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에서 암호닉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을 것 같아요.
이번에 글 작업이 잘 되면 완결을 맺고 여러가지 다른 작업들을 생각하고 있어요.
암호닉 남기신 분들에 한해서 특전이나 감사함을 표시해 드리고 싶어서 암호닉 남겨주시길 바래요~
* 비회원 분들도 가능합니다.
PS. 그리고 전 모든 댓글을 정독하고 또 정독해요 ♡
답글 너무 남겨드리고 싶지만 한 분 한 분 모두 감사해서 다 달아드리긴 무리일 것 같아 정독 또 정독 캡쳐해 간직하고 또 읽는답니당.
그리고 모든 암호닉 리메이크 전에 남기셨던 분들도, 이제 막 읽기 시작한 독자분들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혼자 반가워하고 그래요!
"개강하는 날에 화장도 안 하고 오고, 복학생 주제에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밤새 잠을 설친 탓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학교에 왔더니 찬열의 잔소리가 끝날 줄 몰랐다.
자격증도 따고 스펙도 쌓을 겸 1년 휴학 후, 복학하니 여자 동기들은 4학년 졸업반이 되어 있었고 제대 후 복학 한 남자 동기들은 복학생 티를 풀풀 내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에 왜 대답이 없어."
대답 없는 날 재촉하는 찬열은 대학교 동기로 죽이 잘 맞아 찬열이 군대가기 전까지 과CC라는 오해까지 살 정도로 붙어 다녔었다.
물론 찬열과 난 여러 면에서 잘 맞았지만 연애 감정은 이상하리만큼 들지 않아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찬열이 2학년에 복학했고 덕분에 이번 학기는 아웃사이더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되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신' 이라는 커다란 산이 내 앞에 생길지는 몰랐지만.
찬열은 군대에 있을 때도 그렇게 새내기, 새내기 노래를 부르더니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힘주고 와선 초췌한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게 힘주고 와도 너 새내기 사이에 끼면 그냥 아저씨야. 복학생 아저씨."
"아저씨? 넌 내일만 살지 난 오늘만 산다."
“진심 방금 짜증나서 두통 생길 뻔 했으니까 그런 거 제발 부탁이니까 새내기들 앞에서 하지 마라."
"왜? 너무 멋있었나?"
"말 안할란다."
내가 뭐래도 손가락으로 V를 그리는 찬열의 모습에 고개를 내젓는데 찬열이 내 뒤를 보며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누구 왔어? 하고 고개를 돌리려다 불길한 느낌에 반쯤 돌아간 고개를 다시 똑바로 돌려세우곤 제발 내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주기를 빌고 비는데 불길한 느낌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탄식을 내질렀다.
아, 김민석.
"얘기 좀 하자."
찬열의 인사에 답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손목을 잡아끄는 김민석을 따라간 곳은 학교 건물 뒷 편 으슥한 곳이였다.
9월 초지만 살짝 서늘한 공기에 두 팔을 감싸 안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김민석이 통장을 건넨다.
돈을 오랫동안 모은 모양인지 손 때가 가득 탄 통장을 영문도 모른 채 김민석에게 건네받으며 김민석을 쳐다보자 김민석은 내 손에 한 번 더 통장을 꼭 쥐어주었다.
"뭐야."
"통장. 500만원 조금 넘게 들어있어."
"내가 이걸 왜 받는데."
"어제 한 말은 미안했어.…………이거 중절수술비."
김민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을 쉽게 얘기해버리는 김민석이 낯설어서 귀가 빨갛게 될 만큼 귀를 막고 치를 떠는 내 앞에 김민석이 무릎을 꿇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는 막던 귀를 떼고 나도 모르게 김민석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김민석은 어릴 때부터 무릎 꿇는 것을 진저리 칠만큼 싫어하던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 무릎 꿇고 손드는 벌이 싫어 운동장을 열 바퀴고 스무 바퀴고 한여름에 지쳐 쓰러지던 일이 있더라도 기어코 무릎 꿇는 것이 싫다며 운동장을 돌 던 애였다.
근데 그런 김민석이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도 김민석은 내가 무서웠나보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벽돌을 주워들고 김민석에게 내리칠 생각으로 팔을 머리위로 높게 들었다.
"너 맞아야겠다."
"알아, 너 화내는 거 이해해. 나도 쉬운 결정 아니였어. 근데 우리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쉽지 않은 결정이였다는 말 죄책감 덜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야. 나 임신했다고 너한테 말한 지 채 24시간도 안 지났다고.“
“ㅇㅇ아.”
“나 너한테 말하려고 꼬박 4일 고민했었어. 넌 적어도 이런 말을 꺼내기 위해…… 아니다, 고민한 시간의 길이가 뭐가 중요해. 근데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널 생각해. 너희 부모님을 생각하자…….”
“아니 지금 넌 김민석을 생각했어. 쉽지 않았던 결정에 난 없어. 더불어 내 뱃속의……아이도 없어.”
“이러지 말자.”
“정말 내려쳐버리고 싶은데 참을게, 내가. 두 번은 못 참아."
"…………."
"나 니가 이렇게 해 준 덕분에 확신이 든다. 나 어제 하루종일 머릿 속이 터질만큼 고민하고 고민했어. 덜덜 떠는 너 보면서 나도 못할 짓이고 너한테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어. 지금 니가 입 밖으로 뱉은 그 말, 나라고 생각 안 해 봤을 것 같아? 근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 짓는 것 같아서! 무서워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바보처럼 있었어. 너 근데 넌 그렇게 쉬워?“
“나도 안 쉬웠어. 안 쉬었어. 근데 낳아서 우리가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거야? 너."
"김민석, 착각이 심하다 너. 왜 우리가 키워. 내가 키우는거야 내가!!!!!!! 내가 말할 때도 그랬지? 나 그냥 임신했다고 그랬잖아. 너보고 키워달랬어? 내가 니 아이를, 우리 실수로 하루 보냈던 그 날 지나고 나 아이를 가졌다고. 너보고 키워달라고 안 했어."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하자."
"화난 거 맞아, 흥분한 거 맞고. 근데 그래서 생각 없이 막 내뱉은 말 아니야. 정말 너 필요 없어. 니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더욱."
"…………."
"너한테 이 아이 아빠가 되어달랬어 내가? 아님 남편을 해달랬어? 너한테 아무것도 안 바래. 그러니까 이기적인 그 태도로 책임지려는 듯 나서지마. 니 책임 안 받아."
"…………우리 그래도 친구지?"
결국 참을 수 없어 들고 있던 벽돌로 김민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살면서 이토록 분노가 치밀었던 적은 없었던 만큼 난 꽤 흥분한 상태였고 온 힘을 다해 내리친 벽돌에 머리를 감싸 쥔 김민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아님 이대로 죽어버려 모든 일을 잊고 싶은 모양인지 고꾸라진 채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김민석을 향해 소리쳤다.
나도 이 순간이 지나면 김민석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작정이였다.
23년 우정? 그런 건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너 같으면 이 새끼야. 너 같으면…… 내 뱃속에 니 아이를 품고서 바보처럼 웃으면서 예전처럼 너랑 지낼까? 너 같으면!!!!!"
욕만은 안하려고 했는데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어느새 피가 거꾸로 솟는 울부짖음이 되어버린 내 발악 같은 아우성에도 작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자존심 센 김민석에게 통장을 내던지고 강의실로 곧장 향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 곳을 빠져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김민석 너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입학 당시만 해도 어떻게 우리가 같은 과가 아닐 수 있냐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던 나였는데 오늘은 김민석과 같은 과가 아님에 하늘에 감사하고 있다.
강의실에 앉자마자 김민석의 번호를 지우고 메신저를 차단했다.
번호도 삭제했지만 김민석의 번호는 외울 수 있었으니 소용이 없었다.
아니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김민석에게 전화가 온다면 거절할 수 있으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또 김민석이랑 싸운 거? 너희도 참 나이가 몇 살인데 그만 좀 싸워라."
교양수업이라 같이 강의를 듣게 된 찬열이 내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찬열의 큰 손에서 나오는 얕은 바람에 얼굴을 맡기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거세게 뛰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교수님의 강의가 잘 들린다면 그게 놀라울 일이지 않을까.
교수님의 강의는 한쪽 귀로 들어와 한쪽 귀로 빠져나갔고 좋은 성적을 다짐하며 새로 산 전공책은 깨끗한 상태로 강의는 끝이 났다.
심상치 않은 내 상태를 눈치 챈 찬열이 옆에서 툭툭 장난을 걸어도 무시한 채 마른세수만 거듭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김민석에게서는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나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학생활을 이어나갔고 곧잘 강의도 들어가며 노트에도 빼곡하게 필기로 채워나갔다.
캠퍼스가 넓은 것에 감사했다.
일주일간 김민석과 옷깃 한 번 스치지 않았음에 감사했고 사진첩에서 김민석과의 사진을 한 장씩 지워가며 가벼워진 휴대폰의 용량에 헛웃음을 치는 게 일상이였다.
내 일상에서 김민석이 조금씩 지워져가면서 이상하게 붕 떠버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때마다 이제 조금씩 나오는 배에 스키니진을 멀리하고 루즈한 옷을 사는 것으로 내 일상을 새롭게 바꿔가고 있었다.
요즘 집에 민석이는 왜 안오냐며 나를 보채는 엄마에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김민석과 약속이 있다며 같이 가자는 찬열에게 고개를 세차게 내저을 때 그럴 때 정말 가끔씩 나는 김민석 때문에 외로워졌다.
곁에 누군가가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김민석이 있었다는 것이 날 외롭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