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탄소, 니네 학원 괜찮냐?" "글쎄... 선생님은 잘 가르쳐주시지. 나 학원 다니고나서 영어만 30점 올랐잖아." "오.. 그래?" 기말고사가 끝나고 다들 성적에 우울해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물어왔다. 너 영어학원 어디 다니냐고. 성적이 썩 좋지 못한 내가 유일하게 자신있어하고 또 점수도 잘 나오는 과목이 바로 영어이기 때문이다. "학원에 잘생긴 애들 많냐?" "학원을 남자 만나려고 다니냐?" 잘생긴 애? 그래, 잘생긴 지는 모르겠고 그냥 애 하나있지. 동네에 있는 작은 학원이라 학생 수도 적은데, 나랑 같은 시간에 수업 듣는 애라고는 그 애, 하나 뿐이다. "그럼 걔랑 잘해봐!" ...는 무슨. 친구야, 니가 한 번 다녀보면 알게 될거다. 걔랑 잘해볼 수 있는지...! 그 애 얘기를 좀 하자면 말이야... 9개월 전, 학원에 첫 수업 들으러 갔던 날이었다. 기대와 걱정을 가득 안고 학원으로 간 나를 반기는 건 휑한 교실뿐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몇 분 채 남지 않았음에도 학원에는 나와 선생님 외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었다. "정국이 얘는 또 왜 이렇게 안 와!" "......" "탄소야 우리 먼저 수업 시작할까?" 그 때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했었다. 정국이...? 혹시 일진.. 그런건가...? 그래서 학원 늦고 그러는건가...? 그런 나의 생각을 더더욱 증폭시키게 만든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들린 문소리였다. "안녕하세요." 낮게 깔린 그 애의 목소리에 움찔해서는 뒤로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했던건 사실이지만 차마 그 애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복도를 지나 내 자리를 뒤로 하고선 내 앞자리에 가방을 놓고 의자를 꺼내는 그 애 손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맨날 늦게 오지. 숙제는 했어?"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학원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정적. "늦으면서 숙제도 안해오고, 잘한다."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얼른 이 상황이 지나가고 수업이 시작되기만을 바랐다. 내 머릿속에서는 선생님께 바락바락 대들며 손을 올리는 그 애의 모습만 재생, 그리고 리플레이. 다 내 상상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휴. 다음 시간엔 꼭 해와." "...네." "대답만 잘하지." "......" "내가 학원을 접어야지 정말."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끝났다. 긴장이 탁 풀리고 몸이 스르르 풀려왔다. 그러더니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아.. 안되는데... 첫 수업부터 졸면 안돼... 거의 잠에 들었다시피 영어듣기를 했다. 그리고 내 문제집엔 첫 장부터 비가 내렸다. "탄소는 듣기 연습 좀 해야겠다." "네..." "독해 몇 회 해야되지?" "4회 26번부터 해야되요." "그래, 정국이부터 읽고 해석해볼까?" 정신을 반쯤 놓고서는 독해 수업을 들었다. 그 애가 해석하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있자니 또 생각보다 나쁜 애는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수업 늦고 숙제 안해오는것만 빼면 참... 착하고 조용한 애인것 같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두어명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나와 그 애에게 작은 교실로 가서 단어를 외우라고 하셨다. 작은 교실이 어딜까 생각하던 나는 내 앞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 그 애 뒤를 졸졸 따라갔다. 능숙하게 교실 불을 켜고 의자에 앉아 단어책을 펴는 그 애를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침묵. "......" "......" 평소 말수가 없고 주위에 남자라곤 아빠 밖에 없는 내가 감히 침묵을 깨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색한 공기만 가득 맴도는 교실에서 그 애와 나는 조용히 단어만 외울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단어 시험을 칠 때도 교실엔 연필심 사각거리는 소리 뿐,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녕히계세요." "그래, 잘 가고 숙제 잘 해와." 선생님의 당부를 끝으로 학원에서 나와 차례로 계단을 내려가는 나와 그 애 사이엔 여전히 침묵만 흘렀다. 밖으로 나와 그 애를 봤을 땐 이미 저 멀리에서 바쁜 걸음으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9개월이 흐르고 드디어 학원에 적응해 선생님과 일상적인 수다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나는... 여전히 그 애 아니 전정국과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다. 물론 아직도 전정국의 얼굴을 볼 용기도 내지 못하고 있다. 아, 학원 문 바로 옆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다가 학원으로 들어오는 전정국의 얼굴을 한 번 보기는 했었다. 정말 얼핏 보았던 전정국은 꽤나 잘생겼던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 그 때 이후로 전정국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그 잘생겼던것 같은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얘는 또 늦네." "그러게요." "그래도 너네는 참 착하다." "왜요?" "다른 반에는 애들끼리 수준 안맞다고 시간 바꿔달라고 하는 애들이 널렸거든. 근데 너네 둘은 그런 얘기 한 번을 안하잖아." 선생님의 말을 듣고 사실 조금 놀랬다. 그런 애들이 진짜 있구나... 난 그저 학원 다니면서 선생님 수업이나 잘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덜컥'
그리고 전정국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