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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더러워. 라고 말한 김태형이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피식 웃으며 먼저 옥상에서 내려가 버렸다. 그냥 듣지 말 걸.
다리에 힘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던 애가 맞긴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를 몰랐던 걸까. 김태형은 참 신기한 애였다.
나를 자꾸 회상에 잠기게 만들어. 입술을 꾹 깨물고는 열 띤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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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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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나는 김태형만 보면 피해 다녔다. 하루종일 김태형에게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마저 무거웠다.
내일 또 봐야 돼. 회사 가는 버스에서 김태형은 얼굴에 무슨 철판이 얼마나 두껍게 깔린 건지, 늘 내 옆자리에 앉았다. 8년 전처럼.
그럴 때마다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바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차라리 나를 이상하게 쳐다봐 주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면서 나를 보는 김태형에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만 했다. 보기가 무서웠다. 김태형이. 괴리감인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탕비실에서 아메리카노를 타 마시려는데 옆에 있는 복합기에서 문서를 뽑고 있는 김태형과 마주치고 말았다.
김태형을 보자마자 놀라서 정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에 손이 데였는지도 모른 채로, 시선만을 밑으로 향하게 한 채
탕비실에서 나오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차에 김태형이 내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컵을 뺏어가며 말했다.
“데였잖아요.”
“......”
“손 빨게진 거 안 보여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태형 씨.”
“선배 오늘도 잠 못 잤어요?”
“...아니, 아니. 몰라요. 모른다고.”
“좀 자요. 얼굴이 반쪽인데.”
“......태형 씨 일이나 잘 봐요. 왜 이렇게 오지랖이에요.”
“사람이 반 죽은 것처럼 다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김태형이 내 퉁명스러운 말에 욱한건지 어떻게 신경을 안쓰느냐며 화를 내더니 먼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서 탕비실을 나가 버렸다.
너 때문에 그랬어. 너 때문에. 너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어서. 그리고 다시 옛날의 감정이 피어올라서 그랬어.
내가 여우같지 못해서, 지금도 그 때의 어린애라서 그래.
*
김태형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오게 되면서 알게 되었었다. 그 때부터 김태형은 인기가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는 그냥 막연히 반장이라서 잘 챙겨주는 줄 알았었는데, 어느 순간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하고 부끄럽게 웃는 김태형에게 나는 이미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었다. 등굣길에 늘 나랑 마주쳤었는데. 그럴 때마다 천연덕스럽게 집에서 가져왔다면서 가방에서 밀폐용기를 꺼내 사과 한 쪽을 줬었던 김태형이었다. 그냥 나를 오빠가 동생 챙기듯이 잘 챙겨 줬었다. 그게 뭐든. 내가 아파서 학교를 안 오면 필기 같은 거 다 해다가 주고, 양호실에 누워 있으면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했는데 내가 어떻게 착각을 안 해....
"나 이번 주 출장이야. 내일 모레 가서 다음주에 와.”
“아.... 그렇구나.”
“내 말 안 듣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이상한 생각했지.”
나 박지민 차 타고 있었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생각도 안했다고 말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식은땀이 맺히는 듯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민이 얼굴을 보기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박지민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볼 때마다 더 불안해졌다. 알 일 없겠지만 그래도 박지민이 내가 8년 전 첫사랑 때문에 밤잠 못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말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진짜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누가 뭐래? 혼자 찔려서. 에구.”
“...아 근데 지민아.”
“왜?”
“넌 첫사랑이 누구야?”
내가 이걸 왜 물어봤을까. 말해놓고 후회했다. 박지민이 좀 고민하는가 싶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 더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졌다.
“넌데.”
“거짓말.”
“진짠데 나 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는데 그게 너야.”
“.......”
“넌 아닌가보네.”
벙 쪄있는 내 모습에 박지민이 귀엽다는 듯 웃더니 너는 아닌가보네, 하고 말했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찔렸는지 움찔하게 된다. 지민이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민이한테 들키기는 싫었는데.
“.......”
“그냥 지금은 걔가 너무 부럽다.”
“...누가?”
“네 첫사랑.”
“........”
“으으. 뭔가 계속 이런 얘기 하니까 오글거려....”
박지민한테 내가 모든 게 다 처음이었듯 나도 사실 박지민한테 처음으로 마음을 준 게 아닌 걸 빼고는 전부 다 처음이었다. 8년 동안 내 옆자리를 묵묵히 지켜줬던 사람, 아플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준 사람, 내가 울 때면 옆에서 같이 울어줄 줄 알았던 사람. 그건 다 박지민이었으니까.
“지민아.”
“응?”
“나 한번만 안아주라. 꽉.”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를 바래다주려 나오는 지민이의 손을 잡고 그냥 한번만 안아달라고 했다. 내 어두워진 표정을 봤는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더니 등을 쓸어내리는 지민이의 손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그 동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좋아서.”
“아아. 왜 그래 진짜! 나 또 잠 못 잔다니까?”
“...지민아 진짜. 계속 이대로만 있자.”
“......”
“나 진짜 너밖에 없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나온 말들은 주워담을 수도 없었고. 고해성사를 하듯,
느릿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지민이에게 나는 너 뿐이라는 말을 연신 했다. 진짜야. 나는
얼ㄴ앙니마ㅓ나디다러ㅣㅏ더리다더ㅏ더ㅣㅏ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난지민이가 좋아여 침칯ㅁ침침침침침침 내일모레 글피가 시험인데 이러고이써
나 외곤데.......이러고 살면 안되는데.....저처럼 살지마세요. 진짜 너밖에 없어. 정말.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난 너무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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