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W.Schnee
Prologue.
비가 온 다음 날은 무더위라더니, 맑게 갠 하늘에 해가 떠올라 대지를 뜨겁게 달궜다. 흑색 아스팔트가 녹아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신발에 쩍쩍 달라붙었다.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서 책이나 보고 올 심산으로 집을 나선 게 후회가 되는 찰나였다. 그 와중에도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눈에 보여서 달걀 하나를 땅 위에 까보고 싶은 호기심이 솟구쳤다.
도서관은 소름 돋는 냉기로 나를 환영했다. 인중에 땀 차게 걸어온 보람이 있네. 열람실은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는 토익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찌나 집중하던지 책이 뚫어질 것만 같았다. 동기부여를 받아 나도 오랜만에 양식을 쌓아 보고자 빠르게 눈을 굴려 책꽂이에 나열된 책들을 훑었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단 두 가지. 첫째, 제목이 맘에 들어야 한다. 둘째, 외모지상주의 폐해의 극단적 사례인 나는 언제나 외적인 면을 중시했는데, 그런 나를 사로잡는 표지 디자인. 이 두 가지면 충분했다. 그러나 한참을 둘러봐도 조건에 충족하는 책이 보이지 않았다. 어쩜 한 개도 없냐. 투덜거리며 서양 문학 코너로 발을 돌렸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책은 없었다. 포기하고 되돌아가려 할 때, 나는 맨 마지막 칸 구석에 숨겨진 그 책을 발견했다. 유독 다른 책들 보다 키가 작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이었다. 가엾어라.나는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어 조그만 책을 집어들었다. 겉표지가 온통 새하얗고 제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신비로운 이 책은 여우같이 내 두 가지 기준을 통과했다. 제목이 없으니 호불호를 판정할 수가 없었고 표지마저 눈처럼 하얘서 딱 잘라 음, 별로야. 라고 말할 수 없게 했으니 말이다.
왠지 모르게 흥분이 돼서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생김새만큼이나 스토리도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매일 십년이라는 세월을 오가는 즉, 타임슬립을 하는 한 여자였다. 주인공은 책에서 이븐(Even)이라고 칭하는 짝수 날에는 스무 살로, 오드(Odd)라고 칭하는 홀수 날에는 서른 살로 살아간다. 어느 날 여자는 이븐에서 만난 남자와 지독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없는 오드가 괴로워진다. 때문에 오드에서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기 위해 그를 찾아다니는 그런 이야기였다. 스토리에 한참 빠져있는데 이야기가 중간에 끊겼다. 이야기의 끝맺음이 없는 것이었다. 결말없는 스토리라니. 책의 마지막 다섯 장은 흰 여백으로 남아있었다.
누가 뜯어갔나...?
뜯긴 흔적은 없었다. 원래 결말이 이런 건가. 열린 결말? 나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뇌해야 했다. 결론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 외에는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내린 결론에 충실하기 위해 독자의 입장으로서 상상에 빠졌다. 여자는 남자를 찾았을까? 딱히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븐에서 남자에게 십년 전에 어디에 살았어? 라고 물은 다음 찾아가면 단번에 해결되는 거 아닌가? 아니다.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설령 만난다고 해도 스무 살인 그 때도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나는 한참을 상념에 빠져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대출했다. 집에 가서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다음 날,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엄마의 푸짐한 아침을 기대했는데 왠일인지 부엌은 냉기가 감돌았다. 어디 갔나? 의아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안방 역시 한동안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썰렁했다.
“뭐야. 나만 빼고 어디 놀러 간 거 아니야?”
예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다. 약이 올라서 얼굴이 붉어진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있는 힘껏 안방 문을 닫고 쿵쾅거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 던져진 핸드폰을 집어 들어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괘씸해 괘씸해. 매번 이런 식이야. 아무리 안 일어나도 그렇지 어떻게든 깨워서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몇 번의 신호음 뒤에 하이톤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야 왜?
“엄마 어디야!”
깜짝이야. 얘 엄마 귀 안 먹었어. 조용히 좀 말해.
“글쎄 어디냐고!”
집이지 어디야.
“집? 엄마 집에 없는데?”
어머. 너 제주도 왔니? 일은 어쩌고?
“......엄마. 잠시만 끊어봐. 다시 통화하자.”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던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무심코 본 거울에 비친 통화하는 여자는 분명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다. 거울로 다가가자 안에 있는 여자도 가까워졌다. 말도 안돼. 머리는 언제 자른 거야? 염색은? 저 나이 든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헛것을 본 것이라 확신했다. 눈을 꼭 감았다가 아주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펀치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나였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을 때, 난 어디에선가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닥에 던져진 가방 사이로 보이는 어제의 그 책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난 내가 책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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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번에 같은 내용으로 1화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내용의 완성도가 낮아서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그래서 삭제하고 내용도 조금 수정해서 다시 업데이트 합니다 여전히 글 쓰는 실력이 좋지 못해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이번편은 프롤로그라 여주인공만 나왔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