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상태가 말이 아니네.”
담임은 완강했다. 내 꼴이 얼마나 처참한지 똑똑히 확인을 했으면서 무슨 조퇴냐며 당장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구준회가 학교 다닐 때 밑 보였다고 하지만 나한테까지 이러는 건 불공평하다. 나는 일찌감치 조퇴하기를 포기하고 초코우유 하나를 사들고 매점 뒤 벤치에 엉덩이를 깔았다. 무단결과가 되던지 말던지. 사실 무단조퇴를 할 만큼 깡이 쎈 편은 아니다. 나름 막장과 쓰레기 사이를 어느 정도 구분은 할 줄 아는 정도.
“수업 쨌어?”
“아니. 수업 짼 너 잡으러 왔는데.”
재수 없는 반장 놈. 김동혁은 우리 반 최고 모범생이다.
“포기하고 돌아가. 이 꼴로 어떻게 가.”
“구준회가 대단하긴 했었구나.”
“너랑 있을 때만이라도 그 이름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녀석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 나는 별 뜻도 없는 가벼운 사과까지 받아냈다. 김동혁이 돌연 내 옆자리로 와서 앉는다. 나는 풀리지 않는 어색함에 빨대만 연신 씹어댔다. 그런데 무단조퇴랑 무단결과랑 그다지 차이가 있을 거 같진 않은데. 이미 끝까지 빨아먹은 우유를 저쪽으로 던져 재활용 통 안으로 골인했다. 잠자코 숨만 쉬던 김동혁이 문득 내 이름을 부른다.
“생각 정리 좀 해야하지 않겠냐.”
놈은 준회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준회 짐 그대로야. 교복도, 신발도 다.”
두 녀석은 좁아터진 옥탑방에서 함께 자취했다.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던지.”
나는 고작 일주일 만에 준회의 흔적과 마주하려고 한다.
학창시절
어쩐지 최현희네 무리가 조용하다 싶었다. 나는 마르지 않은 교복 덕에 체육복을 입고 등교했다. 정말 가관인 꼴이야. 아이들은 내 모습에 삿대질까지 해가며 킥킥대기 바빴다. 쟤 내가 구준회랑 사귈 때 나랑 친해지고 싶다며 엄청나게 아부 빨던 앤데. 사람의 뒷면과 진심이 이렇게 무섭다. 애초에 누구한테든 선의 같은 건 없는 게 맞다니까.
나는 몇 번이나 감았지만 여전히 찝찝한 머리칼을 한 번 쓸어올렸다. 덩치 큰 몇 명의 놈들이 내 앞자리를 막았다. 저 돼지는, 준회 빵셔틀. 쟤는 준회한테 쳐 맞아서 반 병신 됐다 겨우 살아난 애. 역시나 래파토리는 뻔하다. 구준회 인생 한번 참 열심히 살았네. 덕분에 뒤처리는 내가 하고 하소연할 곳 하나없는 불쌍한 어린 양들의 투정과 객기는 전부 내 몫이 된다.
“야. 니가 그렇게 조이는 맛이 조진다며.”
“….”
“얼굴 하나 반반하다고 따먹히는 게 아니었구나.”
김동혁이 슬쩍 이쪽을 돌아봤다. 아. 이쯤에서 항상 준회가 날아와 이 돼지들 면상을 다 족쳐줬었는데. 매번 상황이 이따위로 흘러가니 슬슬 흔적도 없이 잠적탄 구남친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야. 씨발년아, 우리가 구준회한테 당한 거만 생각하면.”
그렇게 할 짓이 없나. 어차피 구준회는 자퇴하고 없다. 저렇게 주둥아리로 준회 존재를 그리워한다고 뭐가 달라진담.
“낯짝 두꺼운 년. 야. 어차피 구준회한테 그렇게 대준 거 우리랑 한 번만 하자.”
“미쳤냐. 걔는 잘생기기라도 했어.”
꼭 내가 한마디만 하면 주위가 싸해지더라. 상대방 기분 생각 안 하고 말 막하는 건 다 그 녀석한테 배웠다. 좋은 거 남기고 간 건 하나도 없네. 한 세명인가. 내 앞에 자리한 거대한 체구의 녀석들은 갈갈한 목소리로 내 욕을 주고받는다.
우리 학교 애들은 참 유치하다. 일찐놀이가 지들 인생인 줄 알아. 이상에 갇혀 막상 지들이 겪는 현실이 얼마나 더러운지 가히 짐작도 못하는 게 얘들이다. 사실은 누가 누굴 불쌍한 년 취급할 처지가 못 된다. 내가 보기엔 지들 인생이 더 형편없는데 뭐.
“야. 미친년이 돌았나. 지금 니가 당당할 때야?”
“너 최현희랑 하는 말 똑같다.”
“뭐?”
“둘이 사귀어.”
저쪽에서 우리를 관음하던 최현희는 씨발! 하며 내 자리로 쫓아왔다. 웃겨. 구준회 없으니까 사람을 아주 반병신으로 본다. 정도가 있지. 돼지가, 그니까 이름이 임현성일거다.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아 쥐어 내 몸을 올린다. 둘이 힘센 것도 똑같네. 여자한테 손도 댄다. 쓰레기. 임현성이 상스러운 욕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윽박질렀다. 으, 침 튀겨.
“여자라고 봐줬더니 막 나가네, 썅년이.”
“칠 거면 한 대 치고 빨리 끝내.”
허세는 우리 학교 탑일거라고 내가 대신 장담할 수 있다. 최현희가 어서 치라며 옆에서 거든다. 꼴불견들. 임현성이 주먹을 높게 들었다. 쟤는 손에도 살쪄서 꽤 아플 건데. 물론 구준회한테는 상대도 안 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살짝 겁먹은 것 같기도 하다.
“그만 좀 해라.”
오지랖 담긴 말투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내 멱살을 숨 쉴 틈도 없이 세게 쥔 주먹에 힘이 풀리고 나는 그대로 뒷덜미가 잡혀 임현성에게서 벗어나 뒤로 질질 끌렸다. 넓은 등 하나가 내 시야에 틈도 없이 찬다. 굳이 얼굴 확인 안 해도 누군지 알겠네.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김지원은 양보가 없었다. 새끼가.
한 명 상대로 뭐 하는 거야 지금. 김지원은 그대로 나를 다시 끌었다. 뒤에선 어김없이 우리를 상대로 하는 천박한 욕지거리가 쏟아진다. 쟤넨 저래놓고 꼭 따라오진 못 하더라. 야 놔. 나는 김지원의 등을 퍽 쳤다. 재수 없는 자식이. 하루라도 나한테 신경을 끌 순 없는 건가. 나는 목적지도 모르는데 녀석은 계속해서 어디로 향했다. 무슨 흑기사인 줄 알았어, 나는. 쉬는 시간이 마치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김지원은 그제야 걸음을 멈춰 등을 돌렸다. 학생 한 명 없는 텅 빈 복도는 우리 사이를 더 삭막하게 했다.
“너는 겁도 없냐.”
“겁도 있고 존심도 있는데.”
“쟤네 너 진짜 때려.”
“맞으면 돼.”
“너랑 한 번 자보겠다고 어떻게든 해보려는 발정 난 쓰레기들이라고.”
아.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나는 견디기 힘든 무료함에 당장이라도 하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구준회 없어. 쟤네 지금보다 더 심하게 너 건드릴 거야.”
“신경 꺼.”
“너 안 더러워. 걸레는 전혀 아니고.”
“….”
“그니까 네 몸은 네가 지켜. 이건 부탁이야.”
“김지원.”
“내가 지켜주는 건 싫잖아.”
당연하지. 그거야말로 진정한 주제도 모르면서 남 일에 개입질인 한심한 짓거린데. 김지원은 다른 말없이 내 눈을 내려다봤다. 표정 자체로도 사람을 참 숨 막히게 한다. 예전부터 그렇게 사람 신경 쓰이게 툭툭 건들고 다니더니. 지금도 사실 참견이 도를 넘었다. 내가 지랑 특별한 사이라도 되길 원하는 건가. 꿈이 참 크다. 걱정과 염려를 넘어 명령을 한다. 그건 더 이상 배려가 아니지.
나 가도 돼? 김지원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어서 가라며 턱짓했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있는 녀석임에는 틀림없다. 밴드부 나갔더라. 녀석은 내 등 뒤에다 대고 웅얼댔다. 저 꾸준한 참견은 습관인건지 성격인건지. 아쉽네, 같이 무대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나는 그 말에 실소가 터지는 걸 참지 못하고 소리 나게 웃어버렸다. 지랄이 성장을 하네. 대답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좀 살 수 없어?”
“나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김동혁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지가 좀 말려보든가. 매번 난감한 상황이 닥치면 아무런 제지도 없이 묵묵히 훔쳐 보기만 하는 게 제 태도면서 나한테 말은 잘 한다. 김동혁은 됐다. 하며 화젯거리를 돌렸다.
“전학생 못 봤지?”
그런 게 있나. 설령 있다 해도 관심은 없다.
“쟤야. 이름은 김한빈. 알고는 있으라고.”
김동혁이 창가 쪽으로 손가락을 짚었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틀었다. 김한빈? 이름이 예쁘네. 그건 첫인상이었다. 잘 지내면 더 좋고. 반장은 쓸데없는 말을 내 귓가에 박아놓고 자리를 이탈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수업시간의 교실은 여전히 왁자지끌한다. 나는 창문으로 부딪히는 봄바람을 구경했다.
전학생이 예고도 없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여유도 없이 녀석의 눈빛을 받아냈다. 틈이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내 발끝을 감싼다. 나는 끝내 전학생과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결국 그렇게 빨려 들어간다.
안녕. 전학생이 입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쩐지 머리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C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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