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정신을 차리고 진환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동안 울리고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선배는 전화를 받았다.
"선배."
-...
"선배!"
계속 선배를 불렀지만 들리는 대답은 없었다. 이쯤 되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환 선배에게 전화가 온 것, 이 곳에서 김동혁을 본 것, 김동혁이 나를 잊어버린 것. 이 모든 일들이 꿈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지만 위태롭게 걷던 김동혁의 뒷모습만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괴로웠다.
전화를 끊고 병동을 나섰다. 나도 김동혁을 잊어야지, 김동혁을 깨끗하게 지워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오랜시간 담아두었던 추억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는구나. 공허하고 허무했다, 내 발목을 잡아채는 그 부름을 듣기 전까진.
"ㅇㅇㅇ!"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이 멎었다. 잠긴 목에서 억지로 짜낸, 다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건 틀림없이 김동혁의 목소리였다.
"ㅇㅇ야."
"..."
"..내 옆에 있어줘."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동혁의 말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됐건, 더 이상 미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열일곱, 열아홉, 스물여섯
"야, 너 어디 갔었어!"
김동혁을 따라 들어간 병실에는 진환 선배가 있었다. 김동혁에게 화를 내려다 함께 들어온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진환 선배가 나에게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선배, 내가 몇번이나 전화를 한 줄 알아요?"
"아, 미안. 동혁이 죽 사러갔다가 휴대폰을 놓고 가서."
전화기를 놓고 갔다니. 그럼 아까 전화를 받은 건 누구란 말인가.
"어,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해. 놀랐지."
"네, 뭐."
"동혁이 상태, 보이는 그대로야."
"..."
"그러니까,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선배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선배의 말문이 끊기자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정적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상황의 주도는 진환 선배와 김동혁이며 나는 그들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진환 선배를 내보내려는 김동혁의 말 덕분에 다행히도 정적은 길지 않았다.
"내가 말할게."
"그럴래?"
"잠시만 나가주라, 형."
어어, 그래. 진환 선배가 병실을 나가고, 병실 안에는 나와 김동혁, 우리 둘밖에 없었다. 김동혁을 만난게 참 오랜만이긴 한건지, 이런 상황이 생각보다 굉장히 어색했다. 병실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 김동혁이 앉아, 하며 자신의 침대를 내 주었다. 그래놓고 자신은 침대 옆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았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저, 내가 의자에 앉아도 되는데.."
"내가 의자가 편해서 그래."
"아.. 그래?"
"응."
너무 단호한 -예전부터 쓸데 없는 것에 쓸데 없이 단호했다- 김동혁의 대답에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김동혁의 시선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대응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도 똑같이 쳐다보려고 했으나, 잠시 마주친 눈이 묘하게 쑥스러워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는 김동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궁금한 거, 혹시 있어?"
물음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궁금한거야 당연히 있었다. 다만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갈피조차 잡기 힘들 뿐.
"너무 많아서 뭐부터 물어야 할 지 모르겠어."
"내가 대충 말해줄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김동혁은 생수병을 집어들어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음, 일단 큰 것 부터 설명하자면.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이고, 난 여기 환자야."
"..."
"그 말은 곧, 내가 시한부란 소리."
그 말을 하는 김동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내 심장은 마구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아까 마주쳤을 때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충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런 표정 짓지마. 미안해지잖아."
"아, 미안."
"네가 왜 미안해."
김동혁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
"..."
"마지막은 너랑 보내고 싶다고 형한테 떼썼거든."
"..."
"그래서 형이 널 불렀고, 네가 여기 있는거야."
"그랬구나.."
"근데 지금 엄청 후회 돼."
난 참 못된 놈인가봐. 끝까지 널 웃게 해주진 못하나보다. 김동혁이 내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거칠한 손가락이 내 눈가를 지나자 맺혀있던 눈물이 번졌다. 덕분에 눈가가 시원해졌다. 그러나 거기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막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자신을 탓하는 김동혁의 모습이 너무 아파 보여서. 바싹 마른 입술과 푹 패인 볼이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다.
"동혁아."
후회스러웠다.
"안 아프면 안 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잘못했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제발 살아줘."
어릴 적, 네가 나를 사랑했던 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