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열 조각글2
written by 낯선자
Low-End Project - 연애를 망친 건... 바로 나라는 걸 알았다
공허하다. 새벽 달빛은 공허한 심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반쯤 친 커튼 새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마냥 달빛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몸을 움직이니 하얀 침대 시트의 빳빳한 질감이 피부에 닿았다. 하얀 침대 시트와 하얀 얇은 이불, 그리고 하얀 성열의 피부가 더 도드라지게 하얗고 해사하게 느껴졌다. 협탁에 올려져 있는 탁상 전자 시계는 푸른 빛으로 4:17을 가리켰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 깜빡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집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정적이 흘렀다. 거실에 있는 벽걸이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릴 뿐. 집 안은 나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불을 제 가슴께로 올리던 성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별, 그래. 나는 지금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일정하게, 그리고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성열은 더운 것에 원체 약했기 때문에 여름만 되면 에어컨 속에 살았다. 그래서 항상 고질병처럼 냉방병을 달고 살았다. 항상 에어컨의 온도를 최저인 18℃로 내려놓으면 명수는 항상 으름장을 놓으며 적정 온도로 맞췄다. 그마저도 없으니 성열은 점점 제 자신이 매말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별의 온도는 싸늘하다. 아무리 열이 나고 더위를 많이 느낀다 해도 마음 속은 허허벌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싸하다. 마음에도 냉방병이 들었나, 온 신경이 권태로워졌다. 성열은 다시 초점을 잃은 눈을 슬몃 감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뜨끈한 눈물이 하얀 침대 시트에 스며들었다. 나, 울고 있었네.
* * *
함께 있을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잠시라도 곁에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다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 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하지 말고
애처롭기마저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에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었음을 아파하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하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 오직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용운의 인연설이야,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열아, 흔한 사랑 하지 말고 우리 이런 사랑 하자. 생일 축하해, 영원히 네 곁에서 살고 싶다
이성열의 스물 여덟번째 생일을 기념하며
김명수
1년 전, 스물 여덟 번째 생일이였던 제게 명수는 간결하고 깔끔한 필체로 편지와 꽃다발을 선물로 줬었다. 선물로 꽃다발이라니, 진부해도 너무 진부하다. 성열은 툴툴거렸으나 내심 마음에 들어했었다. 레스토랑으로 향하던 길, 명수는 왼손으로 운전을 하고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성열의 손을 잡았었다. 명수는 성열과 같은 나이의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스러웠었다. 아니, 20대 후반이면 성숙해야 하는게 지극히 정상인데, 성열은 아직도 어렸었다. 명수와 성열은 종종 이렇게 차로 드라이브를 떠나는 걸 좋아했었다. 간단히 요깃거리와 함께 별도 보러 다니고, 연인들의 흔한 데이트 코스를 하나하나 잘 다녔었다. 그랬었다.
이 모든 행복한 순간 순간들이 다 ~었다의 과거형으로 점을 찍어야 한다는게 성열에게 있어서 지극히 절망적이였다. 동성의 연인에게 있어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우견(愚見)이다. 현재는 사랑하되, 나는 일말의 불변 없이 서로를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다는게 일반적인 케이스다. 아마 명수와 성열도 그 케이스에 속했을 것이다. 명수와 헤어진 이후로 성열은 생활 패턴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어떻게 이별에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곧 있으면 30대의 초입에 들어서는데도 성열은 연애에 있어 지극히 서투른 모습을 보여줬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이제 울 기력도 없는지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성열은 점차 로봇처럼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제 전공이였던 피아노를 치고. 브라운관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개그 프로그램을 덤덤하게 볼 뿐이였다. 가끔 성열의 오피스텔로 드문드문 우현이 찾아왔다. 얼마나 청승을 부리는가, 밥은 제때 잘 챙겨 먹고 있는가 걱정 어린 감시를 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나 정말 괜찮아, 나른한 목소리로 성열이 말하면 의구심을 품다 이내 수긍했다.
이성열, 에어컨 온도 좀 올려. 여기가 무슨 냉장고냐?
잔소리 찍찍 뱉으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고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우현이였다. 성열은 그런 우현이 고마웠다. 명수와 헤어진 직후부터 다 챙겨줬다. 성열의 최측근 답게 우현은 잔소리 뱉을 거 다 뱉으면서도 디테일하게 챙길 건 다 챙겨줬다. 하나하나, 혹시 뭐 아픈 덴 없나. 밥은 잘 챙기고 있나? 따끔하게 직언을 날리며 이제 그만 김명수는 떨쳐내라는 그 싫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성열은 몸을 웅크렸다. 우현이 그런 말을 뱉을 때마다 이별의 화살이 비수가 되어 성열의 심장 한 가운데를 관통했다. 그 상처로 피가 흐르는 대신 성열의 깊은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룩, 주르륵, 주룩.
그런 성열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투명한 창문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장마 전선에 들어선다고 했다. 창문을 살짝 여니 특유의 눅눅함과 무거운 공기. 장마는 싫다. 몇일동안 구질구질하게 궂은 날씨의 연속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한 날로 바뀌니까. 나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그렇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새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그 진부한 말을 속삭이고. 모든 상황에 김명수라는 키워드를 대입하고 있었다.
답답하다. 옥죄여 오듯 허했던 마음 속이 답답함으로 가득 찼다. 성열은 창문을 닫고 에어컨의 온도를 낮췄다. 시원하다. 시원하니까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 얼마 전에 다 마셔서 떨어졌는데. 사러 나가야 하나. 성열에게 있어 아메리카노는 일상이였다. 명수의 공석으로 생긴 허전함을 애써 달래는 일종의 대안이였다. 성열은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다음 간만에 외출을 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집 안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던 이성열이, 기여코 밖을 나왔다.
* * *
커피 전문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 나왔다. 우산을 펼치고 비 오는 거리를 나긋히 걸었다. 오른손에 든 테이크아웃용 플라스틱 컵 안에 담긴 흑갈색의 액체가 얼음으로 인해 달칵거렸다. 검은색 스트로우로 휘휘 젓다가 한 모금 마셨다. 아메리카노 특유의 고소한 향이 입 안 전체를 아울렀다. 그렇게 비 오는 삼청동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그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걸음으로. 가늘었던 빗줄기가 굵어질 즈음, 그리고 성열의 오른손에 바짝 들고 있었던 아메리카노가 반쯤 줄었을 즈음, 성열은 어느 카페의 그늘막 앞에 잠시 섰다. 빗줄기가 좀 가늘어지기까지 기다려야겠다. 약간의 미풍과 함께 동반한 장맛비라 그런지 빗줄기가 굵었다 가늘었다 변덕을 부린다. 괜시리 짜증이 난 성열은 쏴아아, 하고 비 내리는 그 거리를 멍하니 주시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성열은 손에 꽉 쥐고 있었던 우산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
후두둑, 후둑, 후둑. 접혀진 우산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 위로 비가 세차게 때렸다.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그 우산과 비의 마찰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소리를 자아냈다. 성열과 시선을 마주한 사람은,
“…”
“…”
다름아닌 김명수였다. 명수는 여전히 제 취향대로 어두운 색상의 수트를 입고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성열과 같은 메뉴의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 그리고 은색의 노트북이 유리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 원래 명수는 수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원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해서 편한 남방에서 겨우 탈피하더니, 이젠 수트를 입는게 생활이 되어버렸나. 성열과 눈이 제대로 마주친 명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만, 그 시선이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었을 뿐. 성열은 갑작스레 직면한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제 몸에 걸친 회색 가디건이 더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손이 떨려왔다. 플라스틱 컵 안에 담긴 흑갈색의 아메리카노도 미미하게 일렁였다. 작은 파도를 형성하여.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먼저 시선을 회피한 건 성열이였다. 지금, 나는 김명수를 볼 자신이 없다. 해변 위 모래성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김명수라는 파도로 인해. 아메리카노를 손에서 놓아버리고 우산을 챙겨들 겨를도 없이 그 장대비 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첨벙, 물 웅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작정 뛰었다. 지금 이렇게 필사적으로 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명수에게 달려갈 것만 같아서. 나 다시 한번만 받아주면 안되냐고, 그런 말을 하게 될까봐. 그리고, 여전히, 너무 멋있는 그 김명수를 보고 한번 더 반해버린 제 자신을 원망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와중에 성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한 걸 느낀게 뭐냐면. 혹시나, 명수가 절 잡아주지 않을까, 그런 헛된 망상에 잠시나마 빠졌다는 것이다. 뭘 기대해, 대체. 이성열... 언제까지 김명수라는 궤도 안에서 맴돌래, 빗물인지 눈물인지 얼굴이 잔뜩 젖었다. 얼굴은 물론, 온 몸이 장대비로 인해 흠뻑 젖어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며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축축한 옷의 느낌 뒤로, 그와 상반되는 너무나 따뜻한 온기가 제 몸을 감싸왔다. 규칙적인 숨소리. 익숙한 체향,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게 김명수라는 것 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놀라서, 한편으로는 너무 좋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행히 얼굴을 때리는 비로 인해 들키지 않았지만. 성열은 뒤에서 저를 꼭 안아버린 명수의 손을 풀며 시선을 마주했다. 김명수... 너 뭐야?
“… 김명수.”
“…”
“김명수.. 너 맞지? 내가 아는 그 김명수.”
“… 어. 맞아.”
“왜 나 안았어?”
성열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명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끝내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간결히 대답했다.
“좋아서.”
“…”
“헤어지면 그냥 기억에서 사라질 한낱 연인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
“아니더라.”
“… 김명수.”
“지금이 아니면, 영영 볼 수 없을까봐. 그래서 안았어.”
“…”
놓칠까봐, 그 마지막 말에 성열은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피부에 닿는 비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성열은 명수와 헤어졌던 그 1년 동안, 가끔 이런 꿈을 꿨다. 극적으로 다시 만나서, 설렐만치의 달큰한 그 한 마디를 듣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쏟는 그런 꿈. 꿈에서 깨면 베겟잇이 눈물로 축축했었다. 그 꿈에 불과한 상황, 혹은 상상이 지금 이렇게 현실로 그려지고 있어서 성열은 더 서러웠다. 명수는 성열을 제 품에 가뒀다.
“열아.”
“… 응.”
“영원히, 네 곁에서 살고 싶다.”
그래도 될까? 부탁조로 말하는 명수의 그 말은 너무나도, 비 냄새 특유의 그 눅눅함과는 너무나 상반되게 나른하고, 따뜻했다. 눈물이 날 만큼.
밖에 비가 엄청 내리네요...^^; 그래서 넬 노래 듣다가 갑자기 싱크가 뙇! 돋아서 쓰게 된 조각글입니다~
사실 커플링을 되게 고민 많이 했어요.. 은근 현성하고도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어쩔 수 없는 수열수니 수열러니까...☆★
여기서 명수가 성열이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하게 되죠!
이제 명수는 미래를 생각해야 될 나이(를 한참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에 헤어지자 했겠죠? 상상은 그대들의 몫!
비가 추적추적 정말 많이 내리네요.. 그 덕분에 끈적여서 잠을 설치게 되는 새벽 세시, 그대들은 단잠 자시길 바랄게요!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