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말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만큼 나는 봄이 좋았다. 봄은 언제나 설렘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초봄의 쌀쌀한 날씨는 싫었지만 언제나 새로 시작된다는 설렘이 나를 들뜨게 하곤 했다. 특히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환상적이라고만 해두자. 그리고 어느새 교정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들이 이뻤다. 이르게 피는 목련도 사랑스러웠고, 봄하면 바로 떠오르는 벚꽃도 사랑스럽고, 이름 모를 풀잎들과 작은 꽃들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수영이는 청승이라고 놀려댔지만. 오늘따라 괜히 들떠 눈이 빨리 떠졌다. 알람이 울릴려면 삼십분도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신나서 삼십분이나 잘 수 있다며 눈을 감았겠지만 오늘은 왠지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침대에서 감기지 않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결국 일어났다. 여유롭게 밥도 먹고, 천천히 씻고 챙겼다. 그러다가 얼른 교복을 입고는 가방에 책을 넣었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복작복작거려 수영이랑 여기저기 치이며 갔을텐데 평소보다 삼십분은 일찍 나온지라 버스는 텅텅 비어있었다. 버스 뒷문에 가까운 좌석에 가서 앉았다. 가방을 뒤적거리다 이어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어쩐지 허전하더라니. 뭐 어때, 가만히 눈을 감고는 버스 차창에 얼굴을 기대었다. 봄을 알리는 따스한 햇빛이 내리쬔다. 확실히, 봄이 오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확실히 이상하다. 처음 맞는 봄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설렐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잠금을 풀고 카톡을 확인했다. 수영이다. 어디냐는 물음에 학교라고 답했더니 왜 벌써 학교에 가 있냐고 물어온다. 그냥. 일찍 일어나져서. 처음에 그냥이라고 답했다가 수영이가 삐질 것을 알기에 덧붙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교에 가는 중이었지만. 내가 답하니 그럼 나중에 교실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이어폰 말고 잊은 게 하나 더 있다 싶었는데 수영이를 빼먹어서 그랬나보다. 미안해.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니 수영이가 괜찮다며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낸다. 하여튼 박수영, 귀여워. 왠지 그런 수영이가 상상이 가서 알겠다고 답했다. 꼭 교실에 있으라며 자신도 얼른 챙기겠다고 한다. 나중에 봐♡ 잔망스러운 수영이의 카톡을 마지막으로 카톡방에서 나왔다. 때마침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수영이가 오려면 최소한 삼십분은 남았다. 아니, 꼭 수영이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이 등교하기 까지는 최소 이십분은 남았을 것이다. 조용한 학교 건물로 들어서 4층에 있는 교실로 향했다. 복도는 조용했다. 썰렁한 복도에도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조심히 자물쇠를 풀고 교실로 들어섰다. 내 자리에 가방을 놔두고 앉았다. 뭐하지.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교실에서 나왔다. 마침 눈에 보이는 운동장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불더니 오늘은 완연한 봄날씨였다.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고 차지않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우리학교는 유난이 벚꽃이 많았다. 보통 대학교에 벚꽃이 많지 않나. 목련과 같은 다른 나무도 많았지만 운동장은 벚꽃 나무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벚꽃이 많았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자 꽃잎들이 사르륵, 떨어졌다. 혼자 보기에는 확실히 아까운 풍경이었다.
벚꽃이 손에 떨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이렇게나 많이 떨어지면 하나 쯤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따스한 바람이 확, 하고 불어왔다. 사르륵, 하며 많은 양의 꽃잎들이 떨어졌다. 손바닥을 쫙 폈다. 한참 기다려도 꽃잎들은 모두 내 손을 피해간다. 내가 먼저 잡으려고 노력해야하는걸까, 싶어 공중에 대고 손을 휘휘 저었다. 손을 오무리며 잡으려고 노력해봐도 나를 비웃듯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에이, 실망한 내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 꽃잎 하나가 살랑사랑 떨어져 내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신기하게도, 하트 모양이었다.
"결국 잡았네?"
와, 하트다. 이런 모양도 가능한건가? 하트 모양의 벚꽃잎은 처음 봐서 신기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가 나를 보며 개구지게 웃고 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저를 쳐다보자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내 옆에 와 앉았다. 안녕, 괜히 어색해서 앞만 바라보는데 남자애가 말을 건다. 얘는 붙임성도 좋나보다. 괜히 신기하게 느껴져 빤히 보는데 꽤 잘생겼다. 눈도 똘망똘망하니 빛나고, 전체적으로 순하게 생겼다. 수영이가 말하는 소년미가 넘치기도 하고. 빤히 보다 이름을 몰라 명찰이 있는 쪽을 보는데 명찰이 없다. 뭐지, 그렇게 안생겨서 불량한 편인가. 명찰이 없어서 이렇게 학교에 일찍 온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눈치를 챘는지 나는 전정국, 하고 먼저 말한다.
"음, 혹시 교무실이 어디야?"
남자애, 그러니까 정국이의 물음에 교무실이 있는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함께 눈을 돌린 정국이가 그렇구나, 하며 멋쩍게 웃는다. 있잖아, 나, 사실 오늘 전학 왔거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큰 비밀을 가르쳐주듯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한참 내 눈을 바라본다. 맑은 눈을 같이 쳐다보고 있노라면 괜히 내 속이 다 들키는 기분이다. 결국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정국이의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너는, 이름이 뭐야.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이 없었는데 정국이와 있으니 유난히 당황스럽다. 어떻게 해줘야 되는거지. 혼자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정국이가 다시 살짝 웃는다. 악의 없어 보이는 순한 얼굴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한참 입술을 잘근잘근거리다가 정국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순간 정국이의 손이 움찔거렸다. 초면인데 놀랄만도 하지. 깍짝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는 나를 바라본다. 조금 망설이다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혹시 못 알아볼까봐, 무슨 의미인지 모를까봐, 한글자, 한글자 정성들여서 쓰기 시작했다.
".... 이게 네 이름이야?"
내 손에 손을 잡힌 채로 멍하게 있던 정국이가 돌연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탄성을 한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살짝 웃는다. 이름 이쁘다, 정국이의 웃음은 봄햇살같다. 눈, 코, 그리고 입까지 유하게 흘러내려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어낸다. 그 뒤로 말없이 앉아있던 정국이가 가봐야겠다, 하며 일어선다. 마침 수영이가 도착할 시간이 다되어 나도 일어섰다.
"다음에 만나면 또 인사하자. 나는 교무실 가야되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망설이던 정국이가 다시 웃었다. 가야겠다, 정국이의 말에 내가 답을 못하고 있으니 정국이가 다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올려 잘 가, 라는 듯 살랑살랑 흔들었다. 정국이가 다시 유한 웃음을 보이고는 저 멀리로 걸어간다. 다시 봄바람이 불어오고, 꽃잎들이 떨어진다. 정말로, 이상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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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 쯔음에서 수영이를 만났다. 수영이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차가 막히냐며 툴툴거렸다. 얼른 올라가자, 수영이가가 내 손을 꽉 잡고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종이 쳤는지 모두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먼저 들어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영이도도 웃으며 죄송합니다!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우리를 쳐다보시더니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이들도 다시 칠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까 내가 앉아 있던 벤치가 보였다. 여전히 벚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게 훨씬 더 이쁜 것 같기도 했다. 자, 전부 모였으니까 자기 소개 해보자, 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안녕, 나는 전정국이고, 부산에서 왔어. 친하게 지내자."
창 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선생님 옆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정국이가 보였다. 아이들은 고 3인데 전학을 올 수 있는거냐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정국이는 1분단 맨 뒤에 앉자, 선생님이 정국이의 등을 살짝 두드리고는 손을 뻗어 1분단 맨 뒷자리라는 곳을 가리켰다. 선생님이 가리킨 자리는, 공교롭게도 내 옆 자리였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수영이가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너무하십니다, 선생님! 목청이 큰 수영이가 선생님께 항의하자 선생님께서는 귀가 따가우신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 선생님, 그래도... 수영이가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아이들도 수군거리며 동조했다. 선생님이 난감한 듯 수영이를 보았다가, 나를 보았다. 선생님과 눈을 마주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도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그에 나도 살짝 웃어보였다. 곧 내가 수영이의 등을 톡톡 쳤다. 괜찮다고.
"아니, 그래도..."
수영이가 나를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수영이는 바보 같은게 뭐가 좋냐며 퉁박을 주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헤실거리며 웃자 결국 졌다는 듯이 웃었다. 수지의 짝인 태형이가 수영이에게 퉁박을 주었다. 얘가 애기도 아니고, 니가 자꾸 감싸면 어쩌냐. 태형이의 말에 수영이가 표정이 굳어지더니 태형이의 등짝에 스파이크를 날렸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태형이의 머리에 마구 꿀밤을 놓기 시작했다. 태형이는 수영이에게 맞으면서도 날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태형이가 고맙기도 해 나도 살짝 웃어주었다.
"그럼 어쩌지, 정국아..."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던 선생님이 정국이를 바라보았다. 정국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쁘게 웃었다. 곧 정국이는 선생님을 마주 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저기 앉을게요. 정국이는 선생님께 말을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망설임없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웃은 정국이는 곧 내 옆에 앉았다. 3월 내내 비어있던 내 옆자리가 찼다.
"김태형. 우리 애기 잘 부탁한다."
태형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국이도 잘지내보자며 태형이의 손을 맞잡았다. 수영이는 애기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태형이에게 한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며 조회를 끝내고는 나가셨다. 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모두들 정국이 주위를 둘러쌌다. 여기저기서 질문 세례가 날아들었다. 너 사투리도 할 수 있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정국이는 하나하나 대답을 해 주었다. 당연히 할 수 있지. 근데 부모님이 서울 사람이셔서 가끔씩만 나와, 정국이의 대답에 아이들이 해보라며 정국이를 부추겼다. 정국이가 음, 하고 고민을 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가시나야, 활짝 웃는 정국이를 보며 아이들이 우와, 하며 신기해했다.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곧 시들해졌는지 하나 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국이가 이제 좀 편하다며 나를 보고 웃었다. 아까 전, 하트 모양 벚꽃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