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를 부탁해
01
나는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사방은 조용했고, 들리는 것은 내 발소리 뿐이었다. 내가 빠르게 달릴수록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바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나는 깊은 어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두려움에 발을 멈추지 못한다. 마침내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풀려 더 달릴 수도 없게 되었을 때, 나는 근처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벽에 등을 대고 헉헉, 숨을 골랐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한계라고 생각했다. 더는 달릴수도, 소리를 질러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런 무력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미끄러지듯 주저 앉아 버렸다.
그대로 멍하니 앉아 바닥을 주시하고 있는데, 커다란 발이 와 내 앞에 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쉴 새 없이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들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덮인 그들. 발소리도 없이 나를 쫓아온 그들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제 어깨에 들쳐 메기라도 하려는 듯이, 덩치 큰 남자가 앉아있는 나를 들어 올렸다. 제법 높이까지 몸이 떠오르는 느낌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내 방 천장의 별들이었다. 여전히 숨이 찬 느낌이 들어 나는 몇 번이나 빠르게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또 악몽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내게는 벅차기만 한 꿈이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방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는 벌써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머리맡에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전원 버튼을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시 반. 잠에 든지 겨우 두 시간이 지난 시간이다. 하아, 또 한 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몸은 피곤했지만 지금 다시 잠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벌써 알고 있었다. 지금 잠들면 또 악몽을 꾸게 될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전 꾸었던 꿈의 장면들이 머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애써 나를 다독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기분을 떨치려면 일단 잠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속이 쓰리고 목이 말랐다.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나는 어제 술을 얼마나 마셨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선배가 따라준 막걸리도 몇 잔, 동기들과 함께 맥주도 몇 잔, 교수님이 주시는 소주도 몇 잔 마셨던 것 같다. 나는 머리를 내둘렀다. 개강파티라는 것은 원래 술파티였던가.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배를 문지르며 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어제 마신 술과 안주가 하나되어 목구멍을 노크할 것만 같았다. 일단은 시원한 물을 좀 마시기로 했다.
식탁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컵을 집어 정수기로 향했다. 냉수를 가득 담아 몇 모금 마시고 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나는 한 손에 컵을 든 채로 남은 한 손과 온몸을 최대한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목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관절들이 내게 시위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서 우두둑 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한 번 입안 가득 물을 머금었다. 우물우물, 가글을 하면서 해장을 위한 아침 메뉴를 고민했다. 배가 다시 꾸르륵 소리를 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래, 내가 혹사시켜서 미안하…
"푸웁!"
"……"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의 반쯤이 거실 바닥에 뱉어졌다. 나머지 반쯤은 내 목으로 잘못 삼켜졌다. 콜록콜록,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났다. 화장실 옆, 현관 쪽에 서 있는 것은 처음 보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색 수트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그 무채색의 모습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꿈 속의 검은 남자들과, 그날의 악몽이었다.
저절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컵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컵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졌다. 콜록콜록, 계속 기침이 났다. 남자가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식탁 의자에 발뒤꿈치가 부딪쳤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는 꿈에서처럼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뜨고 나면 이것도 꿈이기를, 다시 내 방 천장이 보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
그 바람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내게 말을 건 것이었다. 어쩐지 무척 신사적인 말투였으나 나는 그저 두려움만이 가득해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을 덜덜 떨면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 하고 있었다. 남자는 대답 없이 떨고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피다가, 이내 뒤돌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우선 침착해지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기침은 멎었지만 여전히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와 핸드폰이 있는 침실까지의 거리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침실로 가기 위해 남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조금 다가섰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인 것은 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자는 내가 깨트린 컵 조각을 맨손으로 치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남자는 어딘가 조심스럽고 차분해 보이는 손으로 컵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내가 연상했던 납치범이나 강도, 스토커 따위의 범죄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어쩐지 이상한 행동이었다. 대체 어떤 납치범이나 강도가 인질의 집에 쭈그리고 앉아 인질이 깨트린 컵 조각이나 치우고 있겠는가. 그러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왜 들어와 있겠는가. 나는 아주 황당한 고민에 빠졌다.
"위험합니다."
"…네?"
"물러서세요, 아가씨."
그러는 동안 남자가 내뱉은 말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저 처음보는 남자가 지금 깨진 컵 조각이 내 발을 다치게 할까 걱정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가씨라는 어색한 호칭은 또 무엇이며,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지. 내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남자는 컵 조각들을 대충 다 모은 것 같았다. 그는 가장 큰 조각 안에 깨진 조각들을 모두 모아 들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킨다. 가까이에서 보니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가 뒤로 돌았다. 나를 보고 서더니 갑자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
"오늘부터 아가씨의 경호를 맡게 된,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렸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는 듯했다. 덧붙여진 남자의 설명으로 사태를 대충 파악하자마자, 나는 방으로 달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가 눌러야 하는 것은 112가 아니라 엄마의 전화번호였다.
***
악몽이 시작된 것은 지난달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날이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힘들게 엄마의 허락을 얻어 독립한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었고, 하루하루가 자취라는 것에 대한 설렘과 로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침실의 천장 벽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 별 무늬로 하고 싶었고, 가구는 온통 깨끗한 하얀색으로 하고 싶었다. 거실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러그를 깔고 싶었고, 커다란 창에는 연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예쁜 커튼을 달고 싶었다.
그러한 바람들은 성격 급한 내가 인테리어도 마치지 않은 집에 먼저 들어와 살면서, 내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집, 새로운 곳에서 자취라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나는 주변의 모든 새로운 것들이 즐겁고 반가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원하는 시간에 집에서 나오거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거실에 누워 하루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있어도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편하기만 했다.
그날도 그러한 설렘으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뒤로는 등하교 때에 늘 버스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날도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던 길이었다. 동기들과 늦게까지 신나게 놀다가 겨우 막차를 탔기 때문에 정류장에 내렸을 때에는 주변에 사람이 얼마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타고 다니던 버스가 끊겨 더 늦게까지 운행하는 다른 버스에 타는 바람에, 늘 내리던 집 근처 정류장보다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술까지 몇 잔 들어가 유난히 기분히 좋았던 나는 밤에 보는 거리의 풍경을 즐기며 기분 좋게 걷고 있었다.
'저기요!'
'네?'
내게 말을 건 것은 회색 승합차를 운전하고 있던 남자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이에 차가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러나 돌아본 내게 웃는 얼굴로 길을 묻는 남자를 보자 나는 단순하게도 금방 안심해 버렸다. 길을 알려줘야 겠다는 생각이 의심을 덮었다. 남자가 길을 물은 건물의 위치는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찾아가는 길을 설명하려니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도 되었을 것을, 쓸 데 없는 친절이 발동한 나는 핸드폰을 들어 지도까지 찾는 열의를 보였다. 내가 지도에서 현재 위치와 그 건물의 위치를 찾고 있는 사이에, 승합차의 뒷좌석에서 웬 덩치 좋은 남자들이 소리 없이 내렸고, 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승합차에 올라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목적은 역시 돈이었다. 납치범들은 내가 꽤 커다란 기업 대표의 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엄마의 사무실로 직접 전화를 걸었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처하셨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납치범들은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올랐다. 그 장면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지켜보다가,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었다. 그들에게 잡혀있는 동안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들이 계속 수면제나 수면가스 따위로 나를 잠들게 했기 때문에, 병원으로 옮겨져 경찰의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내가 잡혀있던 곳이 어디였는지, 잡혀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내게 남아 있던 기억은 그들에게 납치될 때의 상황 뿐이었다. 사방에 어둠이 가득한 거리, 소리도 없이 다가온 검은 남자들, 그것들은 쉽게도 악몽을 만들어 냈다.
납치범들에게서 풀려난 뒤, 몸도 마음도 약해진 나는 회복을 위해 얼마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동안 엄마는 나를 설득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애써 그것을 거절했다. 혼자 사는 것이 조금 무서워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힘들게 얻어낸 자취의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 사는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때는 자취를 시작한지 겨우 일주일 남짓이 지났을 때였으니 더 그랬다.
나는 스스로도 안심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괜한 고집과 욕심으로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납치범들도 벌써 다 잡혀갔고, 이제는 늦게 다니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나름의 논리였다. 그러자 엄마가 제안한 것이 경호원이었다. 엄마가 곁에서 지켜볼 수 없으니 내가 자취하는 집에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그것을 거절했으나, 그게 싫으면 집으로 들어오라는 엄마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손을 들어 버렸었다.
엄마가 곧 붙여주겠다던 경호원이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지 2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경호원이 왜 느닷없이 내 집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전화를 통해 들려온 엄마의 해답은 명쾌했다.
- 내가 알려줬어, 비밀번호. 너 안 일어났으면 그냥 들어가 있으라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는 내가 납치 당하는 건 걱정되면서, 나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들어오는 건 걱정이 안 되는 걸까.
-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집 밖에서만 경호하다가 혹시 집 안에서 나쁜 일 생기면 어떡해.
"……"
- 집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 없어, 너. 세상이 이렇게 흉흉한데.
"……?"
- 엄마 일하러 가야 돼, 끊는다? 방은 대충 너 안 쓰는 방 하나 쓰라고 해.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
뚝, 전화가 끊어졌다. 엄마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금 전 자신을 전정국이라고 소개한, 내 경호원이라는 남자가 현관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캐리어마저 검은색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엄마는 경호원을 나와 동거시킬 작정인가 보다. 내가 끊긴 전화를 손에 들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 동안, 그는 집안 이곳저곳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집의 구조나 방의 위치 같은 것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 없이 내 침실 맞은편의 빈방으로 캐리어를 옮긴다. 그러는 모양이 꼭 제 집 같이 자연스러웠다. 혼자 사는 생활과 자취에 대한 로망은 그 뒷모습과 함께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이름은 전정국이랬고, 나이는요? 몇 살이에요?"
"스물여섯 살입니다."
"와, 그렇게 나이가 많았어요? 아저씨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
전정국이라는 사람은 참 딱딱하다.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없고. 그야말로 무뚝뚝함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내가 그와 대화하기 시작한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와 나는 2인용 식탁에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식탁 대신 텔레비전 앞의 탁자에서 밥을 먹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그가 없더라도 내게는 꽤 어색한 상황이었다. 혼자 쓰기에는 조금 커 보이는 하얀색 식탁을 들여 놓으면서, 혼자 살 집인데도 왠지 의자가 하나만 있는 것이 어색해 굳이 하나를 더 놓았던 것인데,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은 내 제안이었다. '어쨌건 얼마 동안은 같이 지내게 될 텐데,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어요?' 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진짜 의도는 그와 친해져서 엄마의 눈을 좀 피해 보자는 것이었다. 엄마가 내 집 안까지 경호원을 들여 놓았다는 것은 내 생활을 감시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경호원은 엄마가 보냈으니 엄마의 사람일 테고, 이 사람과 함께 사는 동안 평소처럼 생활했다가는 자연히 그것이 엄마의 귀로 들어가 내게 잔소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그와 미리 친해져서 엄마의 귀로 들어갈 내 얘기가 조금이라도 필터를 거치게 하자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한 것이 무색할 만큼이나, 그는 내 계획에 동참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가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면 거기에 답을 할 뿐이고, 그마저도 딱딱한 말투에, 웃자고 던진 농담에도 무표정이다. 그런 식이니 대화가 이어지지를 않는다. 참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이를 듣고 놀라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냐며 장난스럽게 물은 것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건지 걱정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아저씨로는 보이지 않을 얼굴이었다. 내 또래 정도의 나이를 예상하고 물었던 질문에 스물여섯이라는 답이 돌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과 함께 그제야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전체적으로는 적당히 남자답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뚜렷한 이목구비 덕분에 마주했을 때 곧바로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얼굴이다. 남자다운 얼굴로 보이면서도 눈매나 얼굴선은 또 적당히 둥글어서 그를 나이보다 어려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는 참 잘 생겼다. 표정이 굳어 있는 지금도.
"…기분, 나빴어요?"
"아닙니다."
"그럼, 정국씨라고 부를까요?"
"아가씨 편하신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아, 네…"
내내 굳어 있는 표정에 내심 걱정이 되어 기분이 나빴냐고 묻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편한대로 부르라는 말에 소심하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앞으로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식사 내내 무뚝뚝하기만 한 아저씨에 대한 사소한 반항심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아저씨 덕분에 여전히 누구 하나가 체해야만 끝날 것 같은 불편한 식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나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아저씨와 꼭 친해지고 말겠다, 라는 것보다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겠다는 것에 좀 더 가까웠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는 심보이기도 했다. 그런 오기로, 나는 무작정 아저씨에게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반찬은 입에 맞아요?"
"네, 괜찮습니다."
"고향은 어디예요?"
"부산입니다."
"그렇구나. 부산에서 오래 살았어요?"
"중학교까지는 부산에서 다녔습니다."
"그럼 바다도 많이 봤어요? 나 바다 진짜 좋아하는데, 아저씨는요?"
"네, 좋아합니다."
밥을 먹는 것도 잊고 수저를 든 채 실없는 질문을 퍼붓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아저씨는 하나하나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내가 질문을 멈추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식탁 위로는 여전히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연예부 기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꼭 원하는 답변을 듣기 위해, 혹은 뭐라도 기삿거리를 건지기 위해 마구잡이로 질문을 던져대는 인터뷰 현장에 나와 있는 듯했다.
"아, 혹시 취미 같은 거 있어요?"
"운동합니다."
"그래요?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진짜였네! 무슨 운동 좋아하는데요?"
"다 좋아하…"
답을 하려다 말고, 아저씨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피식, 하고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라도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신기했다. 드디어 성공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조금은 편해진 것 같은 아저씨의 표정에 내 얼굴에도 따라서 웃음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를 들더니 처음보다 훨씬 풀어진 얼굴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입을 뗀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아가씨."
"…네?"
"제 긴장을 풀어주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뭐…"
"아니면, 제가 아가씨를 귀여워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
어느 쪽도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그 말에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어느 쪽으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라서, 나는 당황한 것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수저를 들어야 했다. 금세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식탁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내 그릇에는 아직 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저씨에게 질문을 퍼붓느라 한동안 수저질을 멈췄던 탓이었다. 나는 밥과 반찬들에 이리저리 열심히 수저를 가져다 댔다.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고, 씹고, 삼키면서, 가끔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아저씨는 벌써 식사를 마쳤는지 수저를 내려놓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곧은 시선에 나는 거실 바닥에 물을 뱉었던 아침만큼이나 민망해졌다.
그래, 나는 아저씨에게 진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처음의 어색한 분위기에서 계속 식사나 하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포기하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대체 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건지 모르면서도, 커져가는 민망함에 그저 수저질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다가 체하든지, 아니면 급하게 먹어서 체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식탁 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밥알들이 밉기만 했다. 그릇에 남은 밥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는데, 앞쪽에서 다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체하십니다, 아가씨."
어딘가 다정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수저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입안에 든 밥을 꿀꺽 삼켰다. 아저씨는 웃고 있었다. 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첫사랑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어쩐지 마음이 간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하면서, 나는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문득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예감이 드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였다.
안녕하세요 목마입니다 :) |
* 목마름님 암호닉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진지) * 저번 글에 다녀가주신 댓글요정님들과 추천요정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 내서 글 써요, 저!! * 새 연재글 시작이네요. 떨려서 죽을 것 같아요. * 경호원 정국이와 부잣집 막내딸 여주의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쓰고 싶다고 생각 하면서 항상 망상만 하던 내용인데 ㅎㅎ... 정국아 미안..... * 이번 편에는 여주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와서 치환 기능 안 썼어요! 여주 이름 등장하는 편에서는 치환 기능 사용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