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 원래 그랬던건 없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어느 갈래에서 선택을 해야하며, 그에 따른 결과를 순응해야만 한다.
내가 '카페 플로르'에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도, 도망칠 수 없어 이악물고 버티는 이유도 선택에 의한 결과에 순응하는것뿐. 다른 이유 따위가 있는건 아니다. 여기로 흘려들어오는 사람들은 각자 남름의 사정이있고, 나 역시도 그렇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동경의 대상이다. 힘들고 지쳐도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으며, 그 힘든 시간이 절정에 다다르면 언젠가 구세주 같은 남자주인공이 등장해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니까.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기에 동경은 했어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며, 결국 내 처지를 더욱 비관하게될 뿐이니까.
W. 됴뭉
나와 마주 하고 있는 남자의 동공이 심히 흔들렸고 그 동공을 자꾸만 따라고 싶던 내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그 눈빞을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피식' 웃으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보기 좋았다. 그에게서 상당히 좋은 냄새가 풍겼다. 담배 냄새와 밤꽃 냄새에 절은 남자들만 보고 상대하던 내게 상당히 낯선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사방에 정적이 감돌고 어색함이 괴롭다고 생각할때쯤 정적을 깨뜨린건 다름 아닌 나였다.
“ 가도 되는건가요? ”
“ 어딜. ”
“ 제가 왔던 곳으로요. ”
“ 거기가 어딘데. ”
“ 지옥이요. ”
그제서야 고개를 떨궈졌다. 눈 앞이 흐릿한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떨어질것 같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오랜만에 나는 눈물에 나 스스로도 놀랐기 때문에.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이곳을 벗어나야해. 주먹을 꽉쥐고 없는 힘을 다 짜내어 일어나려는데 치렁치렁 요란한 드레스가 내 발등을 스쳐 다시 주저 앉았다. 쓰리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남자의 시선은 내 발등으로 옮겨졌고 미간을 좁히는게 뭔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내 발등을 봤는데 얇게 생채기져있다.
“ 아파 보인다. ”
“ 괜찮..아! ”
“ 아..미안. ”
아파보인다면서 손으로 만지려는 이유는 뭔지. 따끔거리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남자의 손을 탁 쳐내버렸다. 남자는 머쓱은듯 손이 공중에 멈춰섰고, 나는 원망의 눈빛이 저절로 지어졌다. 마치 자신이 더 아픈듯 보기좋게 축 처진 짙은 눈썹이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은 표정이다. 괜히 내가 더 미안해지는 그런 표정. “ 괜찮아요.” 라는 말을 남기며 그의 손에 쥐어진 구두를 빼앗아 들려고는하는데
“ 엄마! ”
내 몸은 보기좋게 공중에 띄여졌고, 절대 몸에 익을수 없는 자세가 였기에 언제 불러본지 기억도 안나는 엄마를 찾았다. 바닥에 내 팽겨 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에 남자의 목을 성급히 감싸 안았다. 드라마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안기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 뭐에요! 내려주세요! ”
“ 소리 지르면 안되지. 여긴 호텔이라고. ”
“ ... ... ”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일하는 환경이 이렇듯 항상 듣던 반말이라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 귀 가까이 들리는 그의 저음은 듣기 좋은 목소리 였다. 남자는 주저 없이 호텔 방안으로 나를 데려갔고 살아 생전 처음으로 고급 호텔 내부에 몸을 들였다. 플로르의 룸과는 차원이 다른 향부터가 내게는 이질감으로 느껴졌다.
옅게 맡아지는 남자의 살 냄새는 호텔 안에서는 더욱 진하게 풍겨왔고, 나는 조용히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여전히 그에 품안에 안겨있으니 온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낮은 계단 밑 침대로 터벅터벅 다가간 그는 날 그 위에 암전히 앉혔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주위를 훑었다. 이게 바로 스위트 룸이라고 하는건가. 대리석으로 둘러쌓인 호텔 룸 내부는 잔잔한 주황 조명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는 서울 시내 야경을 한껏 담고 있었다.
“ ...저기. ”
날 혼자 두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남자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쫒다가 급히 불러보지만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채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을 알려줬더라면 이렇게 불안하지도 않았을텐데. 우당탕탕 무언가 무딪히는 소리도 들리고, 쏴아- 하는 물 소리도 들린다. 아마도 그가 들어간 곳은 욕실인듯 하다.
얼마 후 남자는 통 유리로 된 대야에 물을 담아와 내 발 밑에 내려 놓는다. 설마했다. 혹시나 했다. 날 발목 어귀를 부드럽게 쥐어 잡은 남자는 내 거부감의 몸서림에도 불구하고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의 손길을 받아 들이는 수 밖에 할 수 없었다.
“ 뜨겁지 않아? ”
차갑고 뜨겁고가 내게 중요하게 아니었다. 정성 스럽게 내 말을 닦아 주는 그의 손길마다 따끔 거리는 상처에 이불을 살짝 쥐어 잡았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그로 인해 하는 수 없이는 고개를 몇번 주억였고, 남자는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저 작은 웃음을 난 지어본게 언제였는지도 기억 안나는데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을까. 아까 있었던 그 소란스러운 상황을 대처 할때 보였던 매서움과 딱딱함은 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쓰라림이 조금 가시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감이 다시 떠올랐다.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 그건가.
“ 원하는게 있나보죠. 나한테 ”
“ 응? ”
“ 벗으면 되나요? ”
“ ... ... ... ”
“ 아니면 벗겨주기를 기다리면 되는건가. 빨리 해요 그럼. ”
남자가 이번엔 소리내 웃었다. 마치 나를 한껏 비웃는듯이. 뭐가 웃긴걸까 나는 지금 진지한데. 내가 하고 있는일을 대충 짐작했을 테고 이런 나에게 원하는게 없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을터. 남자는 아무 말없이 내 발등을 의미 없이 문질거렸다. 그 중 상처에 닿을때마다 움찔 거리는 반사적인 반응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였다.
남자는 보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타올을 집어 들어, 내 발 물기를 정성스레 말끔히 닦아 내준다. 나는 군 말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 들였다. 그가 일어나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가져오며 내게 뒤늦은 대답을 했다.
“ 그 지옥에서는 그랬나보네. ”
“ ... ... ... ”
“ 여기선 안그래도 되는데. 여긴 지옥이 아니니까. “
“ 그럼 나한테 왜 이래요?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뭔데요? ”
“ 선의? ”
그가 나에게 해줬으면 했던 기대가 무엇이었길래 '선의' 라는 단어가 슬프게 느껴졌고 자존심도 상했다. 급격히 가라앉은 내 표정을 그는 알기나 하는건지 내 발등을 치료하기념이 없다. 발등위에 올려진 밴드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선의. 그렇게 나쁜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베푼쪽에서의 얘기다. 선의를 당하는 내 쪽에 입장에서는 조금 다를지도.
“ 그 선의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가볼게요. ”
“ 잠깐만. ”
“ .... ”
“ 이름정도는 알려줄 수있는거 아닌가. ”
“ 엘리..”
“ 그 이름 말고. 진짜 네 이름 ”
“ ..... ”
“ 있을텐데. ”
“ ...ooo ”
“ ooo. 예쁜 이름이네. ”
챙길거라고는 구두 밖에 없어 챙겨들고 들어왔던 그 문을 찾아 나서려는데 내 팔속을 잡아챈 남자는 다짜고짜 내 이름을 물었다. 플로르에서 쓰는 엘리라는 이름이 아닌 내 진짜 이름. 한참을 잊고 살았던 그 이름을 내 입밖으로 내뱉고 난 후 조금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게 진짜 이름을 궁금해하고 물어봐준 사람이 언 2년간 있었던가.
2년 전 플로르에 발을 디딘 후 난 마담이 정해준 싸구려 엘리로만 살았다. 지옥이 따로 없는 그 곳에서. 서로 더이상 용건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난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었다가 그의 손에 의해 '탁' 하고 문이 도로 닫혔다.
“ 선의. 더 베풀고 싶은데. ”
“ ..... ”
“ 선의가 싫다면 뭐가 좋을까. 너가 원하는 그 어떤걸 붙혀도 좋아. ”
“ 저한테 왜 이래요? 원하는게 뭐에요? ”
“ 벌써 알려주면 재미없지. ”
남잔 그냥 날 보며 웃었다. 비웃음도 아니었고, 사악함을 품은 잔인한 웃음도 아니었다.
“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지. ”
“ 궁금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
“ ooo 너가 날 완전히 믿게 될때. 그때 알려줄게. 그러니까 넌 궁금해서라도 날 믿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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