나 하얀빛의 순수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만 같아 바람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김지원은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입을 천천히 열었다.
너 무의식적으로 입술 꾹꾹 누르거나, 자꾸 뜯는거 같은데 그러지마라. 그는 오빠같은 말을 하며 관리아닌 관리를 해대는 것이였다. 니가 뭔데?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에 내가 더 놀래버렸다. 입술을 꾹꾹 누르는 버릇은 나도 부모님께 많이 지적받은 것이였고, 입술을 뜯는 버릇은 고등학교 올라와서 생겨버린 버릇이였다. 입술 보호제를 갖고다니긴 하지만 자꾸 어디론가 굴러가버리는 탓에 매번 사기도 귀찮았다. 김지원은 내 입술을 가르키며 덧붙였다. 입술 보호제라도 사, 입술 꾹꾹 누르면 턱 안 예뻐진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뭐라도 꺼내려는 건가? 이만 가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김지원의 손바닥이 내 눈 앞에서 펴졌다. 그의 남자다운 넓고 큰 손바닥 안에는 동그란 마카롱 크기의 통이 들려있었는데, 내가 그저 멍 하게 쳐다보고있자 내 손을 직접 들어서 직접 쥐어주기까지 하는 것이였다. 뭐야? 내 질문에 김지원이 조금 빠른 속도로 말을 건넸다. 립밤이야, 내가 직접 만든건데 그거라도 바르고 있어.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그러자 김지원의 표정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고맙다고도 말을 하기도 모자를판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니."
"아니, 나 진짜 괜찮아. 이런ㄱ,"
"입술 다 나을때까지는 너가 들고다녀. 난 집에 또 있으니까."
진짜, 멍청이 아냐. 김지원은 반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대체 아프다는 걸 왜 그렇게 티를 안내는지 모를 노릇이였다. 아마 그녀가 기침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장난을 걸며 그녀의 심기를 건들였을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지원은 오소소, 몸을 떨었다. 그녀를 굳이 화내게 하고 싶지않았다. 워낙 신비로운 분위기에, 말도 안 걸게 생겨놓고서는 이상하게 만인의 연인같은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그녀의 분위기가 딱히 싫진 않았지만 자신마저도 끌려가는 것만같아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생각이였다. 그는 그녀가 신경쓰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녀의 마른기침이 튀어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앞에 선 것이였으니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던간, 그녀를 그렇게 자세히 앞에서 본 것도 처음이였고 오랫동안 말을 섞은것도 처음이였다. 생각보다 꽤 맑은 행동을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자칫하면 넘어갈뻔했다고 숨을 조용히 고르는 그의 행동이 어딘가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사람 다 걱정하게 해놓고는 막 안심시키려는 모습, 진짜 꼴불견이다. 김지원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부스스 흐트러놓았다. 많이 아픈걸까, 그 애.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체육시간에 상당히 지체되었음에도 딱히 지적을 받지 않았다.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남학생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은근슬쩍 구석을 보니 더운 걸 지지리도 싫어하는 기집애들은 온갖 내숭을 떨며 김지원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김지원, 그도 사람이기에 남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느끼곤했다. 그닥 반갑지 않는 눈빛으로 그는 왠만한 여자아이들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신경쓰거나 더 잘해주진 않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귀찮은 그 짓에 그는 여자아이들의 선물공세라던지 그런 것은 싫어했다. 겉으로는 고맙다며 웃지만 속은 그게 아니란 걸 그 멍청한 애들은 알기나 할까. 김지원은 혀를 짧게 차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자꾸 생각에서 맴돌았다. 그녀의 친구조차도 김지원을 동경하며 졸졸 따라오는 걸 몇 번 눈치챘지만 슬쩍 눈감아주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김지원에 대해 그저 같은 반 친구라고 느끼는 듯 했다. 따라오지도 않고, 흔하디 흔한 선물공세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관심있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아니였다. 뭔가 다 파헤쳐 놓는다는 그 눈빛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녀가 마음에 차오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멍청이라니까. 김지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뛰고있는 남자아이들 사이에 파묻혀갔다. 벌써 골을 먹고 있는 자신의 편에 우쒸, 하고 장난스러운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곧 김지원이 골의 선두권을 잡으면서 패가 뒤집어졌다는 건 안 비밀.
"야, 야. 일어나봐."
누군가 내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깨웠다. 겨우 잠에 들었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더위에 지치고, 아픔에 지쳐서 몸이 노곤노곤해진 것이 틀림없다. 머리를 부여잡고 슬쩍 몸을 일으키니 김지원이 눈 앞에 보였다. 김지원은 빼곰 눈만을 보인 채 책상에 얼굴의 반쯤을 가려놓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으로 내려다본 셈이 되었고, 김지원은 나를 올려다본 셈이 되었다. 김지원은 일어났냐며 그 좋아죽는 눈웃음을 쳐대는 것이였다. 아찔해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미쳤나.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의 초중반대를 지나고 있었다. 밥, 안먹어? 잠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져서 켁켁 대며 목의 가래를 풀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목에서 피가 나올 것같다고 누군가 장난으로 말을 건네면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의향도 있을만큼. 김지원은 내 기침을 빤히 쳐다보다가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얇은 종이였다. 기침을 하는 입을 손으로 겨우 틀어막고 건네받으니, 위 쪽에 정갈한 글씨로 '조퇴증'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뻔하디 뻔한 질문이였지만 김지원에게 물었다. 그는 조퇴증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르켰다.
조퇴증이야, 집 가. 김지원이 그렇게 말하며 내 가방을 책상 위에 들어올렸다. 와, 기집애 가방이 왜 이리 무겁냐? 그는 투덜투덜 거리며 내 필통을 비롯한 물건들을 가방에 넣기 시작하는 것이였다. 뭔가 빠르게 진행되는 기분에 그를 저지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래, 내가 챙길께. 갑자기 치고들어오는 배려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김지원에게는 굳이 뒤의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가빠져오는 숨소리가 내심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김지원의 손에서 내 가방을 건네받고 조심스럽게 책을 챙겨넣었다. 손에 힘이 풀려버려서 몇 번 삐끗 댈 때마다 김지원의 표정도 같이 뒤틀렸다. 아오, 내가 챙겨준다니까? 야, 이건 내 물건이야. 너가 안 챙겨줘도 내가 챙긴다니까? 너 또 빼먹은거 있으면 어쩔려고, 학교 또 올꺼야? 무슨 말이 그렇게 돼? 조퇴증 끊어줘서 고마운데, 그 말은 좀 저주뺨친다? 하긴, 학교 다시 오는 것만큼 지지리 복 없는 것도 없지. 김지원은 금방 수긍하는 웃긴 면도 있었다. 어이가 없는건지, 그의 그런 모습이 낯설어서 재밌는건지 모를 웃음이 입가에서 허, 하고 터지자 김지원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너희 집은 어딘데? 김지원이 내게 귀찮을 정도로 물어왔다. 사실 귀찮은 건 절대 아니지만, 누군가 보면 심하게 들이대고 있구나를 느낄정도? 나는 굳이 느끼고 있진 않았다. 그저 옆에서 조잘대는 김지원이 신기해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랄까. 햇빛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땀을 잘 흘리지않는 나는 습관적으로 볼을 두들겼다. 잠깐 만졌을 뿐인데 화끈거리는 느낌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황급하게 떼어냈다. 김지원은 내 옆에서 만류했던 내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붕붕 휘두르면서 같이 걷고있었다. 김지원은 자기혼자 웃다가, 외국에 있을 때 배운 개그를 하면서 또 자기혼자 큭큭 웃어댔다. 나는 그의 모습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보며 같이 걸어나갔다. 그거, 진짜 외국에 있는 개그야? 내 질문에 김지원이 끄덕였다. 못 믿기겠지만 진짜야. 이거 그쪽언어로 들으면 진짜 웃기거든. 언어유희 최고야, 진짜. 김지원은 엄지를 척 올리며 입가를 닦았다. 아마도 너무 웃어대서 침이 튀어나온 거겠지. 동화속에서 나올 것 같은 매너를 지니고있는 김지원에게서도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는 것 같다.
"집에 거의 다와가네."
"..."
"지금이... 1시 5분쯤 됐다."
김지원은 중얼중얼거리며 우리 집 앞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깨에 짊어진 내 가방이 따스하게 햇빛을 받아서인지 빛바래져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눈을 비비적 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 뭐더라. 작은 카메라로 찍은 즉석에서 나온 사진. 포... 포, 뭐였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에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허공에 두자, 김지원이 내 볼을 주욱 잡아 당겼다. ㅁ, 뭐야? 김지원, 이거 안놔? 갑자기 치솟아올라가버린 내 목소리가 낯설어서 큼큼, 하고 헛 기침을 했다. 목이 따끔거려서 일시적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김지원은 여전히 내 볼을 잡은 채 토끼를 닮은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눈웃음은 아니였지만, 새하얀 토끼가 나를 보고 꽃잎에 날려 그 속에 있는 것 같은 사진 속에 담긴 우리둘을 축복하듯이 웃는 것 같아서 멍 하니 그 웃음을 쳐다봤다. 김지원은 한참동안 손을 떼지않고 주물럭주물럭 거리다가 손목에 걸어놓았던 비닐봉지를 내 손에 쥐어줬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매미가 우는 소리와 겹쳐져서 났다. 무겁지않은 무게에, 자그맣한 것들이 오물조물 모여있는 것같은 느낌에 한 번 흔들어보았다. 가벼웠다. 이게 뭐야?
"약."
"엑?"
"못 들었어? 약이야."
"언제 가져왔어?"
"4교시 끝나고. 보건실에서 가져왔지. 하루치 약이니까 이거 먹고 바로 자."
김지원의 목소리가 살짝 따뜻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멍 하니 그가 건넨 비닐봉지를 천천히 열어보았고, 그 안에는 하얀색 종이봉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짤랑거리는 소리는 작은 병의 울림이였다. 얼핏 비스듬히 보니, 쌍화차라고 적혀있는 것 같기도. 김지원은 아마 내가 그 병을 발견한 걸 눈치챈 모양이였다. 아, 그거 보건실에서 뎁혀왔어. 그냥 마시면 돼. 따뜻한 거 좋아하면 전자레인지에 뎁혀도되고. 김지원은 조잘조잘거리며 말하다가 내 가방을 건네주는 걸 자꾸만 미루어댔다. 입술을 요상하게 구기면서 내 가방끈을 꽉 쥐어매는데, 나는 그 가방을 받아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고. 결국 가방 달라고 말을 꺼내자 그제서야 건네주는 그의 행동이 요상스러웠다. 썩 내키지않는 듯한 그의 행동에 빼앗듯이 가방을 받고, 비닐봉지를 살짝 흔들었다. 고마워, 그리고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김지원의 시선이 여전히 박혀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김지원이 멍 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설픈 브이를 해대는 것이였다. 그 내가 좋아죽는 토끼웃음이랑, 눈웃음이랑 꼬옥 빼박은 얼굴로. 사람 미치게시리.
죽은듯이 잠을 잤다. 뭔가 이끌려서 눈을 떠보니, 창 밖은 매우 어두웠고 나는 그제서야 내 방 창문은 항상 커튼을 쳐놓는다는 걸 문득 깨달아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튼을 좌르륵 걷어내고나니 맛보는 것 마냥 가볍게 가라앉은 저녁분위기가 아침과 낮을 지배했던 더위를 가라앉히고 있는 것 같았다. 김지원이 건넨 약이 매우 써서 온갖 인상은 다 찌푸리고 먹었고, 쌍화차도 그 상태에서 한 입에 털어넣고 그 쓴 맛에 괴로워하며 역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일어나보니 5시간은 족히 풀로 잔 것 같다. 몸이 찌뿌둥하길래 기지개를 천천히 피며 빈 병이 되버린 쌍화차의 뚜껑을 곧게 닫고는 내 방 쓰레기통에 살포시 넣었다. 약 봉지도 함께 넣고, 반쯤 남은 물컵을 입가에 축이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오늘 엄마는 늦는다고 했다. 집에는 여전히 나 뿐이였고, 집은 벌써 어둠에 잠식된지 오래였다.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하지만, 나 혼자 있는 건 싫어하는 편이라 내 방 불을 켰다. 갑자기 들어오는 불빛에 인상을 찌푸리고 눈가를 비비적 거렸다. 아, 머리가 조금 개운해졌다. 몸도 아까보단 가뿐해졌고. 이건 다 김지원 덕분임이 틀림없다.
핸드폰을 한 번 더 열어보았다. 김지원에게 고맙다고 카톡이라도 하기위해서 데이터를 켰다. 카톡은 필요할 때 빼고 안 하는 편이라 데이터는 항상 꺼두고 있었다. 그래서 밀려오는 카톡을 일일히 답장하기는 정말로 힘들었지만 이게 다 내 탓인데 무엇하랴. 나는 김지원의 카톡을 찾아서 데이터를 켰다. 상단바에 데이터 표시가 떴고, 데이터 표시 옆에 시간이 나타났다. 7시 12분, 나는 이마를 쓸어내리며 피곤함이 어느정도 호소된 것에 나름 김지원의 효과라고 생각하며 푸, 하고 웃음을 짧막하게 흘렸다. 열심히 자판을 누르면서 고맙다고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카톡. 하며 누군가에게 카톡이 온 것이였다. 상단바를 내려끄니, 김지원이 타이밍좋게 카톡을 보내온 것이였다. 와, 날 감시하고있나? 말도안되는 상상이 일었지만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뒤로가기 버튼을 한 번 누르자 김지원과의 대화창이 보기좋게 들어왔다. 김지원의 프로필사진은 자신의 셀프카메라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아하니 학교에서 몰래 찍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나름 잘나왔다고 생각하며 빤히 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이끄는 그에게서 온 대화를 읽어내렸다.
[다 나았어?]
[일어나면 카톡해]
애교따위 없는 그의 카톡에 정말 김지원 답기도 나름 생각했다. 흠, 하고 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갑자기 옆에서 '그렇게 하지말랬지-'하고 하는 것 같아서 급하게 입술을 내렸다. 턱 안 예뻐진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아서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나저나 김지원이 건네준 립밤, 진짜 내가 써도 되나. 그렇다고 다 써버리기엔 좀 미안한데. 한참동안 입술을 깨물면서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립밤을 응시했다. 상표가 벗겨져있었고, 낡은 이미지를 보아하니 그가 꽤 오랫동안 써 온것이 틀림없다. 얼마나 써왔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립밤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순간 가슴이 콩콩, 뛰었다. 눈 앞에는 김지원이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연신 깜빡였다. 이 상태로라면 답장은 까먹게 되겠군. 나는 입술을 축이며 립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자판을 어색하게 두들겼다. 금방 1은 없어져 있겠거니 하고 차근차근 눌렀다. 다 나았냐는 질문에는 자고 일어났다는 답을, 일어나면 카톡하라는 말엔 지금 일어났다고 답을 보냈다. 핸드폰 화면을 잠시 끄고 립밤을 다시 들어올렸다. 머뭇머뭇대다가 잔뜩 엉망이된 입술이 거울로 보이길래 립밤 뚜껑을 열었다.
향긋한 바닐라향이 올라왔다. 내가 쓰던 것은 사과향이 나는 스틱계열의 입술보호제라서 손가락에 묻혀 쓰는 립밤은 조금 어색했다. 새끼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묻히고보니, 손가락에 향긋하게 올라오는 그 향기가 김지원이 쓰는 바디워시랑 비슷하게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 화끈 거린건 비밀. 마르기 전에 급하게 아랫입술에 묻히고 천천히 펴발랐다. 입가를 타고 들어오는 그 향기가 콧가에도 감돌았다. 김지원은 대체 무슨생각으로 이걸 준 걸까. 단순히 입술이 망가져서? 그럼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이랬다는 건가. 콩콩 뛰는 가슴은 여전히 팔짝거리고 있는데 왜 머릿속은 복잡해져 가는지 도통 연유를 모르겠다. 한참동안 립밤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푸욱 쉬고 립밤뚜껑을 닫았다.
[나와]
[너희집앞이야]
김지원의 카톡을 받고 대충 빗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물론 옷은 얇게 비추는 가디건을 입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긴 반팔을 입기로 하고 옷을 벗어던졌다. 아프니까 뭐 이런 초췌한 얼굴은 그냥 눈감아주겠지. 근데 왜 잘 보이려고 하는거지? 갑자기 드는 생각에 입술을 삐죽이며 거울을 엎었다. 나도 참 말세구나. 파, 하고 한숨을 쉬며 이상하게 걸리는 미소를 애써 참은 채 바깥으로 나갔다. 아파트 안은 여름에도 싸늘해서 잠시 오소소 돋는 소름이 좋게만 느껴졌다. 더워죽겠는데 춥다고 하는 건 사치니까. 1층으로 내려가니 정말 김지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교복이 아닌 청바지에 검은색 브이넥 티셔츠를 입은 그의 뒷모습이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하며 짝다리를 짚고있는 것이였다. 주위를 간혹 둘러보기도 했고. 나는 피어오르는 웃음을 꾹 누르며 아파트 바깥문을 열었다. 김지원! 내가 그의 이름을 빽 부르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지못했던 뿔테안경도 쓰고있었다. 김지원은 한 손에 핸드폰을 꾹 잡은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ㅇ, 어. 괜찮아? 바보같이 말을 더듬는 그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야자쨌어? 내 말에 그가 찔린 눈치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쨌구나, 아냐아냐! 그가 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부정을 하길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뭐야, 야자 안 한게 안 한거지 뭐가 아니야. 오늘은 급한 일 때문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야자를 안한것 뿐이라고. 그는 억울하다는 말로 내 팔을 잡은 채 흔들며 웅얼웅얼거렸다. 그의 조금 다른 면모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몰래 웃었다. 김지원, 진짜 웃긴다. 큭큭 거리며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 있자, 김지원이 뿔테안경을 치켜올리며 남사스럽게 뒷통수를 긁었다. 하늘을 보니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저 멀리는 태양과 파랗게 빛났던 하늘이 어우러진 밝은 분홍색이 언듯언듯 보여서 손에 잡히지 않을 걸 알지만 손을 들어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김지원은 내 모습을 여전히 쳐다만 보고있었고, 그의 시선을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곧 팔을 내렸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놓고는, 잠시 걷자며 나를 근처 공원에 데려갔다. 우리집에는 아기자기한 호수공원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무척이나 그 인원이 붐빌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김지원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다 나은거 맞지?"
"응, 덕분에."
내 말에 김지원이 환하게 웃었다. 잘 됐네, 앞으로는 아프면 제때제때 보건실 좀가.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대충 대답하며 김지원이 건넨 음료수를 들이켰다. 목을 톡톡 쏘는 탄산음료가 왠지모르게 이 상황이랑 어울렸다. 더 맛나는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며 한 모금 더 들이키는데 김지원이 걸터앉은 벤치에서 내 쪽으로 돌아 앉는 것이였다. 내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행동에 웃음을 어색하게 흘리며 나도 그를 따라 그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있는 이 상황이 꽤 유쾌하게만 느껴져서 음료수를 짤랑짤랑 흔들자 그의 시선이 얄쌍하게 변한다. 김지원은 휴,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진짜 깜짝놀랬잖아, 너 아픈거 보고."
"..."
"안 아프던 애가 죽을상인데 진짜 심장떨어지는 게 뭔지 깨달았다."
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픽 터뜨렸지만 가슴이 자꾸 콩콩 두들겨지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프지마."
그가 내 머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으며 알 수 없는, 뭔가 아련한 눈빛이 된 채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형용할 수 없는 콩콩거림이 더욱 빨라짐을 느꼈고, 먹던 음료수도 내려놓은 채 그저 김지원만 빤히 쳐다봤다. 가로등 불빛이 살짝 노래서, 김지원의 얼굴색이 어떤지는 몰랐지만 갑자기 그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덥다고 딴청을 피우는 것이였다. 뭐, 아무튼 고마워 김지원. 너 덕분에 빠르게 나은 것 같아. 음료수를 홀짝이며 김지원에게 말을 건넸다. 김지원은 내 말에 한참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진짜로. 아까 좋아죽는 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음료수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왜냐고? 김지원 얼굴을 보는데 왜 이렇게 세상이 멈춘 것 같았던지.
"아프면 때려버릴꺼야."
"...헐."
"아프지마, 예쁜 피구여왕."
그놈의 피구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