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생각하여 정해 놓은 사람, 특히 그리워하는 이성.
" 여기 숙취해소제 나뒀으니까, 술 깨면 연락해요. "
분명 뭐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난 오늘 새벽에, 자세히 말하자면 아까전, 친한 동생 전정국에게 술이 떡이 돼서는 행패를 부렸다. 잠에서 깼을 땐 뭐 후회하면서 머리를 쥐어짜지도 않았고, 내가 왜 그랬지 하며 엉엉 울지도 않았다. 그냥 존나 멍하니 있다가 컵라면을 먹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난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다. 모르고 싶었던 건지, 모른 척 했던 건지.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의미심장했던 전정국과, 더 의미심장하게 예쁜 노을 배경과, 의미심장의 끝판왕을 달리는 그 상황 모든 것. 내가 이해를 안 하는 편이 빠르다고 결정지었다.
어떻게 집까지 기어들어왔을까. 분명 집에 들어올 때는 술이 거의 깼었다. 근데 취한 것 마냥 정신이 없었다. 이 순간 박지민에 대해선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 김태형과의 그 ' 1년=1분 같음설 ' 처럼, 박지민과 나의 10년이 헛된 시간이라고 폄하되는 건 싫었다. 박지민한테 문자 몇개가 와있었다. 괜찮냐, 근데 진짜야, 화해할래? 따위의 형식적이고 좆같은 내용은 아니였다.
- 집 잘 갔어? 지금 집 맞냐
- 전정국이 데려다 줬다며. 걘 왜 안어울리는 짓을 하냐
- 볼까. 나와.
존나 평소였다. 너무나도 평소였다. 이건 그냥 박지민이였고, 이 문자를 읽고 나갈 준비를 하는 나도, 너무 비정상적일 정도로 평소였다. 딱 이 만큼이였다. 우리의 관계는, 그냥 이랬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존나 이 정도. 불이 달아오를 것 같으면 물이 든 바가지를 애매하게 흘려버리는, 그런 뜻뜨미지근한 온도.
식기는 싫어. 더 타면 그것도 싫어.
그게 친구다.
1층으로 내려가니 박지민이 보였다. 언제부터 있었냐니까, 문자보낸 시간이란다. 문자를 살폈다. 6시 30분 발송. 30분동안 기다렸다면서 툴툴댄다. 뭐야 별로 오래되지도 않았네. 박지민이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들어간다. 어딜 들어가냐니까 정말 당당하고 뻔뻔하고 태연하게 말한다. 너네 집.
" 몰라서 물어? "
" 그럼 알면서 왜 물어. "
어슬렁어슬렁 엘레베이터로 걸어가는 박지민의 뒷모습을 쳐다 봤다. 그냥 저거 박지민이네. 박지민을 10년동안 봐오면서 알아낸 박지민 중 하나가, 미안할 때 툴툴대는 거다. 저 새끼가 어제 그랬던 건, 진짜 심각한 상황일 때의 모습이고. 어느정도 사과한 후 상대방을 풀어주고 싶음 그 때 존나 툴툴댄다. 누가 나한테, 박지민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난 아마 고민하다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릴 것 이다. 박지민을 어떻게 표현해. 박지민은 그냥 박지민인데. 야속하게도 박지민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은 박지민이였고, 주변 사람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우리 집 앞까지 다다른 박지민이 열라 자연스럽게 도어락을 푼다. 비밀번호 1013. 박지민 생일이다. 내가 20살 때 처음 자취를 하면서 얻은게 이 집인데, 박지민이 이사하는 날마다 날 쫒아다니며 귀가 닳도록 말했다. 성이름! 비밀번호는 내 생일! 알겠지? 인테리어를 마치고 진이 빠진 내가 소파에 기절해있을 때, 박지민은 실실 쪼개면서 도어락을 풀었다, 닫았다 를 반복해댔다. 시끄럽다는 내 한마디에 수고했다며 짜장면을 시키기도 했다. 존나 닥치고 걍 먹을 것이지 먹는 와중에도 실실 웃었다. 넌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다, 친구. 라면서 말이다.
집안에 들어선 박지민이 기겁을 한다. 야, 이게 사람 집이냐? 좀 치우고 살아. 라며 핀잔까지 한다. 니가 쓸데없이 청결한 거야. 옷이나 만화책, 휴지 따위의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리 더럽지 않았다. 물론 내 눈엔. 보통 자취하는 여자들 다 이렇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박지민이 이미 없다. 순간 놀래서 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 "
" ... "
어 미안. 치우고 살게.
" 사람 방맞아? 돼지우리아니야? "
" 야 웬만한 여자들 다 이 정도야. 환상같은 거 갖지마라 "
" 난 너 만나고 환상 다 깨졌어. "
치우기나 하라는 박지민에, 신경질적으로 옷을 주워들고 있는데 뒤에서 이게 뭐냐? 라 한다. 아, 뭐가! 라며 뒤돌아보니,
" 어, 그거.. "
" ? "
확실히 기억났다. 전정국이 날 집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난 얼이 빠진 사람처럼 굴며 정신없이 주절댔다. 취기가 다시 올라온 건지 뭔지, 나도 모르게 중얼댔다. 확실히 그 때 제정신이 아니였던 건 맞았다. 전정국은 날 말릴 생각도 안하고 다 받아줬다.
" 정국아. 1013. "
" 네? "
" 우리 집 저기야, 11층 1102호 "
" 그래요? "
" 응. 비밀번호 1013 이야. "
" 네. 알겠어요. "
미친, 미친, 진짜 미친. 돌았다. 내가 왜 잠에서 깼을 때 어리둥절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는지도, 이해를 안 하고 싶어했는지도 다 깨닫고야 말았다. 눈이 동그래졌다. 전정국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내 주정아닌 주정을 받아주며 집까지 데려왔다. 현관문 앞에서 멍하니 있는 나에게 전정국이 말했다. 누나, 안 들어가세요?
" 1013 이라니까. "
" 아.. 네. "
전정국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날 끝까지 배려했다.살짝 떨리는 손으로 1013 을 입력했다. 집 안으로 날 모셨다. 지금과 같이 더러웠다. 전정국은 예의 넘치게 들어오지 않았다.그저 현관에서 조금 머물다가 숙취해소제를 사러갔다온다고 했다. 전정국이 헐떡거리며 날 불렀을 때, 한 손에 맥주 한 캔과 숙취해소제를 든 채, 날 그렇게 찾았을 때. 이미난 침대에 곤히, 존나 평화롭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영화의 재생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렇게 난 짜게 식어갔다. 박지민이 숙취해소제를 손에 들고서 날 쳐다본다. 전정국이 날 바라본 것처럼, 뭐지? 하는 얼굴이였다. 난 계속 재생했다. 전정국은 그때 내가 취한 줄 알았는지 부축까지 해줬다. 난 그저 좀 미친 것 뿐이야, 안 그래도 돼. 라고 못한 내가 죽여패고 싶을 정도로 소름돋았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지? 진짜 취했었나봐. 전정국이 든 맥주 한 캔 마시기라도 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여기 숙취해소제 나뒀으니까, 술 깨면 연락해요. "
잠든 내 옆에서, 전정국이 한 말. 아까 기억안났던 그 말이, 내 귓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 여자 흔들어놓고, 고백하면 차버리는게 김태형이야. "
" ..뭔.. 존나 뜬금.. "
" 남자애들 사이에선 유명했지. 한 대 패주고 싶은데, 애가 돈많고 싸움까지 잘하니까 뭐라 하는 애도 없었어. 그래서 그런 애란게 묻힌 거고. "
" .. "
" 내가 어제 했던 말중에 거짓말 하나도 없어. "
난 니가 빨리 고백하고 차여서, 빨리 멀어지길 바랐어.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건네오는 박지민에, 할 말이 없었다. 같이 티비 잘 보고있다가 이게 무슨 분위기람. 당황스러움에 박지민만 빤히 쳐다봤다. 박지민은 말 하는 내내 티비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담담하면서도 생각이 많아보이는 표정과 그 말투에, 나도 김태형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걔 주변에 있던 사내놈들은 다 찌질한 애들이였지. 여러 조각의 퍼즐이 만나 작품이 완성되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정리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박지민에서 김태형 상담을 할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했다. 아 대충해. 라던지, 그럼 고백하고 끝내 걔도 좋아하는 것 같네. 같은 말들을 자주 했었다. 그때의 난 존나 성의없다며 심술을 부렸지만, 이제 와 박지민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박지민과 김태형은 그리 친하지 않았다. 박지민은 자기 사람 아니면 워낙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썼다. 그런 박지민과 김태형이 친해질리가 없었다. 김태형은 애교도 많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 같은 튼튼한 붕어 들이 뭘 떠다 받치면 꺄르르 하고 좋아했다. 죽어있던 내 연애세포들을 깨워주기에 충분했던 남자였다.
그에 비해 전정국은 박지민과 친했다. 애가 예의도 바르고, 조용하네. 착하네. 와 같은 말들을 했었다. 밥도 곧잘 사주었다. 박지민 곁에 있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더니, 그거 진짠가봐. 언젠가 한번 생각했던 문구가 이젠 사실이 되고, 그게 내 앞에 가까이 다가선다.
" 나 간다. "
" 왜, 더 있다가지. "
" 맘에 없는 소리하지마라,다 티나니까. "
박지민이 기지개를 쭉 편다. 맘에 없는 소리 아니였는데.. 그 잠깐의 말까지 생각하고 있는 나를 쓱 보던 박지민이, 내 머리를 살짝 누른다.
" 넌 언제나 생각해도 생각이 너무 많아. "
" 너 닮아서 그래. "
" 닮을 걸 닮아야지. 나 닮아서 뭐하냐. "
박지민이 핸드폰을 챙긴다. 야, 진짜 가게? 그럼 가짜 가냐. 박지민이 나간다. 붙잡을 새도 없이 나간다. 나 생각할 시간 주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옆에 있어주지. 순간 전정국이 떠올랐다. 술 깨면 연락하라던 그 말이. 내가 어떻게 연락을 해, 쪽팔려 죽겠는데.. 하는 순간 전화가 온다. 발신자 전정국이였다.
" 여보세요.. "
" 어, 술 깼네. 집이에요? "
" ... "
" 여보세요, 누나? "
" 어, 집이야. 집. "
" 지민이형이랑 있어요? "
" 아니, 방금 나갔어. 저기 정국아 있잖아. "
" 알겠어요. "
시발 쿨한 새끼. 바로 끊는다. 그리고 한 20분이 지나니까, 누가 초인종을 누른다. 전정국이네, 전정국이야. 뭐라 해야하지. 정국아 안녕 좋은 하루! 이건 너무 설정같잖아. 막 혼자 안달을 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초인종이 한 번 울리고 고요하다. 어, 갔나 싶어서 문을 열어보니까
" 누나. "
미친. 잘생겼다. 어버버 거리면서 쳐다보니까 웃는다. 지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안 지었던 웃음을 막 짓는다. 저렇게 웃는 구나.
" 그냥 들어오지.. 1013 알잖아. 내가 그렇게 난리를 피웠으니까..하하 "
" 그래도 번호 막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죠. "
어, 응. 존나 멋있다 너.
" 그래, 들어와. "
" 실례하겠습니다. "
" 아니 뭐, 실례는 내가 했고. "
참, 하루 아침에 이게 뭔 일인지. 날벼락을 맞은듯 뒤숭숭했다. 묘한 두근거림, 정신없음의 두근거림, 놀람의 두근거림. 이 세상 모든 두근거림이 지금 내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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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누 린봄 망구 수제비 암냠 ♥
암호닉은 언제나 받으니까, 댓글로 남겨주세요 ! 사랑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