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연애
03
바람이 불 때엔
타이틀 곡 피드백 이후로 수록곡까지 후반 작업을 마치고 녹음까지 하느라 바쁜 민윤기를 뒤로 한 채 한 소속사에서 들어온 뮤직비디오 제작 의뢰로 회의에 참석했다. 간만에 일하려니 신나서 얼마전에 새로 산 옷을 입고 화장에도 힘 좀 주고 집을 나섰다. 일 시작하면 거지같이 하고 다닐게 뻔하니 첫 인상이라도 좋게 보이자는 생각이었다. 나름 이름 좀 알린 가수로 체면 차린 회사의 내부는 깔끔했다.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간 컨퍼런스 룸에는 미리 와있는 가수, 타 키스탭과 아트디렉터 그리고 사장님이 앉아있었다.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미리 와있는 스탭들 때문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제 작곡가만 도착하면 된다는 말에 준비해온 파일들을 가방에서 꺼내 정리하고 있었다. 얼마 안있어 유리문이 열렸고 문 사이로 얼굴을 비추는 남자는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뇨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안녕하세요."
민윤기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며 인사했다. 사장님은 가볍게 웃어보이며 회의 분위기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셨고 피피티를 준비하며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보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유림 뮤직비디오 잘 봤어요, 곡 분위기와 뮤직비디오 연출이 잘 어울리더라고요. 마침 슈가씨도 ㅇㅇ씨와 한번 더 작업할 의향이 있다고 해서 연락드린건데 이렇게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네."
"두 분이야 워낙 각자 분야에서 잘 하시는 분들이라.. 저번에도 둘의 작업 케미라고 기사가 크게 떴었죠? 그 때 저도 아주 흥미롭게 봤는데 이렇게 같이 하게 되니 너무 기쁘네요."
"저도 너무 좋네요. 슈가씨 노래 좋아하거든요."
"저도 ㅇㅇ씨 뮤직비디오는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습니다."
민윤기가 끝까지 가수도 알려주지 않고 수록곡도 들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민윤기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거였다. 저번에 함께 한 뮤직비디오 일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서 다시는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한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다시 한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거다. 분명히 민윤기가 먼저 내 얘기를 꺼냈을거다. 후.. 서로 은근히 눈을 마주치며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때 피피티를 넘기며 이번 뮤직비디오 컨셉과 연출 방향, 의도 등등 읊으며 아트 디렉터와 한참을 얘기하고 있는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가수가 말을 꺼냈다.
"드라마 형식으로 제작하면 내가 주인공하면 안돼요?"
"태형이 넌 연기가 아직 부족해서.."
"저 연기 연습도 열심히 했잖아요. 그리고 뮤직비디오면 대사도 적을테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사장님?"
"흠.. 나야 좋지만, 감독이.."
가수 V의 제안에 사장님은 나를 돌아봤고 아트 디렉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나를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도 아니고 나름 피쳐링 붙이고 서정적인 수록곡의 뮤직비디오인데 이미지 탈피도 할 겸 가수가 직접 연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섣불리 판단했다가 피보면 안돼니 V씨 연기를 좀 볼 수 있을지 제안했더니 갑자기 태형씨가 나를 돌아봤다.
"누나."
"....네? 저 말씀.. 하시는거에요..?"
"이렇게 보니까 누나 눈이 참 예쁘네요."
"...예..에?"
"귀여워.'
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V의 귀가 살짝 발그레져 있었고 나는 당황해서 사장님을 살짝 돌아보니 연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사의 자랑거리라도 내놓은 듯 흐뭇하게 웃어보이는 사장님이 어떠냐며 나에게 되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민윤기를 살짝 쳐다보니 평소와 같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래, 민윤기가 이런 걸로 질투할 위인은 아니지.
"와, 연기 처음하는거 맞아요? 잘하는데요? 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자 배우만 잘 섭외하면 될 것 같네요."
"저도 괜찮은 것 같네요, 얼굴도 잘 생겨서 연기까지 괜찮은게 찍을 맛 나겠네요."
촬영 감독님도 옆에서 한마디 거뒀다. 오늘은 간단한 틀 정도만 얘기를 나눴고 좀 더 자세한 얘기는 키스탭들과 다시 따로 회의 날짜를 잡기로 했다.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의 어깨를 누군가가 꾹 눌렀다. 민윤기겠거니 했는데 이미 민윤기는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뭐지 싶어서 뒤돌아 봤을때는 한껏 멋부린 V가 나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도 잘부탁드려요, V씨."
"아 참, 그리고 아까 그거 연기 아니었어요. 내 진심."
"...네?"
"진짜 귀엽다, 그리고 내 이름 V아니고 김태형이에요. 태형이라고 불러주세요."
씨익 웃고서는 문 밖으로 먼저 나가버리는 태형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데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싶은 마음을 갖고 회사 건물을 나서니 건물 입구에 서있는 민윤기가 보였다.
"아 뭐야!"
"뭐긴 뭐야."
"왜 미리 말 안해줬어!"
"젊은 놈이 치대니까 좋아?"
"좋긴 뭐가 좋아, 나이도 한참 어려보이는게 아주 멋진 척을.. 으휴."
"밥 먹으러 가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내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은 민윤기가 자연스레 내 차로 향했다. 녹음은 마쳤냐는 내 질문에 오늘 저녁에 마무리 지을 것 같다는 말에 나도 가겠다고 했다. 민윤기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아까 받은 정국이가 부른 데모곡을 계속해서 돌려 들었다.
* * *
"다시."
"형 좀 쉬었다해요."
"다시."
"윤기야, 좀 쉬었다해. 목 상하겠다 태형씨."
"....나와."
인상을 팍 쓰고선 의자에 기대 누워 눈을 감은 민윤기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스 안에서 나온 김태형은 그제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앉아있는 소파 옆에 드러누웠다. 오른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김태형을 한번 흘긋 쳐다봤다.
"둘이 많이 친한가봐요?"
"헤헤.. 그래보여요?!"
"그때 뮤직비디오 진짜 잘 나왔던데, 노래도 그렇고."
"우리가 일은 끝내주게 하지, 그치 윤기야?"
"...."
"얘가 원래 일할때는 이렇게 예민해."
김태형은 내 말에 살풋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민윤기가 의자를 우리 쪽으로 돌릴 생각도 없어보여 그러려니하고 김태형과 대화를 나누는데 김태형이 갑자기 피곤하다며 잠시 어깨를 빌려달라는 거다.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안한채 어깨에 막무가내로 머리를 기대버렸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뭐하냐고 물었다.
"누나 그리고 말 편하게하세요."
"아니 이거 좀 치우고.."
"아아아~ 빨리 촬영 들어갔으면 좋겠다."
"태형아 누나 무거워.."
그래요? 미소를 지은 김태형이 내 얼굴 가까이에 자기 얼굴을 들이내밀더니 고개를 요리조리 기울여대며 애교를 부렸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끼를 흘리고 다니니 소녀팬들이 안따라 다니겠나. 이 직업 무섭다며 혀를 끌끌차며 김태형을 옆으로 밀어내니 귀가 축 쳐진 강아지의 모양새를 하고 앉았다. 그러고도 잘도 조잘조잘대는 김태형과 영양가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민윤기의 호출에 다시 부스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유난히 까칠해보이는 민윤기의 뒤통수에 나까지 힘이 빠졌다.
다시, 다시, 다시. 민윤기는 한참을 그렇게 다시를 외쳐댔고 오기를 부리듯 김태형도 계속해서 다시 불렀다. 두 남자의 미묘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보나마나 민윤기는 저 어린놈에게 나름의 질투심을 느낀걸테고, 나한테 티내기엔 민망하니 김태형한테 괜한 시비를 걸고 있는걸거다. 왠만하면 안저러는데 오랜만에 저러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해서 가만보고 있었다. 그 채찍질에 김태형만 죽어나는 듯 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다시부르고 다시부르더니 나중엔 꼬리를 내리고 항복 선언을 했다. 형님 형님하며 애교를 부리는 김태형에 민윤기도 피곤했는지 적당히 시킨 뒤 오케이를 외쳤다. 아직 녹음이 끝나려면 꽤 남은 것 같아 담요를 덮고 옆 방으로 도망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여 잠을 청했다.
* * *
윤기는 모던한 디자인의 비싸보이는 소파에 누워있는 ㅇㅇ의 앞에 주저앉았다. ㅇㅇ는 피곤했는지 담요가 소파 아래로 떨어진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배탈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담요를 집어들어 배 위에 살풋 올려놓았다. 아주 소중한 새끼 고양이를 다루듯 담요를 꼼꼼히 덮어주고 흘러내려온 긴 앞머리를 옆으로 치워주기도 했다. 오랜 만남의 익숙한 공기가 그들의 주위에 맴돌았다.
"나이 먹고도.. 이렇게 이쁘니까 엉뚱한 파리 새끼들이 꼬이지.."
"...."
"오빠 피곤하다. 파리새끼 그냥 손바닥으로 때려잡으면 되는데..."
"...."
"아까 우리 사귄다고 확 말해버리려다가 지는 기분이라 참았다."
"...."
"너가 걔한테 직접 말할 때 까지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윤기는 취침등의 밝기를 낮추고 ㅇㅇ의 얼굴 가까이에 자리잡고 소파에 등을 기댄채 잠을 청했다. 딱딱한 바닥에 뉘인 몸보다 불편한 마음을 불빛이 닿지 않는 방 구석 한켠에 밀어놓은 채. 그렇게 윤기는 ㅇㅇ의 얼굴만을 시야 가득히 채우며 편안한 잠을 청했다.
주절주절 |
꽤 많은 분들이 이쁜 댓글도 남겨주시고 암호닉 신청도 해주셨어요! 그저 혼자 머릿속으로 망상하던걸 글로 끄적끄적 해본건데 다들 기뻐해주셔서 너무 기쁘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사랑해요♥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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