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지팩트- 아까워)
우리 옆집엔 (홀로) 고딩이 산다 02
(부제: 오빠는 왜 나보다 어려?)
w. 애기무댱
1.
무르기 없어요. 라고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 채 집에 쏙 들어가 버린 전정국을 보니 내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 진짜 막 소고기 같은 거 먹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내가 아무리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선생님은 별로 월급 못 받는단 말이야.... 그래도 내가 너랑 쌩을 까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어. 그래. 한숨을 내쉬며 도어락을 느릿하게 열자, 갑자기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돌아보니 악마의 표정을 짓고 있는 전정국이 학교 여학생들 다 홀렸을 법한 미소로 몇일 간 꽁꽁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약속도 안 잡아요?"
"어.... 그러게."
"내일 열 한시."
알겠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정국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대답도 안 듣는단 말이지.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어, 아주. 기가 찼지만 그래도 쟤 없었으면 몇 대 맞고도 남았을 테니 그냥 군소리 없이 밥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좀 귀엽...잖아. 그건 무리수인가. 요즘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돌아다니는 구나 싶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장을 일단 열어봤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애 앞에서 늙은 티 나 보이기 싫었다. 내가 내년이면 반오십인데.... 일종의 자존심 같은 거였다. 어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늙어 보이고 싶겠는가. 그 상대가 누구던 간에 늙은 티 나는 건 굴욕이다, 엄청난 굴욕. 옷장을 이리저리 뒤져 봤지만 입을 옷이 오늘따라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직업이 교사다 보니 블라우스 같은 것만 엄청나게 많지 막상 가볍게 입을 옷은 별로 없는 나였다. 하긴, 예전엔 주말에 나가봤자 마트 가는 거였으니까 츄리닝만 입고 다녔으니 내가 무슨 옷이 있겠어. 그나마 입을 옷이라고는 몇 달 전에 친구랑 가서 샀던 원피스 정도? 그냥 이거나 입어야지. 내 팔뚝과 다리는 이 옷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하지만. 그리고 그 시간엔 잠 자야 되는데.... 어휴. 그냥 내일 길 가다가 그 미친놈이나 우리 반 학생들이나 안 만났으면 좋겠다.
"나 얼굴 왜 이렇게 생겼지."
"......."
"와. 나 진짜 기미 장난 아니야. 피부 봐...."
얼굴이 희면 뭐 해. 무슨 화산송이마냥 모공이 장난이 아닌데. 내 친구들은 다 피부 백옥 같은데 난 왜 이 모양일까.... 나 진짜 못났다. 자기 전 거울을 슬쩍 보니 여간 답이 없는 게 아니어서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보존하기 위해 거울 보는 것을 그만뒀다. 내일 늦게 일어나지 말아야지. 내 쌩얼은 극비니까.
2.
다행히 평소보다 눈이 훨씬 빨리 떠졌다.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는데 일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벼워서 깜짝 놀랐다. 회춘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기 죽기 싫은 마음에 머리를 속성으로 말린 뒤 화장대 앞에 비장하게 앉았다. 내가 평소엔 귀찮아서 화장 잘 안 하는데. 특별히 오늘은 얼굴에 사기를 좀 쳐 봐야겠어.
얼굴에 여러가지 것들을 펴바르다 보니 전 남자친구들 만날 때 좀 꾸미고 다녀볼 걸,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해도 크게 달라지는 얼굴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그렇게 뻥 차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해 봤자 돌아오는 건 너가 나랑 안 자 줘서 차는 거라고 말한 그의 기억 뿐이지만 왠지모를 후회가 몰려왔다. 그래도 이미 지난 일인걸. 넌 나중에 그렇게 크지 마, 전정국.
열 한시 5분 전에 할 일이 없어서 그냥 현관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먼저 나가 있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정각이 되면 나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앞집 문이 열려서 엄한 애 기다리게 하기 싫어 나도 나왔다. 너가 무슨 어둠의 자식이니? 밖을 나오니 검은 코트에 검은 맨투맨에 긴 바지를 입은 전정국이 보였다. 애가 얼굴이 안 그래도 하얀데, 검은 옷을 입으니 더 하얘 보였다. 내가 왜 그렇게 얘 신발에 관심을 가지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검은색 컨버스 하이를 신었다. 그렇게 입고 다니다간 쪄 죽겠다. 뒤 돌아 있던 전정국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보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쳐다도 안 보던 애가 느릿하게 나를 쳐다보니, 뒤에 무슨 말을 할 지 왠지 무서워졌다.
"대충 입고 나와도 되는데."
"신경 쓴 거 아니거든?"
"신경 쓰는 게 죄도 아니고. 왜 그렇게 발끈해요?"
"......."
"왜 차였대."
"너 그 얘기 한 번만 더 해?"
왜 차였대. 역시 비수를 꽂는 전정국이다. 본 지 별로 안 됐는데 얘 성격은 불 보듯 뻔하다. 전형적인 새침한 남자애. 그게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신경을 안 쓴 건 아니니까 별다르게 할 말은 없었다. 그나저나 어깨 되게 넓네. 성인 못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그 동안 오징어들만 보고 살았나.
"올블랙이네."
"옛날엔 몰랐는데 보니까 검은색 옷 밖에 없더라구요."
"젊은...아니. 나이도 어린데 좀 화사하게 하고 다녀라.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댁도 그렇게 입고 다니지 마요."
"내가 왜?"
"몰라."
3.
난 분명히 오늘 밥을 사 주겠다고 온 건데, 오늘 내가 향한 곳은 밥집이 아니라 영화관이었다. 순식간에 표를 뽑아 온 전정국이 나에게 티켓을 건내며 떨떠름하게 받아요, 하고 말했다. 표를 보니, 정말 무섭다고 친구들이 볼 거면 남자랑 보라고 하던 공포 영화였다. 너 진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포영화를 못 봤다. 이유는 단순히 무서운 게 싫어서, 잠을 설치기 싫어서, 였다. 워낙에 가위가 잘 눌리는 잠버릇 탓에 돈 주고는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공포영화다. 어렸을 때 오빠가 그냥 코미디 영화 보러 가자고 해서 의심 없이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까 공포 영화여서 2시간 내내 귀 막고 눈 감고 있다가 2주 동안 오빠랑 말 안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근처도 안 갔는데, 전정국이 내미는 표에 선명히 찍혀 있는 공포 영화 제목에 눈 앞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너 이런 거 잘 보니?"
"재밌잖아."
넌 이런 거 재미있어서 좋겠다. 난 생사의 문제인데.
"나 이거 진, 진짜 못 봐. 나 진짜 무서운 거 못 보는데...."
"예매해 놓은 거라서."
"...봐야 돼?"
"취소하면 되는데."
"......아."
"아, 근데 나 이거 진짜 보고 싶었는데."
"......."
"막 며칠 전부터 밤 새서 기다렸는데. 진짜 기대 많이 했는데."
"......"
"엄청 잘 보게 생겨서 예매해 놨는데.... 그리고 별로 안 무서운데...."
전정국이 순식간에 울상이 돼선 입술을 쭉 내밀고 이거 진짜 보고 싶었다면서 계속 중얼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전정국의 모습에 난 점점 영업 당하고 말았다. 사람 하나 설득시키는 데 재주 있구나, 너. 그리고 별로 안 무섭다잖아? 괜찮겠지 뭐! 누나가 돼서 저거 몇 분 봐준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한번 봐도 괜찮겠지. 몇 초만에 합리화를 끝내버리고 나서 전정국 손에 들려 있던 표를 뺏었다.
"보자, 영화."
"못 본다면서."
"응. 못 보지. 근데 볼 테니까 너 이거 지켜."
"뭘요."
"앞으로 너 말 짧게 하지 마. 내가 너보다 생일 케이크 5번은 더 먹었거든? 밥도 얼마나 더 먹었는 줄 알아? 그리고."
"그리고....요?"
"그리고 댁, 댁 거리지 말고 그냥 누나라고 그래. 알았지?"
며칠 전부터 진짜 거슬렸다니까. 댁이 뭐야, 댁이. 무슨 시집 간 거 같잖아. 포부 넘치게 전정국에게 요구사항을 들이미니, 그냥 수긍할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전정국 입꼬리만 미친듯이 올라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너 지금 비웃는 거 맞지?
"뭐, 뭘 웃어?"
"무슨 일 해요, 누나?"
아. 그냥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걸. 전정국이 무슨 일 하냐고 묻는데 심장이 폭행당하는 기분이었다. 여우같은 새끼.
"중학생 가르쳐. 학교에서."
"애들이 누나 말 잘 안 듣죠."
"아니? 아아주 잘 듣는데?"
"딱 봐도 안 들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엄청 잘 듣거든?"
"애기가 어른 노릇 하는데 누가 들어."
"....."
"남자애들은 좀 들어주는 척 할지도 모르겠다."
"....."
"귀여워서?"
4.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의 연속이었다. 딱히 무서운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그냥 분위기 자체가 음산해서 옛날에 봤던 것보다 더했다. 나 자취하는데 같이 잘 사람도 없고.... 오빠라도 불러야 되나?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고민만 했다. 옆을 슬쩍 돌아봤을 때마다 영화에 깊게 심취해 있는 전정국이 보였다. 누가 보면 그냥 다큐 보는 줄 알겠네. 다들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 마당에 혼자 평온하게 영화를 보는 전정국이 새삼 신기했다. 아님 싸이코? 난 무서워서 죽을 것 같건만.
아까 전에 딱히 무서운 장면이 안 나왔다는 말은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잔인한 장면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손이 네 개였으면 좋겠다. 귀도 막고 눈도 가리게... 근데 난 손이 두 개밖에 없네. 혼비백산이 돼서 조용히 귀를 막기 시작한 나를 꼴깝 떤다는 듯 바라보는 옆 커플이 재수 없었다. 너넨 간 커서 좋겠다?
"안 보이죠?"
"......어."
"진짜 못 보네."
처음으로 옆을 돌아본 전정국이 내 눈을 제 손으로 조용히 덮었다. 손 진짜 크네. 완벽히 차단된 시야가 맘에 들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는 내내 전정국은 계속 내 눈을 덮어 주었다. 팔 안 아프려나.
"너 팔 안 아파?"
"아프죠."
"괜찮은데 왜 계속 그랬어."
"뭐가 괜찮아요. 보니까 울 것 같던데."
"......."
"거짓말도 못해, 훈계도 못해."
"....."
"넌 왜 나보다 누나야? 다섯 살 아니야?"
"......"
"거짓말 하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망태 할아버지에 피식 웃음이 나와서 그냥 대충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지금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너 진짜 누나 심장을 아주 쥐락펴락 하는구나. 무슨 느낌인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 꽤나 맘 고생할 것 같다. 전정국, 이 치명적인 남자야. 너 자꾸 나한테 이러지 말라니까?
"민증도 없는 게."
"응, 알았어요."
"난 엄청 배고프거든? 밥 안 먹을 거니?"
"배고팠어요?"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더니 배고팠어요, 하고 묻는 전정국에 잘 익은 사과처럼 빨게져 버렸다. 별로 인정하긴 싫지만 난 네 no yeah행 열차에 탄 것 같아. 오빠는 왜 나보다 어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주 youngchang hang^^
오늘도 똥글 읽어주셔서 감사함미다.
사실 이 글 쓴 이유가 정구기가 곧 미자탈출을 하잖아요...
가슴이 아파서 싸지른 글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올게요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