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막장 로맨스는 처음이라 4
8. 처음
빗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오후 내내 내리던 빗줄기가 사그라드는 듯 하더니 다시 축축한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정국이 주고 간 우산을 집어들었다. 오늘도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야근 핑계로 떠밀자, 전해주고 간 것이었다. 밤에는 비가 다시 올지 혹시 모른다며.
'1층입니다.'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캄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텅 빈 로비를 걸어나갔다. 집에 갈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겨울밤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시린 밤공기로도 고단할 퇴근길이 비에 젖는 건 더욱 싫었다.
손목에 달랑거리는 접이식 우산을 고쳐들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유리문 바깥에 서 있는 한 인영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우산이 없는 건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미동이 없었다.
우산을 펼치며, 가만히 비내리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선 인영을 힐끔 쳐다봤다.
"...민윤기?"
"어,"
익숙한 옆태. 탁한 회색 머리칼.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이 나를 돌아보더니 살짝 놀란 눈치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곡작업 때문에 미팅이 있었어요."
"아아, 난 이 회사 다녀. 이제 퇴근."
내 말에 고갤 끄덕인 그가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 말고는 손에 든 게 없는 그였다.
"집 가는 거면 같이 쓰고 갈래?"
우산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곳곳에 찰박하게 차오른 웅덩이 위로 계속해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우산 아래 나를 응시했다.
뜸들이는 그의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
"비그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서있게?"
나 불편해하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정곡을 찔린 듯 동공이 확장된 그가 제 머리칼을 털며 민망함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내게 다가온 그가 결국 우산 손잡이를 제손에 옮겨쥐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역으로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까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눈가가 피곤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만날 때마다 무표정이던 그 얼굴이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 건가. 오늘 아침까진 안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나조차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청 친한친구 사이였다며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불편한 티를 내는 그에게 말을 걸자니 괜한 거짓말을 했단 후회가 들 때가 많았다. 지금 이순간은 특히나 그랬다.
둘 사이의 정적이 꽤나 숨막히게 느껴졌다.
민윤기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걷는 것조차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와 너무 딱 붙어 걷는 것이 불편해 살짝씩 간격을 넓혔다. 빗물이 어깨에 고스란히 스미는 것도 모르고.
"더 가까이 붙어요."
그런 내게 몇 번의 시선이 오가더니, 차분한 음성이 정적을 깼다. 축축해진 어깨로 다가온 손이 고민없이 그 위를 감싸듯 그러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 덕에 서로의 어깨가 완전히 맞닿았다.
"비 다 맞잖아."
내 어깨 위에 와 닿았던 그의 손은 제 임무를 다하고 다시 밑으로 떨구어졌다. 무심한 어투는 내게 직접 닿는 대신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행동에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더니, 내가 알던 민윤기가 잠깐 뿅 하고 나타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츤츤거리면서 다정한 민윤기.
갑작스런 내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니, 아니야. 손사래치자 이내 그가 앞을 보며 걷는다. 이번엔 내 시선이 그의 반대쪽 어깨 위로 가 닿았다.
"근데, 그러는 넌 왜 다 맞고 있냐?"
우산 아래 딱 붙어 걷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코트가 빗물에 짙게 물들었다. 손잡이를 잡은 민윤기의 손이 미세하게 기울어져있는 게 이제야 눈에 띄었다.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리며 손잡이를 똑바로 세웠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 아닌데."
민망함에 괜스레 딱딱하게 답한 그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 뒤로도 계속된 의미없는 투닥거림은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멎었다.
꽤나 익숙한 인영이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알았다. 정리가 되지 않아, 무의식 중에 자꾸만 부르던 그 이름.
"...김태형?"
"여주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구를 눈 앞에 두고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왜 왔어."
"옆은 누구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오던 태형이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내게 온전히 꽂히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민윤기와 나를 번갈아보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 왜 왔냐고, 연락도 없이."
재차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센 악력이 내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피할 새도 없이 덮쳐온 고통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손목을 옥죄는 힘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하세요, 얘기."
이렇게 손목 붙잡지 말고. 갑작스레 다가와 김태형의 손을 내친 민윤기가 내 손목을 감쌌다. 나를 제 뒤로 물린 윤기가 태형 앞을 막듯이 섰다.
예상치 못한 민윤기의 개입에 눈앞에 선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봤다. 아릿아릿하게 고통이 퍼지는 느낌에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내 손목을 약하게 붙잡고 있던 손길이 떨어졌다.
벙찐 표정을 지은 태형이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험악하게 물든 눈이 민윤기 뒤로 숨은 나를 응시했다.
"얼마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 만나는 거야."
"..."
"아니면, 헤어지는 것보다 이새끼 만나는 게 먼저였어?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던 거구나."
거칠게 추궁해오는 태형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한 번도 감정적이던 적이 없던 김태형이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은 낯선 공기를 자아냈다.
"아니. 너랑 헤어진 이유에 너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럼 뭔데. 이 사람."
"순전히 네 변한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잖아. 이런식으로 찾아오지마."
"..."
"앞으로 너 더이상 마주치기 싫으니까."
그렇게 헤어지고도 생각나던 태형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또 매정한 말이 나갔다. 낯선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한 발 물러나봤자, 서로에게 독이 될 더러운 관계 밖에 못 될 거라고.
태형이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뒤돌았다. 내 뒤로 따라붙는 민윤기의 걸음소리가 금방 가까워졌다.
태형에게서 보이지 않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요."
주저앉을 뻔한 내 뒤에서 등어깨 언저리를 받쳐올린 그의 손이 나를 지탱했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오자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미안해요. 오해받을 상황 만들어버려서."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고마워, 도와줘서."
어지럽게 내려앉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항상 내눈을 잘 마주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이 괜찮다고 말했다.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이.
9. 맞물린 퍼즐
휴대폰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김태형일 게 뻔했다. 화면을 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엎어놓았다.
"힘들다."
소파에 앉아 힘이 쭉 빠진 몸을 기대었다. 갑작스런 김태형의 등장으로 놀란 마음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통증이 아직까지 뚜렷해서 자꾸만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태형의 등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 그 자체였다. 연락없이 집앞까지 찾아온 것부터 저혼자만의 오해로 인한 폭력적인 행동까지.
무엇보다 낯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코끝이 찡하도록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 왜 눈물이 나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등을 눈두덩이 위에 얹었다. 축축함이 손등을 적신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띵동-'
뭐지. 택밴가. 울리는 벨소리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고서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을 채우는 얼굴을 보자마자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이거. 깜박하고 안돌려줘서요."
뜻밖의 손님은 민윤기였다. 물기를 털어내고 깔끔하게 접은 우산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전화했는데 안받길래. 집에 있을 것 같아서 내려왔어요."
"...아. 그거 김태형인 줄 알고."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집 안에서 삐져나온 빛 때문에 붉게 물든 눈가를 눈치챈 건지, 그의 눈이 잠깐 내 눈가에 머물렀다.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하며 고갤 숙이자 다시 따뜻한 음성이 귀를 파고든다.
"괜찮다면서."
"..."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꽂다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어... 울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 왜 또 눈물이 나지. 손부채질을 하며 눈물을 말리려 애썼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당황한 그를 올려다봤다.
"미안. 긴장 풀려서 그런가봐."
"..."
"온 김에 맥주 한 잔 할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마음이 복잡했고, 그래서 갑자기 술이 당겼고, 마침 집에 미처 먹지 못한 맥주들이 왕창 있던 게 떠올랐을 뿐.
그의 손에 들린 우산을 한 손에 옮겨 들고 현관문을 더 열어젖혔다.
저때문에 다시 눈물이 터진 날 보고 차마 거절은 못하겠는지 민윤기가 엉거주춤 들어왔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거실 한가운데서 어쩔줄 몰라하던 그가 내 손짓에 겨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울어서 그런지 술 땡긴다."
아직 따지도 않은 민윤기의 캔에 짠, 하고 치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나서야 그가 나를 따라 한 입 들이켰다.
사방으로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너 진짜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네. 갑자기 그건 왜,"
"그냥ㅡ. 서로 집에 죽치고 살던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불편해하는 네가 웃겨서."
그제야 제 모습을 깨달은 윤기가 굳은 몸에 힘을 뺐다. 아, 미안해요. 친구였다고 하지만 전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 그만그만. 알겠으니까 미안하면 그냥 마셔."
"아."
"그냥 암말 안해도 돼. 술 친구가 필요한 거니까."
그제야 윤기가 얌전히 맥주를 홀짝였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지만, 아까처럼 그리 불편한 정적은 아니었다.
혼자 먹긴 서럽고, 누군가와 함께 떠들며 먹는 술자리는 싫을 때 내가 딱 바라던 술자리였다. 같이 마시긴 하지만 억지로 대화를 이끌어가지 않는, 적당히 외로움이 채워지는 그런.
" 여주씨. 그만 마셔야 될 거 같은데."
맥주 한 캔으로 끝내려했던 술자리가 어느 새 맥주캔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벌써 혼자 여섯 캔 째인 거 알아요? 옆에서 민윤기가 무어라 말하든 말든, 남은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넣었다.
"끅, 왜 이렇게 취하는 거 같지."
"...그야 많이 마셨으니까요. 이제 진짜 그만,"
그 순간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피아노 전주에 반사적으로 폰을 집어들었지만 이내 다시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진짜 김태형이었다. 다시금 맥주를 들이키며 울리는 벨소리가 멎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한계였는지 고작 한 모금 더 마셨다고 취기가 확 올라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문에 윤기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이 노래..., 놀란 듯한 눈빛이 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아아, 이 노래? 내가 만든 노래야."
"..."
"내가 지금은 회사 직원 나부랭이지만,"
원래 작곡과였다구. 넌 기억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별안간 붉어졌다.
아. 길게 내뱉는 숨결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렇게 찾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더욱 깊게 스며오는 취기가 머리를 댕 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무거운 머리를 툭 떨구었다.
벨소리 하나가 무슨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꿈에도 모른 채.
생각없이 막 써서 뭘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욥... 중구난방 이상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