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공학의 묘미 1 : 포카리스웩
w. 스칼렛
문학 선생님의 판서는 난해했다. 대개 주가 되는 것은 말로 하고, 맥락없는 단어들만 칠판에 적는 식이었다. 가령 대유법을 설명했다면, 그날 칠판엔 빵과 죽음만이 덩그러니 써져 있었다. 문학에서 처참한 점수를 맞고 난 이후론 열심히 필기를 받아적는 편이었다.
" 그래서 시적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 '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오후 수업은 대개 무료했다. 이동 수업이 오전에만 몰려있어서 오후엔 문학이나 영어, 수학같은 과목들이 대거 분포해있었다. 이미 몇 명은 책상과 물아일체가 되어선 바닷바람에 반건조된 오징어의 행색을 하고 있었고, 그 덕에 간만에 교실은 일상적인 고요를 맞이했다. 문학선생님의 굵직한 목소리는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고장난 선풍기에 휩쓸려 불었고, 교실은 사각거리는 필기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나른한 공기에 문득 졸음이 몰려와 턱을 괴었다. 이 자세로 있으면 턱 커진다고 했는데.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꺾었다.
" 이 시는 행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지. 이래서 안정감이 느껴진단 거고,"
전정국이었다. 옆분단의 같은 줄. 졸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볼 만 했다. 한쪽 손엔 정갈히 샤프가 들려 있었다. 페이지는 수업 시작할때부터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새였다. 책도 깨끗한 걸 보아하니 시작과 동시에 잠들었구만. 교과서에 코를 박을 듯 푹 고개를 숙인 주제에, 완전히 자는 건 아닌지 책상에 머리를 기대진 않은 채였다. 아침부터 너무 고생했나. 운동장을 뱅뱅 돌던 녀석의 모습 바로 뒤로 선도부 친구녀석이 해줬던 말이 떠오른다.
' 아, 이름아. 너 전정국한테 고맙다고 인사 했어?'
' 무슨 인사?'
' 쟤가 암말도 안하든? 쟤 아까 아침에 운동장 돈거, 너 안 잡고 보내줬다고 생활지도부 쌤한테 완전 깨지고 벌 받은 건데?'
' … 어?'
' 쌤이 너 몰래 올려보내는 거 보셨나봐. 누구냐고 말하라고 그러는데 같은 반이라 그런가, 끝까지 대답 안하데? 생지부 쌤이 운동부도 관리하시잖아. 훈련 설렁설렁 하더니 나사 빠졌냐고 아침부터 운동장 뛰라고 시킨거잖아.'
불을 쪼 듯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래서 자꾸 날 쳐다봤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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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가, 이름아?"
" 매점. 같이 갈래?"
" 당연한걸 뭘 묻냐? 수연이는 쵸코에몽 사죠."
이럴까봐 혼자 몰래 가려던건데 대각선 앞에 앉은 수연에게 딱 걸려버렸다. 인중을 늘리며 썩은 표정을 하고 있자 애살있게 팔짱을 껴온다. 친구 좋은 게 뭐냐? 이럴때 한번 얻어 먹는거지! 등판을 팡팡 쳐대며 하는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럴때만 친구라지.
코랄색 지갑만 달랑 들고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5교시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매점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 억수로 많네. 얼을 빼놓고 있다가 큰맘먹고 발을 들여놓았다. 충동구매가 잦은 편이기도 하고, 용돈이 많은 편도 아니라 매점에 들르는 일은 손에 꼽았다. 그걸 아는 수연도 사방에서 밀쳐대는 사람들을 막으며 물었다.
" 새삼 매점엔 웬일이야."
" 뭐. 나는 오면 안되냐?"
툴툴거리며 음료코너에 다가갔다. 카운터를 지나니 그나마 사람이 한산하다. 냉장고 앞에 멀뚱히 서서 음료를 골랐다. 수연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초코우유를 손에 든 채였다. 이럴때만 잽싸지. 밉지 않게 흘기자 귀여운 척 표정을 지어보인다. 비웃음으로 일갈하고 다시 냉장고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까 수연의 말대로 '웬일로' 매점에 당도한 이유는 전정국 때문이었다. 나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운동장을 몇바퀴를 뛰었는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데 답례를 안하는 건 내 속이 편치 않았다. 물론 남 난처한 모습 못 보고, 차라리 제가 이고 간단 마인드는 전정국이 반장이 된 이후로 숱하게 접해왔지만서도 그랬다. 막상 내 일을 그런 식으로 도와줬다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하고 괜히 뻘줌하고. 그래서 무턱대고 오긴 왔는데 아는 게 한개도 없었다. 뭘 좋아하고 평소엔 뭘 마셨는지. 간질거리는 눈썹을 긁었다.
초코 우유? 파란색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초코우유는 학교를 지나다니는 애들이 죄다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수연도 먹고 있는데. 이걸 사? 고민하다가 운동부란 사실을 떠올려냈다. 체중감량 같은거 하는데 괜히 방해되는거 아냐? 모의고사 찍을때도 안하던 고민을 한낱 냉장고 앞에서 진지하게 했다. 오히려 초코우유 보단 흰 우유가 잘 어울리는 상이지. 근데 흰 우유는 호불호 엄청 심한데. 안 좋아하면 어떡해?
" 성이름! 얼른 와서 계산하라고!"
에라, 모르겠다. 매점을 우렁우렁 울리는 수연의 목소리에 마침 시야에 포착된 캔음료를 들고 냅다 계산을 해버렸다. 꼴랑 반 남자애 음료수 사주는데 뭐 이리 고민을 해? 붐비는 사람들 때문이었는지, 홧홧해진 얼굴의 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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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은 뭔가 감투가 굉장히 많은 녀석이었다. 학급 반장부터 시작해서, 축구부 주장에, 오늘 아침 선도부까지. 반장이나 선도부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무슨무슨 당번이나 명예학생같은것도 모조리 그 애 몫이었다. 활발하고 장난기많은 지금에서야 너무나도 동떨어졌지만, 학기초의 전정국은 그러니까 낯가림, 이란 걸 하고 있었다. 근데 그 낯가림도 영 딱딱하고 어색하기만 한 류의 것이 아니라, 서글서글하게 예쁘게 웃는 낯이라 합격점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죄다 눈에 설은 얼굴들이라 자기 보호 차원에서 쌓은 벽을 누구도 쉽사리 부수지 못했던 즈음이었다. 그 애에게 시선이 간 것도 무료했던 그 즈음. 풍성하게 핀 교정의 벚꽃 나무들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박수소리에 화들짝 놀라 교단쪽을 바라보았다. 멀끔한 외모에 늘씬한 키였다. 단정한 검은 머릿칼과 은하수를 박아놓은 듯한 반짝거리는 눈동자. 아니, 진부하지만 정말 이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애였다. 누구라도 처음 보면 그렇게 묘사할 수 밖에 없을거라 감히 단정할 수 있었다. 처음 볼땐 그렇게 묘사하고, 그 다음부터 그런 것들을 본다면 전정국 같다, 라고 하겠지.
" 안녕하세요. 반장 후보에 출마하게 된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턱을 괴고 그 애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교단에 오를때까지만 해도 낯설은지 배시시 웃는 낯이었는데 어느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단단한 목소리와 약간 뭉개지는 발음에 웃음이 절로 배어나왔다. 남들이 하면은 뻔하고 진부할법한 구구절절한 내용이었음에도 그 애의 목소리를 입고 나오면 매혹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이런게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라는 건가. 망할. 난 어쩔 수 없는 탐미주의자였다.
손바닥만한 하얀 종이에 '전정국' 모나지 않은 글씨로 꾹꾹 눌러 이름 석자를 적어내었다. 그 이름 석자가 나중엔 종이가 아닌 다른 곳에 쓰여질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정국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이 되었고, 본인 스스로도 의외였는지 얼떨떨하게 당선 소감을 말했다.
" 아…, 일단 정말 감사하구…,"
정말 기대를 안한건지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저가 생각해도 우스운 소감이었다. 녀석은 눈꼬리를 휘어 말갛게 웃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이 영 허투로 한 건 아니었는지, 바로 다음날 정국은 하얀 봉지를 들고 왔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유세를 하듯 큼지막한 손에서 하나씩 건네는 건 요구르트와 초콜릿이었다. 말도 안되는 조합이었지만, 제 용돈을 쪼개서 샀다는 녀석의 말간 웃음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이어폰을 끼고 있는 채라 눈 앞에 그 애가 와있는지도 눈치 채지 못했다. 듣기평가를 하던 음성을 멈추고 한쪽 이어폰을 빼냈다. 하얗고 단정한 손에 들린건 요구르트 두병 이었다. 한손엔 비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남은 걸 주려는 모양새였다. 아웃사이더를 위한 동정의 손길인가. 여중을 졸업해 철벽력 만렙이던 난 무표정하게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물론 그 표정이 지속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녀석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특급 미소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 이거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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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나 준다고?"
" 싫음 말든가."
캔음료를 건넸던 손을 거두려는 시늉을 하자 다급하게 뺏어 드는 전정국이었다. 아니야, 좋아. 두꺼운 애굣살이 접히는 모습에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발육상태를 보면 웬만한 성인은 한쪽 팔로도 이길 법한데, 얼굴엔 앳된 티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한쪽만 생긴 쌍커풀이 그랬고, 두텁게 자리한 애굣살이 그랬고, 미처 빠지지 못한 젖살이 그랬다.
" 아침에 나 때문에 뛴거라며."
" 어떻게 알았어?"
" 그게 중요해? 그냥 내 이름 대면 되지, 뭘 미련하게 뛰고 있냐?"
이런 뜻으로 하려는 말이 아닌데, 말이 자꾸만 퉁명스레 나갔다. 성이름 병신. 그러니까 미련하단 뜻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뛰어줘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은건데.
" 그래서 고맙다고?"
" 어.. 응?"
" 잘 마실게. 나 이거 완전 좋아하거든."
해사하게 웃는 녀석은 파아란 색 캔에 든 포카리스웨트를 좌우로 살짝 흔들며 그랬다. 어,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우물거리며 덧붙였다.
꼭 저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포카리 스웨트를 닮은 전정국. 완벽한 명제에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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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뚜렷이 정해놓은 연재주기는 없다지만 너무 늦었네요...
시험 하나 끝날때 하나씩 오는 것 같은 그런 예감.... Torr...
유월 모고를 과감히 망치고 기말을 준비하러 떠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연재물은 너무나 벅차네요ㅠㅠ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스칼렛 되겟슴다.
늦게 올뿐 안 오는건 아니에요 ;ㅅ; (쭈굴)
+ 사진은 남묘를 구상하게 만든 정국이짤이에요! 짝사랑 욕구에 불을 지르는...... 현실은 여고.....* 메르스 조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