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아, 밥은 먹고 가야지!"
" 지금 가도 지각이라고!"
학교는 일곱시 사십분까지. 안타깝게도 내가 눈을 뜬 시각은 일곱시 십분이었고, 평소보다 삼십분은 늦은 기상에 다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떡진 머리를 하고 학교에 갈수야 없으니 급하게 머리를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한채 교복 단추를 꿰어 입었다. 셔츠는 왜이렇게 단추가 많은거야, 제길. 평소엔 잘 하지도 않던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엄마는 종종걸음으로 집안을 활보하는 내게 토스트 하나를 쥐어줬고, 솔직한 마음으론 점심까지 버틸 자신이 없어 못이기는척 받아들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도 3교시부터 배고픈 청소년기의 학생한테 아침을 거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한번에 두가지 일은 좀처럼 하지 못하는 탓에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토스트를 다람쥐마냥 우물거렸다. 엄마가 건네주는 오렌지주스까지 원샷하고 나서야 급한 식사가 끝이 났다. 머리는 말리질 못했으니 묶지도 못하고 양말이니 셔츠에 달아야할 리본, 학생증 같은 잡다한 것은 몽땅 손에 쥐고 집 밖을 나섰다. 시각은 삼십분. 걸어서 십오분 거리인 통학길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이번에 늦으면 모의고사 날에 청소하라고 했는데.
나름 빨리 나온건데 죽어라 뛰어야 겨우 세이프를 할동말동 이었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스니커즈를 구겨신고 냅다 달렸다. 오늘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일찍 자야지. 혀섹시대 같은거 안볼거야!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하며 바람을 갈랐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텀이 짧은 횡단보도가 두개 있었다. 횡단보도마다 멈춰서서 양말을 한짝씩 꿰어 신었다. 추한 꼴인건 알지만 학교에 도착해 맨발로 슬리퍼를 신는 것보다야 뭐든 낫겠지. 어차피 꼴사나울꺼 개미새끼 한마리 지나가지 않는 지금이 더 나을 테다.
다급한 걸음걸이로 닫히기 직전의 교문을 들어섰다. 한적한 교정을 달음박질로 가로질렀다. 교목랍시고 아주 씨앗을 가져다 흩뿌리기를 한 모양인지 교정은 벚나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눈처럼 쌓인 벚꽃잎들을 자비 없이 밟으며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에 당도했다. 온몸에 피를 돌리느라 쿵쾅거리는 박동에, 몰아쉬는 숨에 머리는 거진 산발이 되어 정리도 하지 못한 채였다. 스니커즈를 벗어내며 교실로 향하려는데 덥석 하얗고 큰 손이 손목을 잡아왔다.
" 리본."
고개를 숙여 머릿카락으로 시야가 반쯤 가려졌던 탓에 현관앞에 떡하니 서있는 인물도 알아채지 못했다.
전정국.
동공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는 시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했다. 곧장 세상이 빙글거리기 시작했다. 고르게 내쉬던 날숨도 불규칙하게 뭉텅뭉텅 뱉어졌다. 현실에서 다섯뼘쯤 떠있는 느낌으로 전정국, 그 명찰에 달린 이름 석자만을 바라보며 멍을 잡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박터지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아침에 챙겨온 리본이 잡혔다.
" 여기 있는데…."
" 달아야 돼."
어조는 단호했지만 목소리는 유하게 들렸다. 집중하느라 입술이 뾰족해진 것도 모르고 깃을 들어올려 숨겨진 고정용 단추를 찾았다. 단추에 리본을 매달았다. 마음은 급하지, 손은 미끄럽지,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인기척까지 모든 것이 통합되어 총체적으로 괴롭혔다. 한쪽이야 어찌어찌 순조롭게 끼웠는데, 다른 한 쪽이 말썽이었다. 반대쪽 구관에 붙어있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각까지 1분.
" … 어,"
정국에게선 시원한 향의 샤워코롱 향기가 났다. 한 뼘 정도 간격이 남았을까. 바투 붙어선 정국은 아주 익숙하고 태연한 듯이, 마치 내가 저한테 부탁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러운 손길로 리본을 채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잔뜩 굳어 얼어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손길로 단추에 리본을 꿰었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달아? 정작 정국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느새 제멋대로 상상한 퉁박을 주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3초 남짓한 그 시간이 왜이렇게 길게 늘여졌는지 모를 일이지. 이른 아침의 햇살은 연약하게 비쳤다. 녹음은 봄비를 맞고 촉촉해진 채였고, 아까까지만해도 지랄맞기만 하던 벚꽃비가 낭만적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얼어있는 시선은 내 고개 앞에 가있는 정국의 하얗고 큰 손에, 툭 불거진 손목뼈에, 노오란 명찰에 한번. 심장은 아까 냅다 등굣길에 내달린 것보다 쿵쾅거렸고 찰나의 순간엔 호흡도 멈췄다.
그러니까 상대성 이론? 시간 팽창? 물리책에서만 봤을 땐 현실성 없고 이해조차 가지 않던 현상을 몸소 겪었다. 댕댕댕. 정적을 깨고 날 현실로 컴백시켜준 것은 종소리였다. 음, 그러니까 지각종? 급아련해져선 정국을 올려다 봤다. 정국은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하다 결국 입을 뗐다.
" … 올라가."
" 헐, 고마워!"
남색의 스커트를 팔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시선이 따라붙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였다.
그 날 아침 조회시간, 정국은 운동장을 꼬박 다섯 바퀴를 돌았다. 체육특기생이긴 했지만 아침부터 훈련하는 일은 없어서 의아했다. 정국은 뛰는 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수도 없이 많은 교실에 난 창 중에서, 우리 반을 골라내는 것도 용했지만, 우리 반 중에서도 용케 나를 골라내는 건 더 의아했다. 전정국은 숨을 연신 몰아쉬며 눈썹을 찡긋거렸고,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지 못해 하루종일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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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여고 루트 탄 기념으로 씁니다.
아마 썸과 삽질 사이에서 줄타는 판타지물이 될 것만 같은... (아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