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나는……." 아니야, 아니에요. 저를 향해 손을 내민 둘은 일시에 표정을 굳혔다. 하지 말아요, 안 돼요. 나는……. "아악!" 눈을 떴다. 몇 번이고 깜빡이고 손으로 지그시 눌러봐도 멈추지 않는 눈물에 결국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포근한 솜이불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 그는 나약한 왕이었다. 대비의 뜻을, 즉 제 어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한낱 허수아비 왕이었고 그 사실은 이 나라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가련한 그는 제 스스로 비하의 뜻을 담은 말을 뱉기를 자주 했다. 씨돼지에 불과한 저를 데리고 있는 저의가 무엇인지 묻기도 했고, 언제쯤이면 제가 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물었다. 어렸고 또 어린 임금이었기에 꺼낼 수 있는 철 없는 말이었다. 제 아비가 독살로 숨을 거둔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수현궁에 방문한다 일러라." 언제나 핏기 가신 얼굴로 의욕 없는 생활을 하루하루 이어나가는 그가 유일하게 활기를 되찾는 것은, 그의 후궁 중 하나인 이름을 찾을 때였다. 실상 그녀를 제외한 모든 후궁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총애를 차지한 귀빈의 자리는 무거움에 틀림이 없으나 그 총애의 정도가 완벽히 그녀만을 향한 터라 그에 반발하고 나설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귀빈." 왕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채 준비를 마치지 못한 듯 엉거주춤 일어선 그녀를 꼭 끌어안은 그가 궁녀들을 물렸다. "나도는 말들이 좋지 못합니다." "어떻기에 그러오." "……아닙니다." "얼굴빛이 좋지 않소." 귀빈의 눈치를 살핀 그가 조용히 다과상을 내올 것을 명하곤 근심 어린 얼굴로 이름이의 얼굴을 쓸었다. 조금 더 마른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손을 조심스레 치운 이름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중전마마와 더불어 대비마마께서도 저를 못마땅히 여기십니다. 저를 봐서라도 출입의 횟수를 늦춰 주셔요." "이리 보고 있어도 불안한데 어찌 그러오." 침울하게 가라앉은 표정이 안쓰럽다. 이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흔들리면 안 돼. "송구하오나, 저는……." "그 입에서 송구하단 소리 꺼내지 마시오." 보기 드물게 튀어나온 강한 어조의 말에 이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 저조차도 그 어투가 강했음을 깨달은 것인지 아아, 미안하오.하고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허수아비라 하나 나도 이 나라의 왕이오." "……." "중전, 폐위시킬 수 있소. 그러니," "말을 삼가시지요." 저를 보는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 당신조차도 날 무시하는 게요? 묻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니 제 손을 붙잡는다. 차마 뿌리칠 수 없음에 고개 숙이니 턱을 들어올려 저와 시선을 맞춘다. "나도 이 나라의 왕이오. 반복하건데, 중전 따위 없어도 상관 없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위시키라면 시킬 수 있어." "……." "그러나 내가 그리 못 하는 것은," "……." "그렇지 않아도 나를 이리 피해대는 그대가 내게서 아주 고개를 돌려 버릴 것만 같아서," "전하." "그래서 할 수가 없소.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버리는 등을 보고 일어나려 하자 손짓으로 그를 제지한 그는 좋은 밤 보내시오, 하곤 아예 발걸음을 빨리 해 나가버렸다.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머리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싫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정했고, 비록 허수아비라 능멸을 당한다고는 하나 이렇다할 권력을 쥔 한 나라의 왕이었으며, 유독 제게 큰 관대함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볼 수 없는 것은, "……자?" 호위무사직의 세훈 때문이었다. - 얇게 발린 창호지의 일부가 그림자로 가려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이름이 곧게 폈던 허리를 편히 했다. 비로소 작게나마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세훈아, 부르는 소리에 그가 작게 답했다. 응. "들었어?" "……응." 무사는 항상 최측근에 대기한다. 왕과 나눈 대화도 바로 이렇게,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말하는 정도의 거리에서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름아." "……." "도망갈까." 나직이 튀어나온 그의 말에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문 뒤의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뱉었다. "말도 안 돼." "왜 너는 왕의 눈에 띄었을까." "……." "왜……. 하필." 미안해. 작게 말하고 제 문 앞을 뜨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점차 흐려져가는 그 검은 그림자를 응시하기도 잠시, 이름이 벌떡 일어났다. 둘로 겹쳐진 그림자가 칼을 꺼내들었다. 빠르게 달려나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세훈에게 칼을 겨눈 그는, 종인이었다. -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물러나 있는 내시들과 무사들이 둘의 대치 상태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이 넋을 잃은 듯 달려들어 세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제 앞을 가로막은 이름이 어이 없다는 듯 응시한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고작 저놈 때문에 나를 거역했다, 이 말이냐." "칼을 거두시지요." "대답하라." "칼, 먼저 거두시지요." 꽤나 강단 있는 모습에 왕이 헛웃음을 흘리며 칼을 내려놓았다. 손에는 여전히 쥔 채였으나 그 기세만은 확실히 누그러뜨러진 채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누구의 것이냐." "……." "그 말만 듣고 가겠노라. 저놈의 목숨도 네 대답에 달려 있다." "……저는," "말하거라." "전하의……." 전하의,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 떨궈 눈물 흘리자 그가 그런 저를 내려다본 채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울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가 왠지 웃음기가 서린 얼굴로 허리 숙여 제게 시선을 맞췄다. "그는 내일 중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 "싹을 잘라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응?" 너를 가진 것을 없애 버리면 너는 홀로 서게 되니.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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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아 미안해...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