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문앞에서 실랑이 벌이다 겨우겨우 거실로 들어와 티비를 켰다.
들어 오는길에 아마도 전정국이 숨겼을 소파 밑 많은 우산들을 보고도 모른척 한 이유는 나도 모르니까 비밀로 하기로 하자.
저번에 보고 존나 노잼이었던 영화를 보고싶다고 보자고 그렇게 박박 우기더니 영화 시작한지 30분만에 잔다.
나는 어차피 한번 본 영화라 흥미도 없고, 이 영화 보자던 박지민은 이미 자고있으니 리모콘으로 티비를 끄고 자리 정리를 했다.
침대에서 재워야지 우리 지민이. 이불로 박지민을 둘둘 싸 들쳐메고 방으로 향했다.
움직여서 깰 만도 한데 곤히 자는거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했나 보다.
이불에 둘둘 말려서 자고 있는 박지민을 보자니 얼굴도 붓고 눈도 존나 부어서 벌레같다.
안그래도 눈 두덩이에 살도 많은데 붓기도 잘 붓는다. 눈 뚱땡이. 귀여워 죽겠다.
여기저기 얼굴을 조물거리니 귀찮은지 찡얼 거린다. 아 존나 귀엽다 진짜. 자는 박지민 얼굴에 몰래 뽀뽀한적은 많지만 매번 할때마다 설렌다.
짧게 눈 두덩이에 뽀뽀하니 얼굴을 이불속에 폭 숨긴다. 하아 귀엽다 내새끼.
아까 욕실에서 얼굴만 내밀어 속옷 빌려달라며 혼자 쫄은게 귀여워서 진짜 입에 뽀뽀 백만번 할뻔했다.
샴푸에서 내 냄새가 난다는데 내 냄새가 박지민한테도 난다니 존나 행복하다.
내옷, 내 냄새, 내 이불에 덮여있는 지민이를 보자니 이게 참행복이 아닌가 싶다.
"지민아 좋아해 진짜로"
요즘 내가 이상하다.
"지민아!"
"아,응"
"어제 너 생각하면서 집에서 접었어!"
가방에서 색종이로 접은 눈만 존나게 큰 개구리를 꺼내며 자랑스럽다는듯이 내 책상에 올려놓는데.
"이거봐 내가 너 생각하면서 눈도 뚱뚱하게 그렸어"
"...."
화가나야 정상인데.
"이거봐 귀엽지"
"...응 귀엽다"
전정국이 내생각 하면서 접었데, 내 생각 하면서, 내 생각을했데, 내 생각.
"어디아파? 얼굴 빨개"
"..아니야, 나 졸려 잘래"
"응 잘자, 지민아"
평소랑 똑같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전정국인데,
"꺼져 우리 지민이 개구리야"
"병신이 초딩이냐?"
"누가 누구보고 초딩이래"
"육성재가 전정국보고 초딩이라 했는데?"
"인중 개 때린다 역삼각형 새끼야"
옆에서 유치하게 육성재랑 말 같지도 않는 말 싸움하는 전정국이
"박지민 발 걸레 주제에"
"닥쳐 우리 지민이 깨"
좋다.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에가서 누워있었다. 옆에서 전정국이 어디가 아프냐며 낑낑거리며 물어왔지만 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이새끼야, 라고는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냥 닥치고 양호실로 왔다.
난 좀 생각이 필요했다. 박지민 인생 18년 중학교때는 나름 여자친구도 사귀고 인기도 많았다. 처음 남고로 배정받았을때는 그래 사나이 체면에 눈물도났다.
아름다운 고교 시절을 냄새나는 남자들과 보내야한다는 절망감도 꽤 컸다. 그리고 남고에 와서 전정국을 만났다.
초면에 나한테 귀엽다고 공주라고 별 지랄을 떠는데 정말 소름이 끼쳤다.
근데, 왜, 갑자기 나는 전정국한테 가슴이 떨리는걸까. 평소와 다름없는 그저 나를 놀려먹기위한 행동인데 나는 왜 갑자기 전정국한테 설레는걸까.
내가 게이가 된 건가.
딱히 게이를 혐오하는건 아니었다. 오히려 게이친구가 있으면 재밌겠다 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그 게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였지만. 그래 그렇다고 전정국이 게이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전정국은 내가 귀엽다고 귀엽다고 별 지랄을 다 떨면서도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거 같다.
확실하게 사귀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끊임없는 여자들과의 연락이 내심 부럽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국이 게이라고 칭하기엔 다른 남자들한테 적대적이었다.친구들 끼리는 대한민국 남고생들의 시발데레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언행이 격했다.
그런 정국이 왜 유독 나한테만 잘해줄까. 내가 뭐 어디 배다른 전정국의 동생이랑 닮기라도 한걸까.
"지민아!"
불쑥 양호실 커튼을 치고 들어온 전정국때문에 깜짝 놀라 이불을 뒤집어 썼다. 지금은 전정국 얼굴 못 보겠는데, 보면 눈물날거 같아
"지민아 많이 아파?"
"...수업시간인데 어떻게 왔어"
"너가 너무 아파서 걱정돼서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하고 왔어"
"....수업들어가"
"많이 아파? 조퇴할래?"
"아냐, 수업들어갈게 들어가 얼른"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가자"
"가라고"
"싫어"
"...."
"너 이불치우면 갈게"
내 이불을 끌어내리는 전정국의 손을 쳐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꼴보기 싫으니까 가라고 좀!"
"....많이 아픈가보다 우리 지민이, 푹 쉬어 미안"
전정국이 일어나 양호실 밖을 나감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 이 순간 마저 전정국이 우리 지민이라고 한게 너무 좋아서, 그런 내가 더러워서 울었다.
결국 학교를 조퇴하고 하루를 꼬박 잤다. 새벽에 중간에 깨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 3건 문자 5건, 그리고 카톡 67개가 와 있었다.
'지민아 많이 아파?'
'귀찮게 해서 미안, 내일은 아프지말고 꼭 와'
'내일 내가 학 10마리 접어갈게 우리 지민이 아프지말라고'
'미안해ㅠㅜ'
'보고싶다'
모두 전정국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1년 넘게 봐왔던 전정국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그리고 나도 제 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하루를 꼬박 새워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전정국을 피하는것, 자리를 바꾸기 까지는 3일의 시간이 남았다.
3일동안 옆에서 개무시를하면 그래도 자리가 멀어지니까 전정국이랑 덜 부딪히겠지.
학교에 오자마자 학 10마리를 건네는 전정국을 무시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엎드렸다. 옆에서 안절부절 눈치보는 전정국에게 무척이나 말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노래가 한 3번쯤 바뀌었을 무렵 나도 슬쩍 잠이 오려던 찰나 내 위로 덮여진 후드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교실 문 밖으로 교복만 입은채 나서는
전정국의 뒷 모습에 눈물이 왈칵났다.
박지민님이 전정국님에게 개무시를 시전했습니다. 3일이 지나고 자리가 바뀌었다. 나는 1분단 맨끝 전정국은 4분단 맨끝으로 떨어졌다. 3일이 지나고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났다.
나는 여전히 전정국을 개무시중이고 전정국은 여전히 내게 말을 건다. 가끔 같이 하던 하교길마저 이제는 매일 내 옆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나는 필사적으로 전정국을 피했다.
그리고 전정국은 필사적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전정국이 계속 앞으로도 이렇게 내 하교길에 같이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정국과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전정국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만큼 전정국은 내게 당연한 존재이고 익숙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