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미친놈. 내머리카락을 샤프에 하나 핸드폰 케이스에 하나 지갑에 하나 껴둔다. 더 이상 상대하는게 더 힘빠지는 일이란걸 뒤늦게 안 나는 그대로 엎드려 숙면을 취했다.
그 뒤에 덮여오는 전정국 와이셔츠 덕에 조금 더 푸근한 잠을 잔거 같긴 하지만.
'토요일 아침 9시까지 운동장 집합 -개-'
오늘 반단합같은 귀찮은걸 굳이 굳이 하겠다는 담임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날라오는 단체 문자에 나는 벌써부터 내일이 두려워졌다.
반 단합이면 전정국도 오겠지, 내가 기분좋은 토요일도 전정국의 면상떼기를 봐야해? 가족행사 있다 그러고 빠질까...
'학부모님들한테 확인 전화 드렸다 빠지면 뒤진다 전원참석 -개-'
담임이 젊은데 결혼을 안하면 학생들이 고생한다.
당연히 남고라 단합에 멋부리고 오는 새끼들은 없었다. 다들 추리닝에 방금 막 자고 일어난듯한 옷차림이었다.
졸려죽겠다는 얼굴을 한 아이들 입에선 욕짓거리가 나오고있다.
물론 나도 아직 잠이 덜 깨 때아닌 잠 투정 중이었다.
그런 나와 상반되게 신난다는 얼굴을 한 전정국만이 내 옆에서 내 부은 얼굴을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찍고있었다.
"그만찍어 좀"
"진짜 신기하다 눈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붓지?"
"..."
"눈이 3자야 존나 신기해"
"...하지마라"
내 얼굴을 이리저리 찍던 전정국은 핸드폰을 담임한테 뺏기고 나서야 그만뒀다. 좀 있다 담임한테 몰래 빼와서 사진 다 삭제해야지.
"다 왔냐"
"예"
"야 그럼 둘씩 짝지어봐"
담임의 말에 모든 아이들이 짝을 찾기 시작했고 나도 당연히...다들 내 눈을 피한다. 왜, 얘들아 나랑 짝하기 싫어..? 나 왕따야...?
"지민아 나랑 짝하자"
"대박싫음"
내 손을 잡아오는 전정국에 싫다며 손을 놓으려 하자 더 세게 잡는 전정국이었다.
"쌤 다 지었는데 뭐해요!!!"
"짝피구"
담임의 말에 표정이 굳는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짝피구하면 남녀공학의 로맨스에서나 보던거 아닌가.
남녀가 짝을 지어서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고 둘이 그러다 스킨쉽도하고 뭐 그런거 아니냐고 미친 무슨 남고에서 짝피구야 짝피구는.
"지민아 너가 더 짧으니까 내가 지켜줄게 내 뒤에 숨어"
이 상황이 즐거워 보이는건 전정국뿐이었다.
맨 처음 똥씹은 표정과는 다르게 모두들 짝 피구를 즐기고 있었다. 이 불쾌한 짝피구를 즐기지 못하는건 나뿐인거 같았다.
나를 지키겠다던 전정국은 신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녀 나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렇게 끌려다니기를 한참 슬슬 나도 재미가 붙어 이제는 내가 아닌 전정국이 끌려 다니고 있었다.
"야 박지민 맞춰!"
날 맞추라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더니 상대편 수비로 나갔던 녀석이 내 얼굴을 향해 공을 던지려 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공에 맞게 되겠구나 싶은 그짧은 순간에 전정국의
큼지막한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전정국의 얼굴로 튕겼다.
"야 이 개새끼야 우리 지민이 맞을뻔했잖아!!!"
공을던진 녀석을 향해 소리지르는 전정국의 얼굴은 코피가 터져 보기 흉했다.
"야 이 미친놈아 지금 박지민이 문제냐? 너 코피나!"
"쌤, 얘 피 많이나는데 병원 가야하는거 아니에요?"
담임은 전정국 코를 몇번 만져보더니 괜찮다고 잠깐 쉬면 나을거라고 하셨다.
"짝꿍이 좀 챙겨줘"
"..네"
평소에는 드럽게도 짜증나는 전정국이었지만 나때문에 다친거니까..절대로 고마워서는 아니다. 수돗가에서 세수하는 전정국에게 수건을 건네주고 휴지를 뜯어와 전정국 코에 밀어넣었다.
"그러게 왜 설쳐서 혼자 다치고 그러냐.."
"어 지금 오빠 걱정하는거야?"
"그 놈의 입은.."
"아 나 줄거있는데"
코에 휴지를 꽂은채 나에게 줄게 있다고 가방쪽으로 기어가는 전정국의 모습이 꽤 병신 같았다.
"짠"
"이게 뭐야?"
"요즘 초등학생들 좋은 장난감 쓰더라 동생걸로 하나 만들었어"
전정국이 내게 내민것은 찰흙으로만든 분홍 두더지 볼펜이었다.
"귀엽다"
"그치, 너 닮은 두더지야"
"죽을래?"
"눈 붓기도 안빠졌는데 째려보지마 못생겼어"
"언제는 귀엽다며"
"응 뽀뽀하고싶다"
"..미친놈"
"응 난 지민이한테 미쳤지"
"하아"
"어 지민아 얼굴빨개, 어디 아파?"
"아, 아냐 안아파 더워서 그래"
사실 쪽팔려서 얼굴이 빨개진거다. 전정국이 맨날 공주 공주거리면서 놀리긴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직접적으로 뽀뽀하고 싶다고 말한건 처음이다.
그리고 내가 전정국의 개소리에 쪽팔려하는것도 처음이다.
그래 내가 전정국한테 빚진게 있으니까 미안해서 그러는거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아직도 당황스럽고 쪽팔리다.
옆에선 전정국이 가방에서 꺼낸 가정통신문으로 모자를 접고있었다.
그래 저런 또라이한테 내가 무슨, 그런데 야속하게도 가정통신문에 크게 적힌 글자들을 보는 순간 나는 또 당황하고 쪽팔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는 자는것도 귀엽다.'
우여곡절 끝에 담임이 준비한 단합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집에 가게 되었다. 중간에 덥다고 수돗가에서 물 놀이를 하는 탓에 모두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이꼴로 버스타고 집에는 못가겠다 라는 생각에 걸어서 집에가기로 했다. 집가는 방향이 전정국과 같은 방향만 아니면 좋았겠지만.
"지민아"
"응"
"배고프지"
"응"
"우리집갈래?"
"아니"
"왜!"
"...그냥"
평소의 전정국이라면 아무생각없이 가서 먹고 나왔겠지만 오늘의 전정국은 너무 위험했다. 아니 전정국은 평소와 다름없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위험한건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