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탄, 이리 와"
너와의 약속을 취소한 채 정국이와 걷고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네가
두 주먹을 꽉 쥔 채 억지 미소를 보였다.
더운건 죽어라 싫어하는 애가
햇볕 아래서 몇시간이나 기다린건지
흰 피부 위를 덮은 붉은 홍조와 아무렇지 않은 척 쓸어 넘기는
땀에 젖은 머리칼이 안쓰러웠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 안내, 그러니까 빨리 와. 응?"
짜증이 난 듯 버릇대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노려보던 네가 내게 다가왔고,
정국의 손을 잡고 뒷걸음질 치는 나를 보며 그대로 우뚝 멈춰섰다.
위험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상처받은 네 눈동자를 보면 항상 마음이 흔들렸다.
"..너가 지금 뭐 때문에 그러는지 나 몰라"
"..."
"뭐 때문에 돼도 않는 핑계까지 대가면서 약속 취소하는지도,
내가 뭘 잘 못했길래 자꾸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는지도,
그리고 이 끝에 결국 뭐가 남아 있을지도.
나 진짜 한개도 모르겠어서"
"..."
"병신같이, 이젠 너까지 의심하고 있어"
"..."
"무슨 소문이 나던 다 거짓말이라고,
너만 믿어달라고 했었지.
왜 너를 못 믿냐고 제발 너 좀 믿어달라고,
너 그랬었잖아."
"..."
"근데, 탄아"
"..."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내가 널 믿어야 해?"
올곧게 바라보는 네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윤기야.."
"...응"
"...나 믿지마"
내 말에 인상을 찡그린 네가 실소를 터뜨렸다.
뭐라고?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일그러지는 너의 눈꼬리를 보며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냈다.
"나 바람핀 거 맞아"
"..야"
"..."
"..네가 지금 해야 할 말이 그게 아니잖아.
아니라고, 다 사실이 아니라고..그냥 나는.."
"..미안...미안해.."
"야, 전정국 네가 말해 봐.
장난도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어?"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네가 슬펐고,
..미안.
정국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결국 네 눈이 붉어졌다.
분명 너를 힘들게 하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숨을 쉬기 힘들다는 말이 이제야 가슴에 와닿았다.
목에 거친 무언가가 박힌 것 마냥 따갑고 쓰려왔다.
울먹이는 나를 너보다 먼저 눈치 챈 정국이
내 어깨를 감싼 채 돌아서고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네 손이 쉽게 풀려 떨어졌다.
"...가지마"
"..."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
"..가지마 제발"
등 뒤로 흐르는 목소리에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네가 흘러내렸다.
울지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어쩌면 내가 그리도 두려워했던 그 기억 속 악몽은
네가 아니라 그 속에 너를 두고 도망쳐버린 나였다.
울지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어렸던 너는 그렇게 내게서,
여렸던 나는 그렇게 네게서 멀어졌다.
울지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헤어짐을 준비하며 - 이정하
네가 입은 교복만큼이나 그때의 우리는 나약했다.
민윤기가 결혼했다
-이별 뒤에 남는 것
"죄송합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실수에 야유가 터져나왔다.
하필이면 야외촬영에 잦은 실수라니,
인터넷에 도배 될 내 기사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나, 오늘따라 왜 이래요. 뭔 일 있어요?"
걱정스레 물어오는 상대 역 보검이의 말에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게 다 민윤기 때문이었다.
우결 촬영을 미뤄도 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내 드라마 촬영 날을 딱 맞춰서 내조랍시고 찾아온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틀릴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면,
이렇게 날 방해하는 게 목적인 것 같기도 하고...,
더운 날 지연되는 촬영 때문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는
보검이를 보면서라도 실수를 하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조명 아래에 섰다.
"자 다시 갑니다!스텐바이!!"
큐!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보검이의 팔목을 붙잡았고,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가워진 표정의 보검이 내 손을 뿌리쳤다.
"..구질구질하게 진짜"
"...너 갑자기 왜 그래, 응?
갑자기 이렇게 헤어지자고 하면 나는..나는?"
"다른 여자 생겼다고 했잖아요.
뭐 그렇게 오래 사귄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달라 붙어?
나 누나 질렸다는 게 그렇게 이해가 안가요?
다시 한 번 설명해줘...-"
내 손에 맞아 뺨이 붉어진 보검이 화가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밀쳤고,
그대로 밀쳐진 내가 벽에 박고 쓰러졌다.
그대로 쓰러진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자 보검이 내게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요?"
"아, 응 괜찮아. 컷 싸인 났어?"
"네! 너무 세게 밀친 것 같은데, 진짜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너는 볼 괜찮아?"
괜찮다며 웃어보인 보검이 배 고프다며 대기 천막 안으로 사라졌고,
잠시 쉬었다 간다는 말에 나도 윤기에게로 다가갔다.
"너 언제 온거..-"
"웃어, 사람들 많아"
인상을 찡그린 채 다가오는 내 모습을 보며 윤기가 내게 말했고,
결국 인위적인 미소를 띄운 나를 보며 만족으러운 표정을 짓던 윤기가
싸늘하게 웃어보였다.
"드라마 잘 되겠네."
"..왜?"
"내용이 현실적이고 좋아서.
누구한테나 일어날만한 일이잖아"
"..."
"너랑 나한테도 예외는 아니고"
"..."
"나도 너처럼 한 방 날렸어야 했는데, 아쉽다"
멍하니 너를 바라보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네가
낮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어때, 버림 받는 기분이?"
싸늘하게 뱉어진 말에
왠지 가슴이 저리는 듯 아파왔다.
"윤기씨가 탄씨 대본 연습 도와주는 걸로 오늘 촬영 끝낼게요."
카메라 감독님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내용을 윤기랑 하라고 지금 나보고?
목까지 차오른 욕짓거리를 쇼파에 먼저 자리 잡은 윤기를 보며
겨우 겨우 삼켜냈다.
"몇 페이지 부터 하면 돼요?"
대본 하나를 들고 여기저기 살펴보며 말하는 윤기에,
나도 옆에 자리 잡고 앉아서 26페이지를 가리키자
대본을 읽어보는 건지 대본에 박힌 윤기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간다.
"처음부터 하면 돼요?"
윤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쉼호흡을 한 번 한 윤기가 대본을 바라봤다.
"왜 그랬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윤기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본 어디를 둘러봐도 그런 대사는 없었다.
지금 26페이지 보고 있는 거 맞아요?
대본이 바뀐건가 해서 올려다 본 윤기의 손에 대본따윈 없었다.
언제 내려놓은 건지 대본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으며,
윤기의 눈을 올곧이 나를 향했다.
여전히 찍히고 있는 카메라를 보니, 이걸 대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랬냐고"
"...야"
"네가 뭔데, 네가 뭐라고 그딴 짓을 해"
"..."
"네가 뭐라고 내 추억을 깨"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 보는 윤기의 시선에
나도 테이블 위에 대본을 내려 놓은 채 윤기를 바라봤다.
언젠가 튀어나올 추억들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쑥불쑥 나타난 기억들은 나를 항상 힘들게 만들었다.
"그 때 전정국 손 잡고 가던 너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지,
4년 째 이어가던 믿음을 한순간에 버린 너를 보면서 내가 어떤 기분을 느낄 지,
혼자 남겨진 그 자리에서 내가 얼마나 울었을 지,
하나도 모르잖아, 너"
"..."
"알았으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딴 짓을 할 수는 없었겠지"
붉어진 얼굴의 윤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18살의 너를 보는 듯 했다.
감정 제어따윈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화를 내며 소리치는 모습에
나도 너를 따라 눈물을 쏟아냈다.
너와 나의 시간이 멈췄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
"..."
"방에 불을 켜면 항상 네가 나왔어.
손 잡고 걸어가던 마지막 니네 뒷 모습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가 않아서
불 꺼진 방에서 한참을 그렇게 울기만 했어."
"..."
"그러다 어느새 너를 미워하는 나를 보면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너는 분명 추억을 버렸는데, 나까지 그 추억을 버리는 건 용납이 가지 않아서
온종일 네 사진만 들여다 봤고, 그렇게 2년이 흘렀어"
"..윤기야"
"너는 4년의 추억을 버렸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나한테 너는 4년이 아닌 6년의 추억을 버렸어.
그동안 내가 혼자 닦아왔던 2년까지 포함해서"
"..."
"왜 그랬는지 들어보라고 했지"
나를 바라보는 눈물 섞인 시선에 심장이 멈추는 듯 했다.
"왜 그랬어,
도대체 어떤 이유가 있었으면"
윤기가 참고 참았을 눈물이 윤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쉽게 나를 버릴 수 있어, 탄아"
너무 힘들게 돌아온 말이 나를 감싸 안았고,
울음을 터뜨린 나를 달래줬던 예전의 네가 내 앞에 있었다.
추억이 사라진 자리에 비겁한 미련이 얼룩졌다.
+
안녕하세요!!ㅋㅋㅋㅋ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쓰긴 썼는데
분량이 짧네요.
그래도 이 거 쓰느라 내일 하루는 망했어요....ㅎㅎ
아, 그리고 저는 독자님들이 막 쟈가운 윤기 좋아하실줄 알았는데
그건 저의 착각...
이번엔 그나마 따스한 윤기를 데리고 왔는데
마음에 드시나요..?ㅎㅎㅎㅎ
다음 우결 촬영은 또 어디서 해야할지..
추천 받아요!!ㅎㅎ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암호닉 |
나니꺼 . 눈부신 . 그리 . 가온 . 민슈기 . 복동 . 리베 . 159 . 민윤기 . 태태뿡뿡
암호닉 신청 감사합니다! 혹시 오타나거나 빠뜨리지는 않았겠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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