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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우 김석진씨가 XX그룹 광고 모델로 발탁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동안 XX그룹은 국내 탑 남배우들만...'
티비를 끄자 정적이 흘렀다.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리자 잦은 탈색과 염색으로 푸석해진 머릿결이 바스라질 것 같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가 대여섯 건 찍혀 있었다.
보나마나 늦으면 월급 까버리겠다는 마스터의 협박 전화겠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서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데 담배갑이 비어있어 샵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 여기도 김석진.
카운터에 붙은 신제품 포스터에도 참 해맑은 당신이 있다.
카운터 앞에 서서 가만히 포스터만 보고 있는 날 보더니 알바생이
'진짜 잘생겼죠? 포스터 남는 거 있는데 드릴까요?"
한다. 민망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
" 아, 아니에요. 김석..아니 썬프레소 한 갑이요."
별 말 없이 빙그레 웃는 알바생 때문에 얼굴에 열이 몰린다. 분명 시뻘게졌겠지. 창피할 것도 없는데. 에라.
담배를 들고 편의점을 나서는데 자꾸 해맑게 웃던 그 얼굴이 눈앞에 둥둥 떠있는 것 같다.
결국 다시 들어가서,
"...저기, 포스터..."
알바생이 미리 꺼내 둔 포스터를 건넨다.
박지민 삽질도 참 여러 가지로 한다. 셀프 수치플레이라니.
"박지각!!! 지각이 오셨어요!! 우리 지각이!!!"
바에 들어서면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마스터가 바에 얼굴을 뭉개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저거 분명 또 애인이랑 싸웠다.
남준이 형은 마스터는 신경도 안 쓰고 컵 광내느라 바쁘고. 하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여, 왔냐."
"네. 마스터 또 싸웠대요? 아니다 또 혼자 삐져서 난리쳤겠지."
"야!! 이번엔 진짜 헤어질 거야! 너는 늦기나 하고 저 박지각이 잘라버려야지 니미럴"
"마스터 이젠 그 레퍼토리 진부해요. 맨날 헤어지고 맨날 자른대. 나이 먹고 자꾸 역정 내면 피부 늙는다. 늙어."
"내가 늙은 게 잘못이지. 그래. 그래서 우리 국.."
이름도 미쳐 다 못 부르고 테이블에 얼굴을 문대는 저 사장님이 헤어지긴 무슨.
"어린 애인 만나는 게 쉬운가 아저씨가. 심지어 철컹철컹한 고딩이잖아. 새삼 소름 돋네 저 아저씨가 애한테..."
"야, 박지각이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우리 국이가 처음에 스무 살인 줄 알았대 스무살. 그리고 내가 괴롭히냐 국이가 괴롭히지."
"역시 애가 보통내기가 아니네. 그쵸 형. 사회생활 잘 할 거야."
"정국이가 똑똑하잖냐 누구랑 다르게. 아, 마스터 좀 저리가세요. 바는 바텐더 영역인데 어디다 면상을."
"니네다 잘라버릴거야!!!썅!!!!"
솟구치는 짜증에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지 요상한 걸음으로 마스터가 사라졌다.
남준이 형이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더니 마스터가 뭉갠 테이블을 박박 닦는다.
이제 한, 1년 쯤 되었나.
전에 있던 타투샵에서 타투를 배우고 첫 손님을 마치자마자 원장님이 건넨 까만 명암에는 금색 고딕체로 TH가 박혀있었다.
그렇게 이 곳으로 보내졌다. 사실 갈 곳도 없었으니 뭐가 달랐겠냐 만은.
그렇게 만난 게 마스터랑 남준이 형이다. 왜 TH냐고 물어봤더니 김태형이라 TH랜다. 남준이 형은 늘 뻔데기라고 불렀다.
뻔데기 발음 th.
마스터는 조금 착하고 많이 지랄 맞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게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어린 사람이 마스터라니, 싶었더니 그냥 동안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너도 게이냐?' 해서 마스터는 게이라는 걸 알았다.
심지어 어린 남자 애인도 있었다. 고딩이랜다.
어린 애인은 일주일에 세 번 학원가는 날이면 바 문 열기 전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갔다.
처음엔 교복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 했다. 교복 입던 시절만 생각하면 입이 썼다.
그래서 무뚝뚝, 날을 세우고 있던 나에게 정국이가 말을 걸었다. '밥 같이 드실래요' 하고.
정국이도 마냥 사는 게 쉽진 않았다. 종종 집에 들리는 아버지께서 손찌검을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터진 얼굴을 달고 오는 날이면 마스터는 유난히 지랄 맞아졌다.
남준이 형은 참 잘 났다. 그리고 꽤 '잘 나가던' 사람이라고 한다. 어디서 잘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바 첫 오픈 때부터 일 했다고 했으니 무언가 사연이 있긴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바 뒤편의 방에서 타투를 했다. 왜 샵도 아니고 바에서 타투를 하나 싶어도 꽤나 손님이 있다.
대부분 마스터의 '그쪽' 지인들인 것 같지만, 가끔 얼굴을 알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작은 술집이 내가 디딘 세상의 전부였다. 내 손에 들린 이 해맑은 웃음을 가진 김석진은 내 생각의 전부였고.
물끄러미 말린 포스터를 보고 있으니 남준이 형이 쓱 보고 세상이 온통 게이 천국이라며 혀를 찬다.
그냥 멋있잖아요, 하면 그렇게 게이가 되는 거라면서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으라고 핀잔을 준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테이블을 닦고 캔들을 켰다. 타투 손님이 없을 때는 주로 카운터를 보거나, 서빙을 한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간판 불을 켰다.
잠긴 문을 열자마자 마스터가 소리를 빽, 하고 지른다.
"박지각이!! 예약 받아!!"
"네네. 전화 바꿨습니다. 예약하시게요?"
'...네. 제일 빠른 날짜가 언제죠?'
"내일이랑 금요일 가능하신데, 언제가 좋으세요?"
'그럼 금요일로 부탁합니다.'
"네, 오셔서 예약하셨다 말씀해주시면 되고, 도안은 따로 생각해둔 것 있으신가요?"
'아니요. 가서 상의하고 싶은데."
"네, 그럼 당일에 이 번호로 확인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손님"
'저기..'
"네, 손님?"
'..아닙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뚝하고 끊어진 전화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홀로 나가려는데 소파에 엎어져 있던 마스터가 눈만 치켜뜨고 물어본다.
"박지각이. 방금 손님 말이야."
"네."
"..아니다."
다들 말하다 마는 게 유행인지 이내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나가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예예, 누구 말씀인데 가야죠.
가만 생각하니 목소리가 참 닮았다.
무서운 김석진.
이러다 진짜 게이 되겠다.
- 소심한 나 탄 0편 도입부니까 포인트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