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LIFE
-GOOD LIE
모든 것은 꿈이었다.
02
웬만하면 브금 틀어주세요ㅠㅠ! 글의 분위기는 모두 브금빨입니다(속닥속닥)
〈!--StartFragment-->
남자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진짜 나는 병원에서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고. 남자가 증거로 보여준 만들어진 인간은 그 자리에서 멀뚱멀뚱 서있더니 순식간에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 만들어진 것과 같이. 바닥이 끈적거리는 액체로 뒤덮였다가 남자의 윙크와 함께 사라졌다. 남자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나를 보고 비웃더니 다시 노트를 꺼내 뭔가를 끄적였다. 100만원 어쩌고 중얼거리는 걸 들어보니 윙크 하나에도 돈이 드는구나, 싶었다.
남자는 그렇게 액체를 없애고서는 나를 방바닥에다 앉혔다.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보다 왠지 얼굴이 달아올라 먼저 고개를 숙여버렸다. 위에서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헤픈 남자였다. 그렇다고 그 웃음이 진실 된 것만은 아닐 터였다.
"준비됐어요? 이제부터 가짜와 슬픈 이별의 시간인데.
그렇다고 정리할 시간을 요구하지는 맙시다. 내가 여기 온 이상, 가짜들이 순순히 너를 넘길 리가 없거든요."
"……어차피 가짜들인데요.'
"쿨하네. 그게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나저나 아직 내 소개를 안했죠? 구준회에요.
직업은 아까 말했듯이 누구 꿈속에 들어가서 정보 빼내는 거.
이렇게 정보 말고 사람을 빼내는 건 두 번째. 그래도 꿈 들락날락한 건 수백 번이니까 쫄지 말고.
꿈에서 깨어나는 건 간단해요. 여기서 죽으면 됩니다."
……예? 분명 뭔가를 들은 것 같은데 귀에서 딱 막혀 뇌까지 올라오지 않았는지, 당최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남자의 말 중에 이해가 쉽게 된 건 거의 없지만.
"꿈에서 죽으면 진짜 삶도 죽는다는 말은 개구라에요. 너를 영원히 여기 가두려고 가짜들이 씨부린 말이죠.
눈 딱 감고 여기서 뛰어내리면 모든 게 끝나요. 음, 목숨 빼고 모든 게. 뭔 말인지 알겠죠?"
아니. 하나도 모르겠는데. 거기다가 우리 집은 4층이었다. 뛰어내린다고 해봤자 죽기는커녕 몸만 엄청 아플 높이었다. 아니, 아픈 것도 꿈이니까 괜찮은가? 남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고 있으니 사채업자 하나가 집 안에 있는 것 같아 괜히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괜히 눈치만 보고 있는데,
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놀라 팔짝 뛰었다가 남자의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았다. 머쓱해져 입을 꾹 다무는데 밖에서 누가 계속 문을 두드리더니 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여주!! 여주야!! 집에 있어?!"
남자는 뚱한 표정이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한가득인. 밖에서 왁왁거리는 남친을 어떻게 할까 싶어 잠시 고민을 하는데, 딸깍이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남자의 얼굴이 굳어갔다. 아 맞다. 쟤 우리 집 열쇠 갖고 있지.
"김여주 너 진짜 집에 있음 있다고… 어라. 이 남잔 누구야?"
마주앉은 우리를 보고 남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에 질투심이 엄청 많은 놈이었다. 다른 남자 쳐다보기만 해도 사랑이 식었네 어쩌네 찡찡거리기 일쑤였는데. 새삼스레 남친이 낯설어 보였다. 네가 가짜라니. 괜히 마음 어딘가가 찌르르 울렸다. 나 쟤랑 결혼도 하려고 했는데…….
"음, 봤죠? 꿈에서 깨려니까 찾아온 거.
내가 이래서 커플들을 존나 싫어해. 뭐만 하면 방해야.
어떻게든 빨리 뒈지는 게 지금 미션입니다. 부엌에 식칼 있죠? 나 총도 있어요. 빌려줄까?"
"이새낀 뭐야? 뒈져? 식칼? 총? 여주야 너 혹시 지금 협박당하고 있어?"
"그런 거 아냐. 나중에 얘기하자."
"어이, 가짜. 이제 진짜들은 퇴장할 시간이에요. 빠빠이하자구요. 오케이?"
"뭐, 시발?"
남자의 태평스러운 말이 남친의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남친의 입에서 욕까지 나왔다. 남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천박하기는. 남자의 중얼거림이 꽤나 크게 흘러나왔다.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던 남친이 한숨을 쉬며 모든 것을 털어냈다. 그러더니 큰 보폭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작은 눈, 튀어나온 이빨, 단정한 눈썹. 정말 이게 가짜라고? 10c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남친이 내 얼굴을 마주봤다. 절로 침을 꿀떡 삼키게 되는 무시무시한 눈초리였다.
"왜, 왜 그래?"
바보처럼 입에서 떠듬떠듬 말이 나왔다. 남자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푹 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떤 식이든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것에 특출난 남자였다. 눈알이 옆쪽으로 데구르르 굴러간 걸 눈치 챘는지 남친이 코앞에서 으르렁댔다. 목 깊은 곳에서 끓는 목소리였다. 괜히 오싹해져 어깨를 살짝 부르르 떨었다.
"자기야. 저새끼 뭐야? 가짜니 진짜니, 그건 뭔 소리고."
"어……. 아는 오빠야. 살짝 정신병이 있어서 그래. 아하하, 저 오빠 약 먹을 시간인데 안 먹어서 저러나 보다.
으응, 원래 멀쩡하거든."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네?
가짜, 네 여친이 여기 꿈인 거 알아챘어요. 다 뽀록났다고.
그냥 조용히 끝냅시다? 다른 놈 꿈으로 기어가던가 알아서 하시고.
이제 좀 나갈래요? 눈앞에서 여친 죽는 꼴 보고싶나봐?"
저 남자 뭐지? 이렇게, 이렇게 막나가도 되는 건가? 남자는 태연하게 말들을 툭툭 뱉어냈다. 남친의 안색은 더 굳어갔지만 여전히 시선은 나에게서 고정된 채였다. 입에 점점 고여가는 침마저 삼키기 조심스러웠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아주 등이 작살나는 기분이었다. 한참동안 나만을 바라보던 남친이 눈을 접으며 환히 웃었다.
어라?
"병신새끼. 넌 꿈에서 여기가 꿈이라는 걸 말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안 배웠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마치… 수백 명이 뛰는 소리 같았다. 우당탕, 쾅쾅. 남자도 눈치 챘는지 반쯤 늘어졌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머리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옆집 아줌마였다. 괜히 쫄았다 싶어 긴장을 놓으려는데, 일자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아줌마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입을 열었다.
"여깄다!!!!!"
그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더니 수많은 머리통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장면이었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친은- 김지원은 아직도 나에게서 시선을 고정하는 중이었다. 수십 명의, 어쩌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좁은 문을 통해 들어오려고 버둥댔다. 옆집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처음 보는 사람들, 편의점 알바생 등등, 모두가 내 이웃들이었다. 헤죽 웃는 그들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김여주!!"
모든 사람들이 나만을 바라보며 내 이름을 외치는 건 무서움을 넘어 징그럽기까지 했다. 나를 잡을 듯이 모두가 손을 쭉 뻗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남자는 얼굴을 구기며 욕을 웅얼거렸다.
서로에게 낑겨서 버둥거리기만 했던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비틀더니 집 안으로 튕겨 들어왔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게 꽤나 아플 텐데도 번뜩이는 눈은 나에게로 고정돼있었다. 김지원의 눈도 여전히 나를 향했다. 기묘했다. 모든- 남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가짜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에 슬슬 뒤로 엉덩이를 빼는데, 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나에게로 뛰어 들었다. 동시에 막힌 댐이 터지듯 문 밖의 사람들도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그제서야 나에게서 눈을 뗀 김지원이 나를 들쳐 매고서는 5평 남짓한 베란다를 향해 뛰어갔다. 남겨진 남자가 걱정돼 손을 쭉 뻗었지만 헤죽 웃으며 기어오는 여자가 나를 향해 팔을 뻗길래 곧바로 손을 거둬버렸다. 아수라장이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내 이름이 지겹도록 들려왔다. 이게 뭐지?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지?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들에게 깔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별 생각에 다 빠져 있는 동안 김지원은 베란다 문을 활짝 열더니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너… 너 뭐하는 거야!!"
아무리 4층이래도 뛰어내리면 최소 입원인 높이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땅의 모습에 놀라 눈을 딱 감았다 뜨니 김지원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들쳐 매고 달리고 있었다. 나를 꽉 붙잡은 김지원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자기야, 모르겠어? 여긴 네 꿈이 아닌지 오래야. 여기가 현실이야.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