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 빙의글,
01
봄날의 로맨스는 흔한 일이다. 새로 만나는 학우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원동력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로맨틱한 분위기 탓이라 생각한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꽃길 아래를 멋들어진 남자와 함께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붕 뜨는 유쾌한 일이지만 뭐.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애초에 남자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집안이 워낙 엄격해야 말이지.
사실 웬만한 여자애들처럼 고백도 몇 번 받아봤지만 전부 They were cars. 차버렸다. 일단 성격도 재수없는 데다가 마스크조차도 성에 차지 않았다. 차라리 돈이라도 많든가. 개중에는 꽤 날린다 하여 지들 잘난 맛에 먹고 사는 골빈 것들도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한심하고 앞길이 어두컴컴한 전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꼴등 신랑감일 뿐이었다.
새학기라면 늘 그러하듯 자기소개로 학기는 시작된다.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루하기 짝이없는 자기소개들과 간간히 들려오는 이상형 소개. 굳이 내 이상형을 꼽자면 미래가 투명하면서 겉모습도 준수한 남자였지만 지금은 나타난다해도 딱히 만날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귓가에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주입식 교육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엔 약간이라도 가졌던 이성교제의 욕구가 이젠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
인문계 남녀공학엔 수많은 커플들이 존재한다. 남녀 합반인 학교는 애초부터 학생들의 교제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벌점 사항에는 분명 풍기문란 항목이 있었지만 교실에서 지지고 볶고 뭔 짓을 하건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이어져, 이젠 풍기문란이란 벌점 사유가 있다는 것마저 흐지부지해져 버렸다.
눈꼴시려운데. 그냥 다 잡아버리면 안 되나. 오늘도 시야를 막고 제 새로운 여자친구와 애정행각을 피우는 짝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저 자식은 왜 계속 여자친구가 바뀐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 얼굴만 번지르르하지 딱히 잘난 곳이 없어 보이는 짝을 왜 좋아하는지 참말로 의문이었다. 저런 거 하나 보자고 옆 반에서까지 달려드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가관이었다.
"백현이는, 누가 제일 좋아?"
"백현이는 우리 해연이~가 쩨에일 좋아!"
얼씨구……. 손발이 퇴화되며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굳이 내 옆자리에서 내뱉는 커플의 모습에 혀를 찼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눈웃음과 애교 섞인 짝의 말투는 헛구역질을 생산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귀여운 페이스는 맞지만. 저 키에, 저 나이에, 저런 말투라니. 곱게 주름잡힌 미간을 검지 손가락으로 눌러 펴곤 눈 앞의 문제집에 집중했다. 제발 빨리 한 달이 지나 짝이 바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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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바가지머리는 책상에 꼭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에 칠판 앞에서 뭐라 지껄이던간에 내 짝은 사각지대인 자리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선생님의 눈을 피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등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칠판으로 눈을 돌렸다. 깨울까 생각도 했지만 지 인생 지가 알아서 살겠지. 뭐. 짝에게서 신경을 끊곤 필기를 이어갔다.
수업 내용을 필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짝을 깨우는 일보다 훨씬 더. 같은 시간이라면 나는 더 중요한 일을 행할 것이다.
정말 곤ㅡ히 잘 잠들어 있던 짝은, 영상을 틀어주곤 순찰 차 돌아다니던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귀를 잡힌 채 강제로 일으켜졌다. 아아아아악! 아파요! 하이톤의 목소리로 교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짝은 쌍커풀 없는 커다란 눈에 물기를 머금곤 선생님께 애원했다. 안, 안 그럴게요. 놔주세요. 아아아..악!! 아프다고요!!! 간절한 울부짖음에도 선생님은 아랑곳 않고 짝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겼다. 한층 높아지고 한층 볼륨이 커져 소리지르는 짝의 모습에, 나는 가만히 귀를 막았다. 저 소음 생성기는 전원을 꺼둬야 조용하다. 그냥 재우는 게 최선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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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여자를 몇 명이나 만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짝은 여자가 많았다. 어제는 해..뭐시기 하던 아담하고 귀엽게 생긴 여자더니 오늘은 성숙미가 흘러넘치는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여자는 바뀌었지만 레파토리는 같다. '나'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애교 섞인 말투. 내 딴에는 별로 귀엽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고작 이런 것에 다른 여자들은 자지러졌다. 어떡해, 귀여워 죽겠어! 등등, 여자 친구가 있는 앞에서도 서스럼없이 내뱉는 짝의 추종자들. 그러고보니 이름이 뭐더라. 되게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백현아, 이따가 데이트 어때?"
"백현이랑 선화랑? 어디로 갈까?"
또다시 시작된 애정 행각 몇 마디로 알아챈 짝의 이름, 백현. 분주히 움직이는 팔 틈으로 스치듯 보였던 명찰엔 가지런한 글씨체로 [변백현]이라 쓰여 있었다. 이름이 변백현이던가. 새삼 신기했다. 저런 사차원 싸이코도 정상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게. 왠지 [도라이]나 [박람둥이], 이런 이름일 것 같았는데. 내가 뭔 생각을 하건 짝은, 변백현은, 고등학교에 올라온 후 자신의 약 서른 여덟번 째 여자친구와 콩을 심었다. 알콩닭콩. 꼬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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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이름은 박햇님이지만 다음 화 부터는 치환하시면 됩니다! 이번 화에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어요... :)
3화까지는 이미 써두었습니다! 조만간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