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배달부01 (아이같은 남자)-
우유배달을 시키고 나서부터 아침일찍부터 있는 우유를 두고 가는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우유..잘 안시키나? 어쨋든 매일 우유가 부족할때마다 슈퍼에서 일일이 우유를 사다 마시는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특히 우유를 자주 마시는 나로서는 그 귀찮음이 더 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문앞에 있는 우유를 보며 신기하기도 고맙기도했던 나는 요즘시대에 쓰지도 않는 작은 쪽지를 남겼다. 누군진 모르지만 아침일찍일어나 우유를 배달하는 누군가가 정말 대단해보이고 고맙다고 내가 사실 오지랖이 넓고 편지쓰면서 마음을 전하는 그런 구식시대 사람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래야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날은 자기 전 저녁에 쪽지에 '우유 잘 마시고 있어요 화이팅!'이라며 오글거리게 글자를 써 넣은 다음 우유가 놓이는 자리에 쪽지를 올려놓았다. 상대가 보든 안보든 누군가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로선 보람있었다.오지랖이 넓은건지..
다음날 아침에 문을 열어 보니 우유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포스트잇에는 '마음이 고우시네요'라는 당혹스러운 답이 있었다. 난 그냥 '고마워요'.'잘 드세요'이런 대답을 예상했는데 마음이 고우시네요라니 너무나 의외의 대답에 약간은 놀랐다. 하긴 사람마음이 다 같은 건 아니니까, 생각하며 마음이 고우시네요.라는 이 말에 답장을 다시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 답장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내가 웃겨보였다. 자취를 하다보니 이런 상황도 약간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긴 고민끝에 답장을 생각해 적었다.
'고마워요'
무난하기 짝이 없지만 무난한 것이 좋을때도 있는 것이다. 그날 밤에 쪽지를 두고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새벽에 눈이 말똥하게 잠이 달아나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이미 우유는 배달되어있었다. 물론 포스트잇과 함께.
'고맙긴요'
***
생각해보니 아침운동도 한지 꽤 된것같았다. 이미 먼지가 가득껴버린 자전거를 끌고 와서 천천히 패달을 밟으며 바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어떤 남자도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우유가 든 자전거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어쩌면 저 사람이 내게 우유배달을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얼굴을 보았더니 정말 애기 같아 보였다. 피부는 굉장히 하얗고 강아지 같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과 나는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가려했지만 '혹시 나와 포스트잇을 주고 받는 배달부가 저 사람일까?'라는 호기심에 나는 몰래 그의 뒤로 자전거를 돌려 그를 따라 다녔다. 우유를 꺼내어 주택가인 이 집들 하나하나에 우유를 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이 아이같은 남자가 갑자기 쳐다보았다,
"저기..."
"..네?"
"왜 자꾸 쳐다보세요?"
"그쪽 쳐다본거 아닌데..하하"
"아..네"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이같은 이 남자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일어나선 우유가 들어있는 자전거 쪽으로 향하곤 또 다른 집으로 우유를 배달하러 다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나를 어느정도 눈치를 챈 것인지 게속 강아지같이 쳐다보다가 나에게 말했다.당황한 나는 다른 곳을 보는 척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왜 자꾸 따라오세요?"
"..아..그쪽 따라간거 아니에요"
".....네"
당황한 탓일까 어쩌다 나와버린 나의 단호한 말투에 풀이 죽었는지 그의 표정은 상처받은 딱 그 표정이었다. 이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걸 따라다니고 있었을까 저 남자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평소 내게 전보다 무신경해져 남친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정도로 서로 멀어진 내 남친에게 전화가 왔다. 타이밍도 웃기게 새벽이라니 아 회식이 있다고 했던가 술이 거의 깰 무렵이었다. 참나 그래도 회식하는건 꼬박꼬박 얘기하니까.. 다시 가까워지면 되지
'띠리리'
'띠리리'
"어 오빠"
'....이름아'
'지금 어디야? 오빠 할 얘기 있어..'
"무슨 얘기?"
'......알잖아'
"몰라 알고싶지 않아"
술이 방금 깬 것 같이 잠긴 목소리로 내게 말한 오빠에게 설레였지만 그것도 잠시..웃기게도 이별을 고하려는 전화였다니 설레였던 내가 병신이지. 알고 싶지 않다. 오빠랑 멀어져도 주변에서 자존심도 없냐며 뭐라고 하든 묵묵히 오빠 곁을 지켰는데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오빠도 분명 술김에 그런 걸꺼야
'...그럼 전화로 할께'
"안돼.. 말하지마.."
'헤어지자'
"...오빠..흐..."
'끝내자...'
뚝
....끝나버렸다. 허무해 미치겠네 2년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매정한 오빠가 밉기도 했고 다시 전화를 걸어서 제발 다시 사귀어달라고 애원할 판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눈물도 쉴새 없이 나와서 눈앞이 안보여..마음이..아프다.
꺽꺽대며 도로 한복판에 쭈구려 앉아 울고있는 나를 보고 있는 아이같은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더니 우유에 붙여서 울고 있는 내 앞에 가져온다.웃으며 내게 우유를 건네주는 그를 보고 있으니 눈물은 이미 멎고 있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이 신기하게도 좋았다.
"이거 마셔요"
"아까 이미 배달해 드렸지만"
........내가 우유배달 받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울다니...쪽팔려.... 우유를 받고 꼭 쥐고 얼굴을 가리려고 푹 숙이고 있는 나를 빤히 보던 그는 말없이 자전거를 끌고는 사라졌다.
참 아이같은 남자
한참을 앉아서 우유를 꼭 쥐고 있었을까 정신차려 일어나 우유에 붙어있는 포스트 잇을 보았다.
'울지마요 웃는게 이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