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빙의글]안다미로 04
이 곳에 와서는 항상 아침마다 별이나 별이 어멈이 날 깨워줬었다. 밤 늦게까지 뒤척이다 잘 때도 있고, 또 워낙에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학교 다닐 때도 엄마가 고생을 좀 했었지. 여튼 여기서도 내 힘으로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 소리를 듣는데 그저 멍하기만 했다. 하... 망했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앉아 있는데 별이가 대야랑 수건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깜짝 놀란다. 아씨! 황급히 들어오길래 별아, 물 쏟아질라, 하자 아차 하는 표정으로 조심조심 걸어온다. 아씨,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별이의 말에 헤헤거리며 웃고는 그냥 눈이 떠졌네, 하자 별이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별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다니 나만 할 수 있는 표정인 줄 알았는뎅.
"얼른 씻으시고 단장도 하셔야 되요."
"으응.. 으, 하기 싫다. 귀찮아."
"아씨!"
"알았어.. 하면 되잖아.."
밍기적거리며 이불 밖으로 나왔다. 이불 속 푹신하고 좋았는데, 괜히 일찍 깼다. 나오니까 더 누워있고 싶고 더 자고 싶고, 그냥 오늘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씻고, 별이가 가져다 준 옷도 입었다. 너도 얼른 가서 챙겨. 안 가고 옆에서 나를 꾸며주겠다는 별이를 닦달해서 보내자마자 별이 어멈이 방으로 들어섰다. 뭔가 별이 어멈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다. 맨날 별이랑만 붙어 있어서 그런가. 아씨, 별이 어멈이 나를 보더니 말을 잇지를 못한다. 고우세요, 하더니 내 머리를 만지기 시작한다. 머리를 살살 빗어서는 곱게 땋고, 존나 예쁜 장신구도 꽂았다. 허허, 이것 참 곱다는 소리를 얼마나 듣는건지. 흐뭇한 미소로 별이 어멈에게 머리를 맡겼다.
"아씨, 정말.. 정말 고우세요. 세자빈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에이, 별이 어멈두, 무슨 소리야. 내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휘젓자 별이 어멈이 웃으며 분칠을 한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거울을 보는데 별이 어멈은 솜씨도 좋다. 이 정도면 나 진짜 이쁜 거 아니야? 별이 어멈이 마지막으로 입술에 틴트 같은 것을 슥슥 발라주고는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정말.. 아씨는 제 딸과 같으신 분이셨는데.. 별이 어멈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는 눈물을 훔쳤다. 벌게진 눈가를 보자 나도 울컥할 것 같아 꾹 참고 별이 어멈을 꼭 안아주었다. 별이 어멈, 너무.. 고마워요. 별이는 내가 잘 챙길게요. 내 말에 별이 어멈의 몸이 잘게 떨렸다. 괜찮아, 괜찮아요. 울지마요. 내 말에 별이 어멈이 주책이었다며 작게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내 방 앞에 온 집 안 식구가 다 모여있다. 우리 집에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 동안 정든 얼굴이 많이 보인다. 내가 세자빈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없고,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분위기는 영 어둡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미 어머니께서는 한바탕 하셨는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으셨다.
"제가 진짜 세자빈이 되어서 가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나오셨어요."
"....."
"하하하.."
내가 하하거리며 웃자 다들 내 눈을 피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다가와 꼭 한 번 안아주셨다. 아가, 잘하고 오너라.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진짜 우리 아빠 보고 싶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었다. 몇 달 함께 있지 않았지만 정이 많이 들었었는데.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렇게 아쉬워하는지.
"별아."
"네, 아씨."
제 엄마와 함께 있던 별이가 내 부름에 천천히 다가왔다. 별이도 오늘 정말 이쁘다. 역시 내 선택은 탁월해. 이제.. 가자. 내 말에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되어 있던 가마에 올라타려는 순간 한 남자종 하나가 말했다. 아씨 오늘 너무 고우시다고. 그 말이 시발점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서 웅성거린다. 고마워요. 자신에게 서스럼 없이 대하는 나를 불편해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니었구나. 내 웃음에 자신도 환히 웃는다. 아씨가 돌아오면 잔치 열 준비 해야겠어요. 한천댁의 말에 부엌 언니들도 그래야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엄청 맛있는 걸로 차려줘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한천댁이 환하게 웃는다. 아씨가 좋아하던 요리 다 해드리겠다며. 괜히 마음이 뭉클하다. 그럼 나는.. 나는, 계란요리 꼭 해줘요.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내 말에 부엌 언니들이 더 호들갑이다. 그것만 해주겠냐며 얼른 돌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다.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쭉 둘러보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작게 나있는 창으로 얼굴을 내밀자 끝내 눈물을 훔치는 한천댁과 별이 어멈이 보인다. 애써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가마가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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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아, 힘들지."
"...아니에요."
"나도 너랑 같이 걸을까?"
"아니되요, 아씨!"
"그럼.. 너도 가마에 타면 안 돼?"
"아니 됩니다, 아씨."
치이, 힘들어 보이길래 권유한 말인데 단호박 몇 십개는 씹어 먹은 듯이 거절한다. 별이가 유순한 성격인 것 같아도 이럴 땐 엄청 단호하단 말이징. 휴, 입술을 쭉 내밀고 삐진 척을 하자 아씨.. 하는 애처로운 소리가 들린다. 계속 무시하자 별이가 낑낑대는 작은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보인다. 곧 도착이에요, 아씨. 조금만 기다리셔요.
"곧 도착이야?"
"네에."
"그럼 나 내려서 걸으면 안 돼? 나 가마멀미 한단 말이다."
"아니되요, 아씨."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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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구나. 태형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세자빈을 위해 만든 옷을 보았다. 얼마 전 태형이 말했던 대로 수 많은 세자빈의 옷들이 도착했다. 대부분은 하나하나 곱게 접어 보관해두었지만 태형이 원했던 노란 옷은 마네킹 같은 것에 걸려있었다. 오늘이야. 노란 옷을 입은 세자빈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지 태형이 활짝 웃었다. 장터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팔찌로 끙끙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는데 표정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너무나도 귀여웠다. 그녀가 김대감의 여식이라는 것을 듣고 그녀도 당연히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궁에 들어오자마자 노란 옷, 아니 고운 옷들을 지으라고 명했다. 그렇게 헤실대다가 자신이 왜 이러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좋은 게 좋은거지, 하며 태형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아마, 이것을 사람들은 첫 눈에 반한다고 했던가. 태형이 다시 한 번 그녀 생각을 하며 웃었다. 쉬쉬해도 이미 궁궐 내에선 태형이 연모하는 아가씨가 생겼다고 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그런 소문을 도는지 모르는지 마냥 행복하기만한 애처가 예약 중인 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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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 진짜 사람들 많다.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거라곤 예쁜 양반댁 규수들이랑 그 규수들을 둘러싼 수많은 몸종들 밖에 없다. 나는 별이 밖에 안 데려왔는데.. 꿀릴려나, 킁. 혼자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내 이름이 쓰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뒤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멎고 열 댓 명의 상궁들이 일렬로 섰다. 시험을 먼저 치는구나. 으, 떨려라. 어머니, 아버지와 한천댁, 별이 어멈을 비롯한 종들과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는 별이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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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세자는 세자빈 간택의 마지막에 참여하게 되어있다. 간단한 시험을 먼저 쳐서 그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규수들을 떨어뜨린 다음 최종적으로 세자가 선택하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세자빈 후보들을 보면 안되건만, 태형은 김내관을 옆에 끼고 한 구석에 숨어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김효정 대감의 여식... 저기 있다! 오늘도 노란 옷을 입었구나. 태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을 무렵, 태형의 옆에 한 여자가 다가와 섰다.
"세자가 마음에 든 규수가 저기 있나보지요?"
아, 깜짝이야! 태형이 놀라서 넘어가려고 하자 김내관이 서둘러 태형을 받쳐주었다. 누님! 태형의 말에 여자가 활짝 웃었다. 어느 규수인가? 나도 구경 좀 하세. 자신의 누이의 말에 태형이 살짝 웃었다. 김효정의 대감의 여식입니다. 노란 옷을 입은. 태형의 말에 여자가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다시 웃었다. 세자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소. 허나, 세자. 여자가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곧 아바마마가 오실텐데, 몸을 피하시는게 어떨지?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형이 서둘러 떠났다. 태형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여자가 다시 시험에 집중하고 있는 아가씨들을 쭉 둘러보았다.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고 여자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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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세자빈 간택 시험이라고? 졸쉽인뎅. 흡사 시험 치는 도중 마킹을 하는데 1이 네 번 나온 찝찝함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한데. 궁녀들이 답안지를 한꺼번에 다시 걷어가고 별이가 내 옆으로 총총총 뛰어왔다. 아씨, 어떠셨어요? 땀도 안 났는데 별이가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톡톡 닦아주며 물었다. 별이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쉽던데. 뭔가 이상해.
잠시 후 가장 엄하게 생긴 상궁이 나와 시험에서 떨어진 규수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아싸, 통과당. 합격한 기쁨을 아주 잠시 만끽했는데 상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상전하와 세자저하, 공주마마 납십니다! 상궁의 말이 끝나자마자 왕과 세자로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 그리고 공주마마가 들어섰다. 으어, 다음은 뭐려나. 뻐근한 목을 살짝 주무르고는 상궁의 말에 귀 기울였다.
"세자빈 후보인 규수들은 주상전하와 세자저하, 공주마마께 차례대로 나오셔서 인사를 하시길 바랍니다."
진짜 그게 끝인가? 당황한 것은 나뿐인지 차례대로 나가 인사를 하고는 돌아온다. 헐, 어떡행. 곧 내 차례야.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막 뛴다. 긴장 안하고 그냥 담담하게 치고 오자고, 욕심 같은 것은 버리자고 몇 번이나 생각했으면서도 또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근데 솔직히 분위기가 이렇잖아! 여기서 긴장 안하면 바보 아닌가?! 상궁이 내 이름을 부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켜 앞으로 나섰다. 김효정 대감의 여식입니다. 세자저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치마를 잡고 머리를 살짝 숙였다. 고개를 들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노란 옷을 입은게 곱구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활짝 웃고 있는 세자, 아니 장에서 만난 사내였다. 세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