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해 신발장에 있는 목발을 보고 괜한 심술이 나 발로 툭 쳤다.
오늘 이것만 가져갔더라면 병원에 갔다 오는 건데. 친구도 보고 치료도 하고 우연인 척 민윤기도 한번 더 보고 오는 건데..
옷을 갈아입고 샤워도 하고 서랍 맨 위쪽에 있는 찜질팩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렸다.
평소에 생리통이 심한 나를 위해 민윤기가 이것저것 한가득 사온 물건들 중 하나였다.
오늘따라 네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침대에 엎드려 찜질을 하다 보니까 잠에 들었나 보다. 저녁시간도 훌쩍 지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확인하니 태형이에게 온 문자 말고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뭘 기대하고 기다리는 걸까.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바람에 집에서 지낼 시간은 많아졌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나가서 영화라도 한편 보고 올 텐데 오늘은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겠다.
배가 고파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텔레비전을 보니 몇 년 전 방송했던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난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아서 내용을 아는 드라마는 별로 없었는데 유일하게 내가 보던 드라마였다.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난 후에야 보니까 이렇게 오글거리고 진부한 내용이었구나 싶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는지 여러 편을 이어서 방송해주는 드라마를 다 보고 새벽 늦게서야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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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목발을 챙겨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다.
어제 홍대리의 의심에 혼자서 출근하겠다고 집 앞으로 찾아오지 말란 내 말에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태형을 데리고 말이다.
"문자를 그렇게 씹는 게 어디 있어요"
"어제 찜질하다가 잠들어서 그렇다니까"
"그래도 중간에 일어났을 때 핸드폰 봤을 거 아니에요!"
"어제 하루 종일 핸드폰 안 봤어"
"거짓말..."
"내일 부터는 진짜 찾아오지마. 지금 뭐라고 둘러댈지 벌써부터 머리 아프니까"
"생각 해 보고요"
참나, 무슨 새침데기라도 되시는 줄 알았다.
오늘은 퇴근하기 전에 잠시 시간 내서 병원에 다녀올 생각이다. 어제 일을 아무리 빨리 끝내려 해도 다 하지 못한 업무들이 남아있었고 오늘도 중간에 병원을 다녀오면 야근은 이미 정해져있는 일이다.
나랑 태형이를 보자마자 또 같이 오냐는 홍대리의 말에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고 둘러대고 내 자리로 가 부지런히 일을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집중을 하다가 점심식사 안 하냐는 태형이의 말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하고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겼다.
"난 병원 좀 다녀올게요. 오늘은 둘이 먹어요"
"지금요? 병원 점심시간 아닐까요"
"버스 타고 가면 대충 시간 맞을 거 같아서요"
"점심은요? 드시고 가시지.."
"가면서 대충 샌드위치나 김밥 하나 사 먹으면 돼요.그럼 이따 봐요"
몇 발자국 걷다가 목발 챙기는 걸 깜빡한 게 생각나 뒤를 돌았다. 그 뒤에는 웃으며 목발을 들고 있는 태형이가 있었다.
또 두고 갔다며 챙겨 준 태형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민윤기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떨리는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았다.
지금은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아니라는 간호사의 말에 친구는 못 보고 물리치료만 받고 나왔다.
병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치료를 받고 나오는 순간까지 두리번 거렸던 거 같다.
그래도 민윤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와 음료 세잔을 샀다. 나는 아이스초코, 홍대리는 카페라떼, 태형이는 아메리카노.
야근이니까 오랜만에 커피를 먹을까 했지만 역시나 커피는 별로였다.
기껏 생각해서 자기들 것도 사 왔더니 방금 커피까지 먹으셨단다. 그럼 됐다는 내 말에 '에이-그래도 팀장님이 사주신 건데 감사히 먹어야죠' 하며 들고 가는 둘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구두 디자인이 어딘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이것저것 바꿔봐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등학교 때부터 그려온 디자인 수첩이 떠올랐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일일이 스캔해 문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인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것저것 보다가 거의 10년 전에 그린 구두를 봤다. 아마도 그 당시 유행했던 디자인의 구두였던 것 같다.
이 디자인을 조금 변형해서 지금 디자인 중인 구두에 입혀보았다. 생각보다 신선하고 센스 있는 디자인이었다.
기본적인 틀은 잡혔으니 세세한 부분 작업이 남았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는 작업에 야근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에 끝날 것 같다.
홍대리가 퇴근하고도 한 시간이나 지난 시간인데도 퇴근을 하지 않는 태형이를 쳐다보니 입모양으로 '야-근-' 한다.
아 참, 어제 일찍 퇴근했지.
"얼마나 걸려요? 마치는 시간 비슷하면 저녁이나 같이 먹게"
"어..저..저 30분이면 돼요!"
"그래요 그럼. 나도 그 시간에 맞춰볼게"
또 해맑게 웃는다.
어제 문자를 씹었다고 징징대는 모습이 남아 저녁이라도 사줘야겠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여파가 너무 컸다. 꼬르륵 소리가 꽤 멀리 앉은 태형이한테도 들릴 정도였다. 퇴근 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태형이를 데리고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기가 익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빨리 저 고기를 내 입속으로 넣어 난리치는 뱃속을 달래주고 싶다.
"그렇게 먹고 싶어요? 고기 뚫어지겠네"
"나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웠다고.."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익자마자 팀장님 줄 테니까"
태형이는 정말 고기가 익자마자 나한테 주기 바빴다. 너도 좀 먹으라는 내 말에 간간이 한 두 개 정도 집어먹었다. 원래 내가 계산하려고 했지만 더더욱 내가 해야겠네.
저녁식사를 끝낸 후 집으로 데려다준다는 태형이를 사양하지는 않았다. 맨날 거절만 하니 이번엔 받아도 괜찮겠지.
"근데 너 막차 안 끊기겠어?"
"네, 아직 널널해요"
"막상 알겠다고는 했는데 반대 방향이라 마음에 좀 걸리네"
"괜찮아요. 팀장님 집 밤에 보니까 생각보다 어둡네요. 가로등도 몇 개 없고"
"그러게, 그동안 차 타고 다녀서 몰랐는데 좀 무섭다"
"무섭다고 말하니까 데려다준 보람이 나네요"
"무슨 보람까지 느껴? 다 왔으니까 이제 가도 돼. 데려다 줘서 고마워."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내일 봐요"
태형이가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무리 남자라 해도 위험한 건 똑같으니까.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집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바닥에 늘어난 담배꽁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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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졸음운전을 하던 가해자와 좋게 협의를 봤지만 차는 아직 구하지 못해 여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매일같이 집 앞으로 찾아온 김태형이 익숙해졌을 무렵에 나는 깁스를 푸르게 되었고, 중환자실에 있던 친구에게 면회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친구는 의식을 찾았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민윤기 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친구는 나를 배려한다는 차원으로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사실 몇 번이나 병원에 갔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고빼기 하나도 안 보여주는 민윤기였다.
PT가 얼마 남지 않아 야근은 매일 같이 이어졌다.
오늘은 유독 더 힘든 날이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달래 줄 캔맥주와 오징어를 사 축 처친 몸을 집으로 이끌었다.
"이제 와? 깁스, 풀렀네"
집 앞바닥에 담배꽁초가 늘어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사담 |
쓰다보니까 여주가 지하철도 탔다가 버스도 탔다가~그러네요..ㅎㅎㅎ 이번편도 윤기 엄청 조금나오고..죄송해여 여러분.. 윤기글인데 태형이가 더 많이 나오네요...ㅋㅋㅋㅋㅋ 이제 윤기 본격등장이에요! 암호닉, 신알신 감사드리구요 댓글 달아주실거져??♡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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