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이라도 해봐!"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에 가기 전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함께 카페에 앉아있던 친구가 건넨 말이다. 남사친은 얼어 죽을. 남사친이라도 해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사친이라니.
시간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를 남녀공학으로 나온 나는 그때도 남자애들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 2학년, 누구나 다 겪는다는 전정국도 걸렸었다는 그 중2병에 걸려 남자애들이랑은 점점 더 멀어졌다. 다른 내 친구들과는 달리 소위 말하는 일진놀이가 아닌 공부에 목을 매는 조금은 이상한 유형의 중2병에 걸려 수업시간에 시끄럽게 떠들며 선생님에 대한 나의 집중을 방해하는 남자애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지금은 현대과학기술의 힘을 약간 정말 약간 받아 나름대로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그 때는... 내가 봐도 정말 별로였다. 그런 내가 공부한답시고 남자애들에게 조용하라고 소리를 지르니 그 흔한 남사친 하나도 없을 수밖에.
중학교 3학년. 그 때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더니 우리 반은 남녀가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옆 반은 남녀할 것 없이 다 같이 어울려서 노는데 우리 반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반에 딱 하나 있던 일명 반 커플마저 깨지고 나니 우리는 서로를 비하하게 되고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도 모솔은 아니다. 차라리 모솔이라고 하고 싶은 기억이기는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꽤나 좋은 성적 덕분에 선생님들의 신뢰를 가지고 있던 내게 수학선생님께서 퀘스트를 하나 주셨다. 반에서 성적이 부진한 친구 하나를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에 대한 신뢰를 깨버리고 싶지 않았던 탓에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친구와는 종종 전화도 하며 친밀감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사춘기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향한 그 친구와 나의 감정은 단순히 친구 그 이상이 되었고 그 친구와 나는 새벽에 카톡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랑 사귀자. 난 니 여친할게, 니가 내 남친해.’
남자인 그 친구가 내 여자친구를 하고 여자인 내가 그 친구의 남자친구가 되어 사귀자는 재미없는 고백도 받았었다. 물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진짜 고백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때는 분위기에 취해 고백을 받아드렸었지만 막상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마주하니 내가 왜 그랬지 싶었다. 당시의 내 외모를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그 친구는 정말 못생겼었다. 그 날 학교에서 처음 깨달았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금은 그 친구도 혹독한 다이어트 끝에 괘 준수한 외모를 갖게 되었다고 들었다.
여하튼 결론은 이거다. 내 사전에 남사친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것.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한테 남사친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그 남사친이 전정국이라면 더더욱!
“됐어. 전정국이랑 남사친을 어떻게 해.”
“못할 건 또 뭐 있냐?”
“어쨌든 안 돼.”
“오늘 학원가서 꼭 말 걸어봐. 알겠지?”
친구의 귀를 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말해도 안 들어먹는 건 분명 귀가 안 들려서 일거다.
“싫다면서 화장은 꼬박꼬박하네.”
가방에서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들자 친구가 시비조로 말한다. 이건 전정국의 시력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일 뿐이야.
6시 57분. 학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나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저...기.”
“악!”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들길래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그리고 뒤를 돌았을 땐 차라리 까무러치는 게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미안.”
“아... 아니야.”
전정국이다. 뭐라고 해야 되지...?
“그... 문...”
“어...?”
“안 올라가나 해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내가 학원 문을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 쪽팔려...
“아... 미안.”
전정국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고 그 뒤를 따라서 나도 올라갔다. 학원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계단이 오늘은 만리장성 마냥 길게 느껴졌다. 어색한 공기도 가득.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둘이 같이 들어오네?”
“앞에서 만났어요.”
“그래?”
앞에서 만났다는 전정국의 말이 왜이리 설레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앞에서 만난 게 그렇게 설레는 일인가? 내가 약간 미친것 같다. 전정국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