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을 먹으러 복도를 내달리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히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함께 수다를 떨 친구는 밥 먹으러 가고 오늘까지 꼭 해야 할 숙제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멀거니 앉아있는데 살짝 열어둔 창가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할거 없나 하고 책상을 뒤졌는데 책 한 권이 손에 집혔다. 빌린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3장밖에 안 읽은 책이었다. 사람의 손이 많이 닿아 헐어버린 책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것도 없는데 도서관에 책이나 반납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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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문을 연게 무색하게 도서관엔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에 계셔할 사서 선생님도 어딜 가신건지 영 안 보였다. 들고 온 책을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올 때마다 붐볐던 도서관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생경했다. 깔끔히 정리된 책장을 따라 돌아다니는데 가장 위 칸에 비죽 튀어나온 책이 눈에 거슬렸다. 튀어나온 책을 집어넣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그 자리에서 점프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책이 책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히 귀찮게 됐네... 중얼거리곤 떨어진 책을 주웠다.
"마리.. 앙투아네트."
눈을 가늘게 뜨고 표지 위에 써진 [Marie Antoinette]를 소리 내어 읽었다. 도서관 책이니 번역본인게 확실한데 제목은 영어 그대로였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목을 계속 되뇌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더라..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사회 선생님의 수업이 생각났다. 어쩌다가 수업 도중 마리 앙투아네트란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흘리듯 말씀해주셨던 것 같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라고.
"마지막.."
항상 느끼지만 마지막이란 단어는 어감이 좋지 않다. 좋다 못해 불길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처음부터 튀어나온 책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 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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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정말 희대의 악녀일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역동의 시대,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
현재까지도 사치의 아이콘으로 화자되는 그녀의 진실
어린 나이에 타국의 황태자비가 되어 단두대의 이슬이 되기까지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거짓을 파헤친다.
뒤집은 책 위에는 저런 짤막한 소개글이 써있었다. 마지막 왕비, 희대의 악녀, 사치의 아이콘, 거짓과 진실. 한 사람을 지칭하기엔 거창한 감이 없지 않아있었다. 다시 한 번 소개글을 훑으며 깨달은건 그녀가 내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책을 뒤집어 표지를 넘겼다.
Marrie Antoinette
그녀의 화려하고
은밀한 삶
속에 감춰진 외로움
체험해보겠습니까?
바꿔보겠습니까?
"누구세요?"
내뱉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상대방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불안함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손에 잡힌 천조각을 생명줄마냥 꽉 잡았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깜깜한 방 안에 햇빛이 들어왔다. 갑자기 밝아진 방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빛이 몸에 닿는게 느껴졌다. 어느정도 빛에 적응하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광경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야."
내가 헛것을 보고있나, 정신이 나간걸까. 내가 있는 방은 우리 집만한 크기의 커다란 방이었다. 방은 중세 시대가 배경인 영화에 나올 곳처럼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내가 앉아있는 침대를 에워싼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캐노피, 금으로 장식된 탁자와 의자들, 벽 한 쪽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들,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과 샹들리에까지. 무엇하나 평범한게 없었다. 나는 넋을 놓고 홀린 듯이 침대에서 벗어났다. 눈 앞에 있는 화려함이 두려움을 없앤 것이다.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는데 낯선 것들 가운데 익숙한 것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이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빠르게 책을 펼쳤다. 급한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가장 윗부분에 있는 문장을 읽었다.
[ㅇㅁㅁ가 구준회 백작과 쁘띠 트리아농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허.. 분명 마리 앙투아네트가 나와야 할 부분에 내 이름이 채워져있었다. 다른 페이지도 다 훑어봤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란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모두 내 이름으로 채워져있었다.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온몸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 위에 써진 두 구절(체험해보겠습니까, 바꿔보겠습니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체험하긴 뭘 체험해. 뭘 바꾸냐고."
처음엔 황당하고 그 다음은 분노였다. 내가 왜 저 책 속에 들어오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급식시간에 도서관 가서 책 읽은게 죄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다 책을 펼쳤다. 이왕 이 책에 들어온거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겪을지 읽어나 보자는 심보였다. 앞장부터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도서관에서 읽었던 부분이 텅텅 비어있었다. 말 그대로 백지였다. 그때 종이 위에 글자가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타자 치듯이 빠르게 완성된 구절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아프고 앞날이 막막했다.
[책의 주인공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킨더초콜릿이에요. 예전부터 시대물 쓰고싶었는데 드디어 쓰게됐네요. 독자님들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제목이 '원수의 나라에서 왕비가 되기까지'인 이유는 다음편에 나올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조금만 조사해도 이유가 나와요. 그녀의 삶이 배경이긴 하지만 책에서 [바꾸겠습니까?]란 구절이 나왔듯이 똑같이 전개되지 않을거에요. 그리곸ㅋㅋㅋ책에 움짤있는건 무슨 상황이짘ㅋㅋㅋㅋ 사진은 없고 움짤만 있어서 그런거니까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사담(click)
↑햇빛 들어올 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