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다녀간 후 며칠간 준회는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상상만으로 그들은 나에게 햇빛이 되어주었다.
동혁이를 그리워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몇번이나 다짐했지만 번번히 눈가를 떠다니는 그 웃는 얼굴 때문에 나는 늘 눈에 물을 머금은채로 잠을 청해야 했다.
끼익-
밤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회였다. 그는 들어와서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서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의자 위에 앉았다.
"어릴 때, 궁에서의 생활이 힘들면 이곳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괴롭혔던 시선들과 소문, 수군거림을 피해 도망쳐온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제 어린 시절의 우울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곳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내 쪽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망설이는지, 왜 그리도 원망했던 아버지와 같이 미련한 행동을 하는지. 이토록 미워했던 누님을 눈 앞에 두고도 왜 망설였는지, 지금도 자신이 들지 않는지 말입니다."
"..."
"어쩌면 선왕보다는 제가, 이 나라를 더 사랑하지 않아서, 이 나라보다는 내 한 몸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부족한 그릇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부탁을 하려 합니다."
"어떤 부탁입니까..?"
"제가 머무는 처소와 이어진 작은 방이 하나 있습니다. 외부 공간과는 차단되어 있어 저만 출입가능하니, 다른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곳에 지내시면서 제 벗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벗이요..?"
"누이에게 바라기로는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목숨값으로 치기에는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 부탁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 편이..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해가 지고, 달이 떠도. 꽃이 지고, 눈이 와도. 늘, 내 곁에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그런 분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준회의 눈동자, 그 뒤의 그늘을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어린 왕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그의 눈동자가 너무 절실해 보여서.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다가가 앉아있는 그를 품에 안았다.
"언제든 나를 죽여도 좋고, 언제든 나를 내쳐도 좋아. 그저 목숨 붙어있는 동안 네 마음대로..."
"그 목숨, 제게 속해있다는 것을 아시면 되었습니다. 저는..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다리시면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준회는 내가 제 어깨에 두른 손을 풀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잘 모르겠다. 잘한 선택이었을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곧이어 몇몇 사람들이 들어와 나를 이끌었다. 궁에 들어가기 전, 나는 사람들이 안내해준 곳에 가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마음 속의 감정들을 씻어내려 노력했다. 그저 살아지는대로 살아가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밤이 어두웠고 나는 들은대로 혼자 궁으로 향했다. 공기가 찼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금세 준회가 있을 방 앞에 섰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시지요."
문을 열자 넓은 방 가운데 앉아있는 준회의 모습이 보였다. 준회는 일어나 내가 지내야 할 곳을 안내해주었다.
방 뒤의 좁은 통로로 이어진 곳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탁상 위로 가지런히 놓인 붉은 옷이 보였다.
"이 옷..."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나, 그래도 홍운의 공주이시지 않습니까. 훔쳐볼 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드리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드리는 것이니 그리 아시면 됩니다."
"이 옷을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시와의 왕이 보내주었습니다."
"..."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주무십시오. 불쑥 나타나지 않을테니 편히 지내시면 됩니다."
준회가 떠난 후에, 나는 자리에 앉아 그 옷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두고 도망치려 해도,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다시 돌아오는 이 옷, 나의 운명에 한숨이 나왔다.
*
준회는 자리로 돌아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힘들었다. 최근 일어난 일들이 모두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진작 잡았어야 했을 누이를 찾는데 며칠을 더 허비했으며, 기껏 잡아온 그녀를 죽이지도 못했다.
어째서 그녀를 죽이지 못했는가, 준회는 합리화를 위해 이유를 찾았다.
내게는 내 편이 필요하다고, 내게도 나를 사랑해줄 가족이 필요하다고 애써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은 연정이 아니라고, 남녀사이의 감정이 아니라고 부정해야만 했다.
피가 통하기에 느껴지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리라, 오래도록 찾았던 누이에 대한 가족애일 뿐이리라, 하고 스스로를 달래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고 온 후로, 그녀를 생각하면 느껴지는 마음 속의 감정들에 동요되지 않으려 며칠을 나랏일에만 몰두했었던 그였다.
이렇게 초라하게 흔들리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채 팔을 벌려 자신을 안아오는 누이를 뿌리치는 일이 버거웠다.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감정 하나 떨쳐내지 못하고 흔들리는 어리고 나약한 자신이 미웠다.
준회는 탁상 아래에서 고이 접혀진 서찰을 꺼냈다. 한빈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한빈을 만났을 때, 준회는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준회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한빈, 그 자의 영리함을 괄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준회는 종이를 펴서 글자를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었다.
'지난번에 말씀해 주신대로, 이제 혼인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실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분이 있는데, 공께서 그 분을 알고 계실 듯 싶습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같이 보내는 이 옷 한 벌 뿐입니다. 왕실의 옷이니, 주인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허하시면 그 분을 제 평생의 반려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한빈은 이 서찰과 함께 붉은 옷을 보내 왔다. 생각은 했었지만, 그녀가 한빈의 궁에서 머문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리라. 이 옷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 둘러대더라도, 한빈이 그녀의 눈을 보았다면 끝난 이야기였다. 동떨어진 대륙에 있는 나라라고는 시와와 홍운 뿐인데, 시와에 없다면 홍운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변명거리는 없었다. 어차피 죽이지 못할 사람, 내어주면 그뿐이었다. 홍운의 존망, 그녀의 운명 같은 것은 칼을 거둔 날 이미 준회의 머릿속을 떠난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회는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 없었다.
내 것이다. 목숨값으로 가지게 된 내 사람이다. 연정이든, 혈육간의 정이든, 마음속에 품고 사모하는 단 한 명의 사람.
준회는 어떻게 해야 그녀를 보내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했지만, 종일 고민을 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다. 평생에 처음 가지는 자신만의 것인 그녀를.
*
"서찰은 잘 전했겠지?"
"물론입니다. 홍운의 왕께서 편지를 이미 받아보셨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봉한 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갖다주었겠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지를 전한지 고작 이틀 되었을 뿐인데, 한빈은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도박이었다. 옷 안감에 새겨진 붉은 구름무늬는 이 옷이 홍운 왕족의 옷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곱씹어보면 그 옷이 그녀의 옷이 맞다는 말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준회 쪽에서 이 옷이 그녀의 옷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럴까봐 오히려 한빈은 자신있는 척 했다. 옷의 주인이 그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양, 자신있는 투로 글을 썼다.
혹시 그 옷의 주인이 그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엎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회색 눈동자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시와를 쥐잡듯이 뒤졌으나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커녕, 떠돌이 장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분명 홍운에 있을 것이다. 그 날, 준회가 찾아왔던 날, 준회가 했던 말들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었다.
준회는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자신있는 태도로 자리를 떠났을 리 없으니까.
준회의 답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한빈은 초조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지만, 어째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해냈는지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녀를 옆에 두고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혹시나 정말로 그녀가 홍운의 공주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한빈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것,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암호닉
김밥빈 님
김까닥 님
김지원 님
무룩이 님
한빈세자 님
구사이다 님
♥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늦어져서 죄송해요ㅠㅠㅠ많이기다리셨죠
기다리다 지치신 독자님들 계시면 어쩌지..엉엉
제가 좀 오래 내려가있어서, 그기간동안 컴퓨터를 아예 못했어요 흑
먹고자고놀고 하다가 이제야 글을 업로드합니다
저를 몹시 치세요!!!
늦게 올리는 주제에 업로드시간도 늦어버려서 너무 죄송해요 엉엉
면목이 없네요
이제 올라왔으니 다시 원 페이스를 찾아서 해볼게요!
늘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달아주시는 독자님들, 추천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