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전정국과 어울리는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라 들고 가니, 거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전정국을 볼 수 있었다. 너 거기서 뭐하니, 소파에 앉아. 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소파에 앉는다.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쳐다본다. 그래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겠지. 표정이 딱 그랬다. 너 할 말 없어? 이런 거 랄까. 난 서서 생각했다. 제일 자연스럽게 어제의 사태를 무마할 수 있는 말 없을까?
" 정국아. 어제는 내가. "
" 네, 말씀하세요. "
..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말부터, 아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되지? 변명해봤자 이미 날 또라이 로 생각하고 있을텐데. 그냥 다 기억 안 난다고 발뺌할까. 근데 그것보다 얘는 내 집에 왜 온 거냐. 잡다한 생각이 들었다.
" 어.. 많이 당황했지? 나도 좀 전에 기억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음.. "
그 사슴 같은 눈으로 나를 보던 전정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군다. 비웃는 거지? 저거 비웃는 거 맞지? 손끝에서 부터 쪽팔림이 흘러 뇌를 강타했다. 순간 돌에 맞은 것 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 누나. "
" 응? "
" 어제 기억 다 안나죠? "
" 아니? 다 났는데? "
" 아닌 것 같은데. "
전정국이 미소를 살짝 띄우고 날 바라본다. 전정국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 눈을 바라봐, 넌 깨닫게 되고.. 하는 노래가사가 순간 들리는 것 같았다. 어제, 그러니까 어제.. 무슨 일이..
" 나 뭐 이상한 말 했어? "
뭐야. 설마 진짜야? 진짜 김태형 얘기 한 거야?
"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
" 그 말이 제일 신경쓰여. "
" 진짠데. 누나 아침 드셨어요? "
" 어? 아니. "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내가 기억난 말들 제외하고 또 뭔가가 있었나? 김태형 얘기 한 거야 진짜?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니까 전정국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다.
" 그럼 밥 먹으러 가요. "
해장은 피자라면서 치즈피자를 주문하는 전정국을 어이없단 얼굴로 노려봤다. 인상을 쓰며, 넌 피자가 넘어가니? 물으니 네. 란다. 아 응, 괜한 걸 물었네. 그 후 별 말이 없었다. 어느새 포슬포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젖어있으니까 전정국도 말을 걸지 않았다. 참 좋단말이지, 이런 건. 박지민과 전정국은 살짝 닮은 면이 있다. 별로 말이 없다거나, 남 비위 맞춰주는 걸 못 한다거나, 튀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면에서 말이다. 근데 또 재수 없은 건 예의와 인품은 갖춰져있다. 뭐만 하면 야, 그러면 안 되지. 그건 아니지 라며 참견한다. 지 간섭받는 건 싫어하면서 나한테 간섭은 죽어라 해댄다. 공통점도 지랄맞네.
" 누나, 입맛이 없어요? "
" 내가 원래 입이 좀 짧아. "
" 아.. 입이 짧으시구나. "
" ? "
" 근데 술은 잘만.. "
뭐라고? 못 들었어. 아니에요, 별 말 안했어요. 말끝을 흐리길래 되물었는데 신경쓰지 말란다. 얘는 왜 자꾸 아까부터 신경쓰이게 만든대. 전정국은 생각외로 잘 먹었다. 막상 보면, 시금치 못 먹어요 고기도 싫어요! 라면서 편식 오지게 할 도련님같이 생겼는데 또 아니다. 박지민은 모든 음식 다 쓸어버릴 것 같이 생겼으면서 나보다 편심이 심하다. 같이 뭔가를 먹을 때 항상, 채소를 나에게 일일이 덜어주었다. 그냥 쳐먹어. 라는 말에, 맛 없어,너나 먹어. 라고 한 건 아직까지도 재수없다. 니 맛 없는 건 제가 먹으라는 말?
" 하.. 개새끼. "
혼자 뒷담까다가 그만 독백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살짝 놀라서 전정국을 보니까 눈을 지구만큼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저요? 아니,아니야.
" 누나가 욕하는 건 적응이 안 돼요. "
" 아 그랬니. 미안, 조심할게. "
" 네. 감사합니다. "
또다, 또. 난 또 전정국에게서 박지민을 봤다. 졸라 자기 의사표현이 정확하다. 단호하고, 뒤끝없다. 얼굴하고
" 근데 무슨 일 있어요? "
" 아, 그게. "
신나서 박지민 뒷담을 깠다. 전정국은 처음엔 집중하며 들어주었다. 근데 좀 듣다가는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지 싶어서 눈을 마주치니까,
.. 발릴 뻔했다. 무릎을 말없이 꿇는 상황인가? 왜 저렇게 무섭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어느새 이야기가 뚝 끊겼다. 서로 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뭐 실수 한 거 있니? "
" 누나는 말 끝마다 김태형 형 얘기밖에 없네요. "
" 어?.. "
내가 말하면서 박지민 얘기 → 김태형 얘기. 로 흐름이 넘어갔나? 혼자 머리가 멍해져서 가만히 있으니까, 전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 가요. 다드신 것 같은데. "
" 어.. "
왜 화난 얼굴인 건데? 김태형 얘기를 한게 잘못인 건가? 우린 말없이 걸었다. 어딜 가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난 눈앞의 전정국만 신경쓰였다. 얘는 왜 자꾸 날 신경쓰이게 해.
전정국이 갑자기 멈춰섰다. 나도 멈춰섰다. 전정국은 한숨쉬며 뒤 돌아, 내 두 어깨를 잡고 말했다.
" 누나. "
" 응?.. "
" 어제 저한테 말씀하신 거 진짜 기억 안나요? "
" ... "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전정국을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 사귀자며요. 어떻게 그 말만 쏙 빼놓고 기억 하실까? "
" 야.. 정국아. 내가 제정신이 아니였거든? "
" 저도 제정신 아니였어요. 그 말 듣고. "
아. 말이 안 통한다. 그런 말은 왜 한 거지?아니 그런 말까지 했다고? 타임머신을 돌려서 과거의 나에게 죽빵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였다. 계속 굳어있던 전정국이 아이처럼 웃는다. 존나 뭐지.
" 농담이에요. "
" ..야, 넌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 "
진짜 기가 쫙 빨려서 해탈한 말투로 얘기하니 좋아 죽는다.
" 그런 말 안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근데.. "
" 근데 뭐.. "
" 저 막 붙잡긴했어요. 가지말라고. "
? 뭔 개소리람. 내가 진짜 그랬다고? 네. 이건 진짠데.
아 설마, 오늘 아침 가려는 박지민을 붙잡고 옆에 있어주지-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전정국 말 대로라면, 숙취해소제를 나뒀다고 하고 나가는데 내가 붙잡고 가지말라고 했단다. 그래서 몇 초 있다가 내가 잠드니까 그 때 나갔단다. 내가 깼을 때의 그 공허함, 허전함도 다 그 때문이였고, 박지민을 말린 것도 다, 다 그 때문이였다.
" 이제 기억이 좀 나요? "
어. 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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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노잼.. ㅠㅠㅠㅠㅠㅠ
♥ 버누 린봄 망고 수제비 암냠 정꾹이 탄국이 가온 민윤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