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를 부탁해
02
누군가와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자취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벌써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사실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날이면 거의 나 혼자였으니 당연히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빠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함께 일을 하셨고, 우리 오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님의 회사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회사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기에, 우리는 너무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엄마는 일을 쉬지 못하셨다. 그것은 남겨진 우리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늘의 아빠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아빠의 몫까지 엄마가 두 배로 바쁘게 일하셨기 때문에 다행히 회사의 성장은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다. 회사가 커져갈수록 엄마가 더 바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동안에 내가 집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들은 오빠나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와 함께였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의 빈자리라거나 혼자 있는 시간의 고독함 같은 것들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오빠는 스무 살이 되었다. 새해 아침이 밝자마자, 오랜만에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앉은 아침상에서 오빠는 느닷없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집에 있는 동안 시끄러운 오빠와 부대끼는 것에 조금 지쳐있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맘에 드는 소리를 하는 오빠에게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던 것 같다. 엄마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날로 오빠의 시위가 시작됐다.
거의 한 달간 이어진 시위 끝에 백기를 든 것은 엄마였다. 기어이 허락을 얻어낸 오빠는 기분 좋은 얼굴로 정말 집을 나가 버렸다. 그 뒤로는 자연스레 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집보다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엄마는 집에 혼자 있을 나를 걱정해 아주머니에게 조금 더 늦게까지 집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셨지만, 아주머니 역시 아이들을 돌보러 집으로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집에서 퇴근한 시간부터 엄마의 퇴근 시간까지, 자연스럽게 나는 집 안에 혼자 남겨졌다. 주말이나 아주머니의 휴무일이면 하루 온종일을 혼자 보내기도 했다. 그런 나 때문에 엄마는 일부러 일을 일찍 끝마치고 퇴근하시곤 했지만, 사실 나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그 시간을 즐기기까지 했다.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아빠 생각이 나면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는 것도, 좋아하는 음악이 집 안 가득 울리도록 큰 소리로 틀어놓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내 취향에 맞추어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에서 혼자 살아 보고 싶다는 로망이 생긴 것도 그때였고, 나도 오빠처럼 자취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새해 첫 날에, 엄마와 마주보고 앉은 아침상에서 나는 3년 전의 오빠와 똑같은 말을 꺼냈다. 엄마의 반대는 3년 전보다 훨씬 매서웠다. 덕분에 나는 대학 생활의 첫 학기를 여전히 엄마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자취 얘기를 꺼냈다. 그 지겨운 소리에 엄마가 다시 한 번 백기를 든 것이 바로 지난달이었다.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혼자 살 준비를 하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학교와 엄마의 회사에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나는 직접 집을 보러 다녔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해 그 자리에서 무작정 계약을 하고 나서는 그 집을 늘 상상만 하던 내 집처럼 내 취향에 맞게 꾸몄다. 참 즐거운 일이었다. 집 안 전체의 인테리어를 정하는 것도, 마음에 드는 가구를 고르는 것도 전부 내가 할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고르고 내가 꾸민 집에서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내 집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설레고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새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겨우 지났을 때에 납치사건에 휘말렸던 것이나, 그 사건 때문에 집에 경호원이 들어와 함께 살게 된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내 자취 생활에 아저씨가 등장한 둘째 날의 아침은 제법 평화롭게 시작되었다. 나는 시끄러운 휴대폰의 알람 소리 대신 문 밖에서 들려오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목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던 나는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된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털썩 침대에 몸을 맡겼다. 눈을 뜨고도 잠기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저씨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 버렸다. 왜 아저씨가 날 깨우는 거지. 수업도 없는 날이니까 아직 좀 더 자도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이불 안에서 푹신한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마냥 그렇게 있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고 싶은 아침이었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아저씨가 그냥 돌아갔나 싶어 나는 이불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똑똑, 아저씨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아가씨."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이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저씨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방으로 들어온 것인지 아주 조용한 발소리가 내 침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불 안에 숨어 버린 것인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저씨가 서 있는 것 같은 침대의 옆 쪽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니 궁금한 마음에 이불을 걷어내고 싶어진다. 어찌 되었든 일단은 이불 안에 숨었으니 계속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지금 막 잠에서 깬 척 연기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
"일어나셔야 합니다."
"……"
그 단호한 말투에 나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설마 이것도 엄마가 시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이불 아래로 작은 틈을 만들어 조심스레 눈을 갖다댔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가 보였다. 일단 지금 잠에서 깬 척하고 아저씨가 나가면 다시 잘까. 진짜 엄마가 나 일찍 깨우라고 시킨 거면 어떡하지. 아저씨를 설득해볼까. 아니야, 설득이 먹힐 사람이 아니었지 참. 아저씨가 입고 있을 회색 바지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에 잠긴 채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갑자기 회색 바지 대신 아저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아저씨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네, 좋은 아침이네요. 하하."
내 눈을 마주보고 건네는 아저씨의 아침 인사에 나는 하하, 하는 머쓱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민망함에 이불 아래에 만들었던 틈을 손으로 꾹 눌러 없애 버렸다. 이불 안이 더워서 그런 건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다시 이불 속에 숨어 애꿎은 발가락만 꼼지락대고 있는데, 아저씨가 피식,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꼭 아이를 어르기라도 하는 듯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또 한 번 나를 깨운다.
"그만 일어나세요, 아가씨."
"……"
"아침 운동 가실 시간입니다."
"…네?"
아침 운동이라니. 그 생소한 말에는 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
이른 아침의 공원은 제법 쌀쌀했다. 집에서 꽤 가까운 거리였지만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공원이었다. 조심스레 추측했던 내 예상보다도 훨씬 좋지 않은 전개였다. 엄마와 함께 살 때도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새벽 늦게 잠들었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기신기신 일어나던 나였다. 덕분에 학교에 안 나갈 때면 꼭 밤낮이 바뀌어 생활 리듬이 완전히 깨져 버리곤 했는데, 엄마는 그것이 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 대신 나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아저씨였으니, 아저씨가 아침 일찍부터 나를 깨운 이유 정도야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이번에는 아침 운동이라는 강수를 하나 더 둔 것이었다. 주말 아침이면 깨워도 깨워도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눕던 나 때문에 쌓인 경험에서 나온 비책임이 분명해 보였다. 덕분에 나는 잠도 제대로 깨지 못한 채 졸린 눈을 비비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따라나서야 했던 것이었다.
아침 운동이라는 것은 일단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는 일이었다. 엄만 진짜 너무해. 나 위험하다고 경호원 붙여준다더니, 이게 뭐야. 그냥 엄마 대신 아저씨가 감시하는 거잖아. 나한테는 미리 말도 안 해줬으면서. 엄마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열심히 구시렁대면서 나는 집업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맞은편에서 부는 바람에 얼굴이 차가워졌다. 이따 오후엔 또 덥겠지. 더 자고 싶다. 아, 짜증나. 처음 와 보는 공원의 풍경을 즐길 새도 없이, 내 머리에는 자꾸 짜증이 차올랐다.
아저씨는 가볍게 뛰면서 내 속도에 맞추어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었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흰색 반팔 티가 운동하려고 입은 옷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정갈해 보였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바람도 제법 차가운데 아저씨는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힘 없이 터덜터덜 걸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일곱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아직 푹신한 이불 속에 파묻혀 한참은 더 게으름을 피워도 되었을 시간이다. 아저씨는 원래 이렇게 일찍 일어나나. 나보다 조금 앞에서 천천히 뛰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은 오히려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터덜터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만큼이나 느리게도 걷는 걸음이 어느새 공원의 커다란 호수를 반 바퀴도 넘게 돌아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을 따라 뛸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내 느린 걸음이 답답했는지 이제는 계속 내 앞에서 천천히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를 따라 애써 무거운 걸음을 옮기면서, 이제야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공원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다들 정말 매일 같이 나와 아침 운동을 하기라도 하는 건지, 전부 익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혼자 나와서 우리처럼 호수를 돌며 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강아지와 함께 나와 산책을 하는 사람도, 심지어는 이 아침부터 함께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있는 커플도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나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는 내가 뒤에서 아무리 툴툴거려도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할 뿐이었다. 문득 그 뒷모습이 원망스러워졌다. 마침내 턱 끝까지 심술이 차올랐을 때, 나는 마침 보이는 입구 쪽의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바로 때마침 돌아 본 아저씨가 그런 나를 발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아저씨를 쳐다보면서, 나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아저씨는 내 앞에 와서는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가씨, 많이 힘드십니까."
"네."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요?"
"네!"
드디어 원하던 답을 얻어낸 나는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이나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공원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부터 벤치에 털썩 주저 앉기까지, 내내 터벅터벅 걷기만 했기에 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저씨의 뒷모습에 대고 혼자 투덜거리며 걸어야 했던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은 나를 한 걸음도 더 떼기가 싫을 만큼이나 피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어폰을 집에 두고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정도로 지루했던 시간이었다. 이만 들어가자는 말에 우렁차게 대답하고 나서는,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대하며 눈을 깜박였다. 내가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동안에, 아저씨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웃음을 찾았다.
"아저씨. 그럼 우리 운동했으니까, 들어가는 길에 음료수 하나씩 사 먹을까요?"
"네, 아가씨."
금세 기분이 풀려 음료수를 찾는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단순했다. 아저씨는 한숨이 섞인 작은 웃음과 함께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섰다. 아저씨를 따라 일어선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른 밝은 표정과 힘찬 발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나보다는 훨씬 보폭이 큰 아저씨가 금방 나를 따라잡아 어느새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겨우 어제 처음 만났음에도 말 없이 걷는 지금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문득 놀라웠다. 원래도 낯을 잘 가리는 성격인데다가 유독 윗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더 서툴던 나였다. 아저씨가 그만큼 배려를 해주고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바로 조금 전에 아저씨를 원망하던 것이 미안해졌다. 괜히 아저씨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아저씨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공원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아가씨!"
그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나는 내 쪽으로 뻗어진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아저씨 쪽으로 빠르게 당겨졌다.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을 만큼이나 빨랐던 움직임이었다. 바로 다음에는 뒤 쪽에서 무언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아저씨의 흰색 반팔 티였다. 아저씨가 숨을 내쉬는 것이 들릴 만큼이나 가까워진 거리와 허리를 단단하게 잡고 있는 팔이 느껴지자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곧바로 아저씨가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꼭 그러했듯이, 아저씨는 나와 눈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괜찮냐고 묻는 말에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생겨난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저씨는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내가 다시 한 번 민망하게 웃자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아저씨와 떨어져 그 옆에 서자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지나간 것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운동복을 빼입은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아저씨의 분위기가 살벌해진 것에 나는 그저 자전거의 주인인 남자와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앞에 선 남자는 선뜻 말을 걸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결국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아저씨였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그렇게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그것도 경주용 자전거를."
"그게… 어차피 바로 저기서부터 탈 거라,"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가리킨 것은 공원 산책로 옆에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였다. 아저씨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제는 처음 마주한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신기했지만, 이렇게 싸늘하게 굳은 얼굴은 또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저씨의 표정과 함께 단숨에 얼어 버린 분위기에 나는 숨을 죽였다.
"자전거 전용 도로가 저렇게 가까이 있는 걸 알면서 그랬다는 겁니까, 지금?"
"아니, 뭐… 학생, 많이 다쳤어요?"
날카로운 대화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남자는 내 상태를 살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의 발걸음이 땅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저씨는 내 팔을 잡아 끌어 제 뒤로 나를 숨겼다.
"아니 저는, 괜찮은데…"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괜찮다는 내 말 위로 아저씨의 목소리가 무겁게 덮어졌다. 물론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지나간 자전거의 소리에 놀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대로 자전거와 부딪쳐 넘어졌다면 크게 다칠 뻔했다는 것도, 그래서 순간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나 멀쩡히 두 발로 서 있는 지금, 이렇게까지나 무서운 표정을 짓는 아저씨를 쉽게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남자는 아저씨를 향해 허, 하고 어이 없다는 듯 웃었지만 곧 단호한 아저씨의 태도에 머쓱해졌는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남긴 채 뒷머리를 긁으며 돌아섰다.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표정을 굳힌 채 남자를 쳐다보다가 남자가 돌아서자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이어지는 당부가 있었다.
"아가씨. 앞으로 밖에서는,"
"……"
"절대 제 옆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그 굳은 표정으로도 숨길 수 없이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어쩐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
음료수 병에 꽂은 빨대를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금세 굵은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공원에서 집이 꽤 가까운 거리였고, 아저씨와 내가 걸음을 거의 뛰다시피 빨리했음에도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옷과 머리가 다 젖어 있을 정도였다. 화장실이 두 개인 것이 다행이었다. 빗속에서 흰 티 한 장만 걸치고 있던 탓에 옷이 죄다 젖어 아저씨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누가 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부끄러워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아저씨의 상체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옷을 챙겨 내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온 나는 문을 꼭 닫고 그 문에 기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부진 실루엣에 스스로 뺨을 때리며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러자 진지한 표정으로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 당부하던 아저씨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거울에 비친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우스운 꼴을 하고서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창 밖에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누르면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세팅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아저씨였다. 번쩍이는 화면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는 텔레비전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을 만큼이나 나는 단번에 아저씨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저씨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본 것인지 마침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눈이 마주쳤다.
편한 차림의 아저씨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씻고 나와 텔레비전을 튼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에, 목에는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스포츠 중계를 보고 있었는지 텔레비전에서 캐스터의 긴박한 목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서 웅성거리는 텔레비전의 소리와 다르게 아저씨와 나 사이에는 꼭 어제처럼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내 방 문 앞에 선 채 쉽사리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때, 고맙게도 정적을 깨 준 것은 꼬르륵, 하고 내 배에서 울린 소리였다.
아침도 먹지 않고 아침 운동을 했으니, 배가 고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밥 먹을 시간만 되면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대는 것도 평소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상황에서, 텔레비전 소리 만큼이나 커다랗게 거실에 울린 내 소리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저씨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 되어 나를 쳐다보다가, 결국 터져나온 웃음에 고개를 숙였다. 울상이 된 내가 애꿎은 수건만 손에 꼭 쥐고 먹을 것을 찾으러 부엌으로 향하려는데, 아저씨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들었다.
"볶음밥, 좋아하십니까."
"네…"
일단 대답을 하고 나서도 영문을 알 수 없을 만큼이나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이었다. 그 말에 내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을 때, 아저씨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며 부엌으로 향하는 걸음이 자연스러웠다. 아저씨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나는 아저씨가 앉아 있던 소파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직 소파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아저씨는 여유롭게 부엌을 오가며 냉장고와 찬장의 문을 몇 번 여닫았다. 당근이나 양파, 감자와 같은 식재료들을 제 집처럼 척척 찾아 꺼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언젠가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사왔다가 한 번도 열지 않고 넣어 두었던 통조림 참치까지 어디선가 나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도마에 탕탕, 칼 소리를 내며 채소를 손질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해 보이면서도 무척이나 어색했다. 상상도 한 번 해 보지 못했을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자꾸 마주하게 되는 아저씨의 새로운 모습에 신기하고, 또 가슴이 뛰었다. 부엌에서부터 거실까지 퍼져 오는 맛있는 냄새가 기분 좋았다.
마침내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볶음밥이 거실 탁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놀라움에 입을 딱 벌렸다. 밥그릇에 투박하게 담긴 볶음밥은 당장 수저를 들고 달려들고 싶을 만큼이나 맛있어 보였다. 아저씨는 볶음밥이 가득 담긴 그릇을 거실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가 수저를 가져왔다. 아저씨에게 수저를 건네받자마자 나는 아저씨가 먼저 맛보기를 기다릴 틈도 없이 바로 수저질을 시작했다.
"와…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원래 이렇게 요리를 잘 해요?"
"가끔 하는데, 할 줄 아는 건 많이 없습니다."
우물우물, 입 안 가득 볶음밥을 밀어 넣고 양손으로 엄지까지 들어 보이며 그 맛을 칭찬하니 아저씨가 민망한 듯 작게 웃음 지었다. 그제야 아저씨도 수저를 들었다.
"오늘은 아저씨가 맛있는 거 해 줬으니까, 다음엔 내가 해 줄게요."
"네, 아가씨. 기대하겠습니다."
"어, 기대는 하면 안되는데…"
다음에는 내가 요리를 해 주겠다는 내 허세 섞인 말에 아저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는 그런 아저씨에게 적응해 되려 작은 농담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했다.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시작한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밥그릇이 비워졌다. 양이 좀 많다고 생각했던 것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밥을 먹는 중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어제처럼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다음에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저씨는 나보다도 훨씬 먼저 그릇을 비우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꽤나 인기가 좋은 예능 프로그램이었음에도 아저씨는 몇 번 피식, 헛웃음을 짓는 것이 다였다. 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배가 부르니 자연히 졸음이 밀려왔다. 텔레비전 소리 대신 창 밖의 빗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빗소리가 듣기 좋다. 그런 생각과 함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딱 낮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네? 아니요, 뭐…"
강의 시간에 졸던 것을 교수님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멍한 표정으로 졸고 있던 것을 아저씨가 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져 말끝을 흐렸다. 놀라서 잠시 달아났던 잠기운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금세 다시 돌아왔다. 다시 눈이 감기려는 순간에, 리모컨을 집어 든 아저씨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여전히 졸음이 담긴 눈으로 아저씨를 쳐다보자 아저씨도 나와 눈을 맞춘다.
"주말이니까, 낮잠 정도는 괜찮습니다."
"……"
"대신,"
다음 순간에 내 머리 위로 가볍게 올려진 것은 아저씨의 손이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이제는 창 밖의 빗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거실에 다시 한 번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머리는 다 말리고 주무세요, 아가씨."
말을 마친 아저씨는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저씨가 가볍게 짚었던 머리를 만지자 정말로 아직 다 마르지 않았는지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했던 그 말에 설렐 구석은 조금도 없었음에도, 나는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 말을 하던 아저씨가 웃고 있던 것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눈치 없이 쿵쿵거렸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듯 가볍게 인사하고 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기운 대신 머릿속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온 것은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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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닉 목마름님, 민윤기님, 통통님, 윤기모찌님, 무민이님, 뿡뿡님, 알로에님, 가온님, 꾹꾹이님, 나니꺼님, 캡틴님, 권지용님, 틸다님, 현지님, 미스터쿠야님, 눈웃음님, 짐그래님, 버누님, 전정구기님, 망고님, 채영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 암호닉 신청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글에 아무 때나 편하게 신청해주세요. * 저번 편이 잠깐이지만 초록글에 올랐습니다..! (감격) 시작부터 많이 관심가져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댓글요정 추천요정 고마워요! * 뜬금 없이 등장한 여주의 오빠는 사실 태형이입니다. * 마지막 장면을 쓰는 동안 저는 다섯 번 정도 제 머리에 손을 올렸습니다. (애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